푸꾸옥 여행기 - 1편

by 닥터 플로우

1월 1일, 달력의 바깥으로 빠져나간 아침


1월 1일 오전 10시. 대한항공 탑승구 앞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아직 따뜻하게 남아 있었는데, 우리 셋 - 나와 와이프, 그리고 31개월 된 내 딸 서원이 - 의 마음은 이미 달력의 바깥으로 반쯤 빠져나가 있었다. 게다가 이번 여행은 우리 가족만의 도피가 아니라, 내 친구 성호네 가족과 함께하는 ‘두 가족 원정대’였다.


성호는 내 서울대 의대 동기들 중에서도 유난히 사람들이 잘 따르던 친구였다. 공부를 잘하는데 그걸로 남을 누르지 않고, 분위기를 잘 읽는데 가볍지 않았다. 누가 먼저 말 꺼내기 애매한 순간에 자연스럽게 한 발 나서서 판을 정리하는 타입. 이번 여행에서도 그 성격은 변함이 없어서, 비즈니스로 간 자기네 가족 짐 붙일 때 우리 짐까지 자기네 이름으로 묶어주며 시작부터 우리를 한결 편하게 만들어줬다.

여행에서 이런 장면이 좋다. 누가 크게 생색내지 않는데도, 누군가가 남의 등을 가볍게 밀어주는 순간. 그 밀림이, 생각보다 멀리 간다.



인천공항 제2여객 터미널 면세점에서, 서원이와 나.


푸꾸옥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맞아준 건 햇살이었다. 한국은 한파로 꽁꽁 얼었다고 들었는데, 이곳은 반대로 공기가 뜨겁고, 빛이 두툼했다. 말 그대로 ‘겨울이 없는 곳’.

계절이 빠진 자리에 사람은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푸꾸옥은 베트남 남서쪽에 놓인 섬이고, 섬을 포함한 일대가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여긴 단순히 ‘휴양지’가 아니라, 자연을 보전한다는 국제적 약속 위에 세워진 무대다. 우리는 그 무대 위에 잠시 올라온 관객이자, 동시에 등장인물이다.


리젠트 푸꾸옥, “럭셔리”라는 단어의 실감


이번에 묵는 곳은 리젠트 푸꾸옥. 이름부터 이미 실크 셔츠 같은 감촉이 있다. 바닷가에 붙어 있는 럭셔리 리조트라는 설명은 흔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럭셔리’가 단지 비싼 가구나 넓은 객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럭셔리는 “불필요한 불편이 제거된 상태”다. 아이가 있는 여행에서 그게 얼마나 큰 가치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첫날이 1월 1일이라는 게 좋았다. 새해라는 건 늘 ‘새로 시작하겠다’는 마음을 강요하는데, 여긴 반대로 “그냥 오늘을 잘 살자”는 쪽으로 몸을 설득한다. 달력의 첫 장을 넘기는 방법이 꼭 결심일 필요는 없다고, 햇빛이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성호 와이프 윤서 씨는 키가 크고 - 그리고 성격도 정말 키처럼 큰 분이었다. 호탕한데 사려 깊다. 말이 크다고 마음이 거친 게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와이프와 서원이를 여러모로 잘 챙겨줘서, 나는 여행 첫날부터 은근히 안도했다. “아, 이번 여행은 사람 때문에 편해지겠다.”


그리고 하성이.

나이가 어린데도 유난히 총명한 아이가, 나를 보자마자 첫인사처럼 문제를 낸다.


“삼촌, 18을 소인수분해 해보세요.”


순간 나는 - 푸꾸옥의 햇살보다 더 뜨거운 - 당황을 느꼈다. 새해 첫날, 섬에 도착하자마자 맞닥뜨린 시험 문제라니.

물론 정답은 어렵지 않다. 18은 2와 9, 9는 3과 3… 결국 2 ×3 ×3. 그런데 그 짧은 계산이 내게는 묘하게 오래 남았다.


여행도 비슷하지 않나. 겉으로는 “푸꾸옥 5박”이라는 한 덩어리인데, 실제로는 작은 요소들이 곱해져서 기억이 된다.

성호네의 배려

하성이의 예상 밖 질문

서원이의 까르르 웃음

이런 소인수들이 모여서 여행이라는 숫자를 만든다.


처음엔 하성이와 나의 언어 주파수가 잘 맞지 않았지만, 여행은 참 이상하게도 ‘같은 풍경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사람 사이의 코드를 맞춰준다. 며칠 지나니 대화가 술술 풀렸고, 나는 어린 친구에게서 의외로 많은 걸 배웠다.

아이들은 어른처럼 세상을 “정리”하려 하지 않고, 대신 세상을 “발견”한다. 그 차이가 여행을 더 새롭게 만든다.


하성, 하빈, 서원이와 나.



우리가 머문 거실에서 서원이, 과일이 참 새콤달콤 맛있었다.


모래가 시계를 이기는 날


리젠트 푸꾸옥의 바닷가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풍경”이었다. 리조트가 해변에 붙어 있다는 말은 흔하지만, 막상 그 앞에 서면 그건 위치 설명이 아니라 감각의 상태가 된다. 파도는 큰 소리로 위협하지도 않고, 햇살은 과장되지도 않았다. 그냥… “여기선 급할 이유가 없다”라고 반복해서 말해주는 빛이었다.


서원이는 그 말을 가장 빨리 알아들었다. 해변에 발을 디디자마자,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를 맡은 사람처럼 모래를 만지기 시작했다. 손으로 퍼내고 다지고, 모래를 한 무더기로 쌓고, 다시 무너뜨리고 - 그 단순한 노동이 이상하게도 성실했다.


나는 속으로 시간을 쟀다. ‘한 30분 하다 지치겠지.’

그런데 30분이 지나도, 1시간이 지나도, 서원이는 멈추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멈추긴 했는데, 그건 “그만”이 아니라 “다음 공정으로 넘어감”이었다. 모래성의 확장 공사, 해자공사, 해자 붕괴 복구공사… 아이의 세계관에는 “완성”이라는 개념이 없고, 대신 끊임없는 시도만 있었다.


결국 3시간.

어른이 보기엔 그저 모래인데, 아이에게는 그게 하루치 우주였다.


서원이는 저녁 먹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는 내 품에 안기자 마자 배터리가 꺼지듯 잠이 들었다.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오고, 손가락에 묻은 모래도 그대로 둔 채로. 그 순간 나는 묘하게 감동했다. 어른은 휴양지에 와서도 마음을 ‘관리’하려고 하는데, 아이는 그냥 완전히 써버리고 잠든다. 그게 진짜 휴식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푸꾸옥이 ‘휴양지’로만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더 큰 자연의 보전 구역 안에 놓여 있다. 푸꾸옥을 포함한 끼엔장 생물권보전지역은 섬과 바다 생태계를 함께 보호하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그러고 보면 서원이의 모래놀이는, 자연을 소비하는 관광이 아니라 자연과 동일한 높이로 놀아본 경험에 가까웠다. 바다는 배경이 아니라, 같이 숨 쉬는 무대였다.


사람은 버스 안에, 동물은 바깥에


다음 날, 우리 가족 셋만의 일정으로 빈펄 사파리를 갔다. 이곳이 주는 묘미는 단순히 동물을 본다는 데 있지 않다. 핵심은 역전이다. 사람은 버스 안에 있고, 동물은 바깥에 있다. ‘우리가 안전한 우리에 들어가고, 동물이 풀려난다’는 방식.


버스가 천천히 숲 길로 들어갈 때, 서원이는 창문에 코를 거의 붙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얼룩말을 보면서는 “ 얼룩말 너무 귀여워!” 사슴이 지나가면 “토끼(?) 귀여워!” 코뿔소가 멀리 서 있으면 “우와!”


그러다 어느 순간, 큰 고양잇과 동물이 길을 가로질러 걷는 장면이 보였다. 그때 버스 안 공기는 한 찰나 조용해졌다. 어른은 본능적으로 안전거리를 계산하고, 아이는 본능적으로 가까움을 기뻐한다. 물론 0.5초 만에 조용한 분위기는 반전되면서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우와~ ”

나는 그 순간 생각했다. 자연을 사랑한다는 말은 종종 ‘안전거리에서 바라본다’는 뜻이 되곤 한다. 그런데 이렇게 거리가 줄어들면, 사랑은 좀 더 겸손해진다.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었지.”

그걸 깨닫게 해주는 게 사파리의 교육일지도 모르겠다.


형형색색이 어른을 울릴 때


사파리 일정을 끝내고 우리는 빈 원더스로 넘어갔다. 도중 서원이가 긴 낮잠에 빠져들어 초기 계획대로 놀이공원 구경을 마음껏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피날레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솔직히 처음엔 기대치가 그렇게 높지 않았다. 가족 테마파크 공연은 늘 “아이들이 좋아하겠지” 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니까.


그런데 막상 공연이 시작되자, 내 예상이 단번에 무너졌다.

빛이 터지고, 음악이 밀려오고, 넓은 광장, 호수가 색으로 물결쳤다. ‘형형색색’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정확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불길은 뜨거웠고, 물길은 시원했다.


나는 분명 관광지에 와 있었는데, 마음은 잠깐 “내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인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른이 감동하는 방식이란 종종 그렇다. 무대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 내가 잊고 있던 감각을 다시 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 많은 걸 ‘효율’로만 판단한다. 그런데 공연은 정반대다. 효율이 아니라 낭비로, 생산이 아니라 연출로, 실용이 아니라 환상으로 사람을 회복시킨다.


푸꾸옥은 지금은 빛나는 휴양지지만, 섬의 역사에는 전쟁의 기억도 남아 있다. 예컨대 푸꾸옥 감옥은 베트남 전쟁 범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역사 유적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섬은 ‘아름다운 곳’인 동시에, 평화가 얼마나 값진지를 조용히 알려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배경을 떠올리며 화려한 공연을 보니, 색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사람은 결국, 어둠을 아는 만큼 빛을 진하게 본다.


사파리내부 명소 기린식당, 앵무새들과 울고있는 서원이
빈 원더스 중앙 분수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