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바람 아래, 여름이 시작된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과 그 안락함

by 마음쉘터


"모든 계절은 감정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여름은 뜨겁고, 동시에 서늘하다.
나는 그 사이 어디쯤에 앉아, 바람의 감정을 느낀다."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은
햇빛보다 먼저, 바람으로 다가온다.

낮은 소음과 함께 켜지는 에어컨.
깨끗이 닦인 필터를 통과해 나온 첫 바람은
조금 거칠고, 어딘가 쓸쓸하다.
하지만 이내 실내 전체가 냉기로 물들고,
나는 여름의 문턱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름은 늘 온몸으로 느껴진다.
햇살은 피부를 찌르고, 땀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여름의 중심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늘 에어컨이 있는 실내였다.

바깥은 아득히 뜨겁다.
멀리서 매미 소리가 터지고,
길 위의 공기마저 떨리는 듯 보인다.
그 모든 풍경이 지나치게 선명해서,
나는 조금 물러서고 싶어진다.
조금 더 무뎌지고 싶다.
바로 그때, 서늘한 바람이 내 감정의 표면을 쓸고 간다.

에어컨 앞에 서큘레이터를 켜놓고

소파에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잠시 멈춘다.
날 선 생각, 불쑥 치밀던 짜증,
그리고 견디기 힘들던 내 속의 열기.
마치 감정을 냉각시키는 버튼이 따로 있는 것처럼
서늘한 바람이 나를 조용히 식힌다.

누구에게나 그런 감정의 피난처가 있지 않은가.
어릴 적, 선풍기 앞에서 ‘아아—’ 소리를 내며 놀던 시절처럼.
부채질을 하던 어머니의 손길,
콩국수를 나눠먹던 점심 식탁의 풍경,
젖은 머리카락을 마르기 전에 내달리던 저녁 골목.

그 모든 기억의 중심에는
어쩌면 서늘한 ‘감정의 바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나간 계절을 떠올릴 때
우리는 기온보다도, 그 계절 속의 감정을 먼저 꺼내기 마련이니까.

나는 여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운 계절일수록,
나에게는 냉기 속에서 피어나는
조용한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감정은 때때로 계절을 닮는다.
여름의 감정은 뜨겁기보다 오히려
어딘가 멍하니 식어 있는 쪽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서늘한 바람 아래
그 감정의 결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여름이, 그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