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연의 영혼의 귀로2]
어제는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며 오롯이 하루를 보냈습니다. 감옥생활의 본질이자 자유이지요. 가진 것은 시간밖에 없다는 점에서. 저는 글을 쓸 때 외에는 성경을 읽습니다. 세상과 차단되어 있는 이 생활이 익숙하고 평안합니다.
낮에 친구와 한 시간 정도 신앙상담이라 할 만한 통화를 했고요. 그 친구는 저를 지혜있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궁금한 것을 물어봐 주고 의논해 줍니다. 그렇게 대우를 받으니 없던 지혜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신앙 이야기를 할 때 보험을 하는 사람처럼 상대를 대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보험을 들 때 깨알 같은 약관을 철저히 숙지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충 핵심만 파악한 후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나 들어볼까 하다가 마음을 바꾸는 경우도 있을 거고요.
특히나 생명보험은 그 어떤 보험보다 까다롭게 살피지 않겠습니까. 저는 기독교 신앙이 생명보험과 같다고 여깁니다. 생명을 다루는 직접적 컨텐츠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저는 유능한 보험 아줌마가 되어야 하는 거지요.
모든 약관을 숙지하는 것은 기본일 테고요. 대충 묻든, 완벽히 묻든, 상품에 대해 통째로 설명해 달라고 하든 보험 가입과 관련한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성경 자체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이해시킬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보험 아줌마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을 받아야 겠지요. 저는 그 훈련의 기초를 감옥에 계신 아버지께 6살 때부터 편지를 쓰는 것으로 다진 것 같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만 아버지께 편지 쓰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즐길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버지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으니까요. 제 머리가 나쁜 탓도 있겠지만 집에 계신 일이 없던 아버지 탓이 더 컸을 겁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뛰어다니고, 숨어 다니고, 잡혀 다니느라.
어느 날 밤, 통식빵 한 덩이를 사들고 오신 기억이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전부니까요. 썰지 않아 봉긋한 봉우리가 솟아 있던. 저는 자다 말고 일어나 영문도 모른 채 식빵을 뜯어 먹었더랬지요. 검거를 피하기 위해 아버지는 주로 밤에 다니셨던가 봐요. 지금도 통식빵을 보면 그 밤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무슨 펜팔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버지가 제게 자상한 답장을 하신 것도 아니니(교도소 규격 봉함 편지지 한 장에 가족 모두의 안부를 담아야 했으니) 제 편지는 메아리 없이 일방적이었지만, 좁은 지면에 한 글자라도 더 써넣기 위해 깨알 같은 글자를 한 깨알도 흐트러짐 없이한 아버지의 단정한 필체와 그 성실함에 서슬이 눌려 저는 또 연필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키면 하기 싫은 일을 끝까지 하는 것은 제게는 미덕이자 장점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지나치게 성실하다'는 말을 이따금 듣는데 아마 저의 이런 점을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성실(誠實)' 그 자체가 이미 꽉 찬 의미니, '지나친 성실'이란 밥그릇을 가득 채운 밥 이상의 밥, '고봉밥' 같은 거겠지요. 보기만 해도 신뢰되고 푸근한.
'정직한 사람, 따듯한 사람', 제가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쓰기 싫은 편지를 계속 쓴 결과, 늘어나는 것은 관찰력이요, 표현력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떤 일이 생겼냐면 고등학교 2학년 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또래들은 보지 못하는 것이 제 눈에는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스치는 일상에 관점이 생기고 저만의 독특한 시각이 형성됐습니다. 감각적 앎에서 반성적 앎, 그러니까 심안(心眼)이 열리고 지성(知性)의 그루터기가 마련된 거지요.
저는 그 날을 잊지 못합니다. 고2, 학급 회의 시간에 부지불식간 급우들과는 다른 차원의 발언을 한 후 또래의 울타리를 훌쩍 벗어나던 날을. 팝콘 터지듯, 꽃이 열리듯 '인식의 확장'을 마주하던 그 순간을.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