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의 온도> 시리즈 10 (9)
시간은 언제나 말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흐른다.
어떤 날은 너무 빨리 지나 손끝으로 붙잡을 틈도 없었고,
어떤 날은 느리게 흘러 마음 한구석을 오래도록 적셨다.
젊은 시절의 나는 그 흐름을 따라잡기 바빴다.
시간이 나를 밀어붙이는 듯했고,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 속도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나이듦은 시간을 바라보는 마음의 속도를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젊었을 땐 시간이 나를 끌고 갔다면,
지금의 나는 시간을 조용히 관찰하며 작은 의미를 읽어내는 사람이 되었다.
캐나다에서의 초반 시간들은 늘 보이지 않는 긴장 속에서 흘러갔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었기에, 하루를 살아내는 데 온 마음을 다해야 했다.
말이 입 안에서 굳어 건네지 못한 순간들,
상대의 표정을 먼저 읽고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르던 날들,
이해하지 못한 대화 속에서 그저 미소로 마음을 대신해야 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지나가는 하루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눈에 띄지 않게 쌓인 시간들이 내 안에서 단단한 층을 이루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작은 버팀들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었다.
낯선 땅에서 보내는 시간은 늘 두 겹의 풍경 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한쪽에는 익숙했던 한국의 기억이,
다른 한쪽에는 새로이 펼쳐진 캐나다의 일상이 놓여 있었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저쪽을 바라보고 있던 날들도 있었다.
그런 흔들림 속에서 나는 천천히 나를 다듬어 갔다.
처음엔 낯설고 버거웠던 일상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조금씩 내 일부가 되어 갔다.
이 땅에서의 매일은 나를 시험하기보다,
조금씩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는 시간이었다.
어떤 날은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고,
어떤 날은 너무 빨리 지나갔다.
하지만 그 모든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붙잡아주는 힘이 되었다.
문득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본다.
사진 속 젊은 나는 서툴지만 희망과 용기로 가득 차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해줄까.”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두려워도 괜찮아.
너는 결국 너의 길을 걸어가게 될 거야.”
사진 속의 나는 아직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민의 고단함도, 낯선 땅에서의 외로움도,
중년의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될 용기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얼굴.
그러나 그 얼굴 속에는 지금의 나로 이어지는 길이 이미 조용히 놓여 있었다.
그 길은 때로 험했고, 때로는 고요했지만
결국 나를 지금의 자리로 데려왔다.
말없이 흘러간 시간은 종종 나를 돌아보게 한다.
이민자로서 낯선 땅에서 버텨온 기억,
아이들이 자라온 시간, 친구들과 나눈 소소한 순간들,
그리고 엄마로서, 아내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혼자 보낸 수많은 밤들.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붙잡아 주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었다.
어떤 밤은 부엌 불을 끄고 식탁에 잠시 앉아 숨을 고르던 순간이 떠오른다.
아이들이 잠든 뒤의 집 안은 고요했고, 창밖에는 토론토의 밤공기가 유리창을 스치고 있었다.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하루를 천천히 돌아보곤 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오늘도 잘 버텼다.”
아무도 보지 못한 그 순간들이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삶은 거창한 사건보다 작은 밤들의 반복 속에서 조금씩 깊어졌다.
시간의 기억 속에서 나는 배운다.
빠르게 지나간 날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내 안에 남아 삶의 온도를 조금씩 데워주고 있다는 것을.
아마 그것이
나이듦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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