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은 신발로 변신한다.
주역 제10괘, 天澤履천택리
나는 작은 신발로 변신한다
천택리는 위로는 하늘(天)이 있고 아래는 연못이나 호수(澤)가 있는 형상이다.
이때의 ‘호수’는 마음을 상징한다.
잔잔한 호수 위에 별빛이 고요히 비치는 모습을 ‘海印定해인정’이라 한다.
해인정은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로, 청정한 마음의 수면 위에 만물의 진상이 그대로 비추는 상태를 뜻한다.
마치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호수에 별들이 또렷하게 비치듯, 잡념이 사라진 마음 위로 ‘진리의 형상’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왕양명은 말한다.
“心卽理也 天理流行 豈外心哉(심즉리야 천리유행 기외심재)”
마음이 곧 이치이다. 하늘의 이치가 흐른다 해도, 어찌 마음 바깥에서 일어나겠는가? 곧, 하늘의 도리와 인간의 마음은 하나이다. 이 만남에서 비롯되는 기쁨, 평화, 감동이 곧 불교가 말하는 “法悅법열”이다.
바울도 이렇게 말하였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공자 또한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라 하였고,
왕양명은 이를 받아
“學是樂학시락, 樂是學락시학”이라 정리했다. 진정한 배움은 내면의 기쁨이며, 감동 없는 앎은 배움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쇼츠 영상이나 게임에서 짧은 쾌락을 찾지만, 그 감각적 자극은 곧 사라지는 ‘순간의 연기’ 일뿐이다. 반면, 독서나 사유를 통해 고전과 경전을 접하며 깊이 있는 통찰을 얻는 순간, 우리는 ‘존재가 진동하는 충족감’을 경험한다. 이 감동은 일시적 자극이 아니라, 삶을 뿌리째 흔들며 성찰로 이끄는 힘이다.
‘履리’는 ‘밟는다’, ‘신발’, ‘행실’을 뜻한다.
천택리 괘는 작은 陰음이 다섯 개의 陽양을 따르는 형상이다.
즉, 작고 부드러운 것이 큰 흐름 속에 조화롭게 따를 때, 오히려 큰 질서가 이루어진다.
신발은 몸에서 작은 부분이지만 우리를 어디든 데려다주는 도구이다.
험한 산길도, 먼 여정도, 신발 하나로 감당할 수 있다.
확장하면 그것은 자동차, 배, 비행기가 되어 지구 반대편까지 이르게 한다.
『벽암록』 제19칙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조주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 침묵의 행위는 선의 언어다.
“너희가 짓밟고 다니는 신발이 곧 부처다. 나는 그 부처를 머리에 이고 간다.”
가장 낮고 천한 것 속에 참된 진리가 있고,
그 낮음이 바로 부처라는 깨우침을 전한 것이다.
‘澤택’은 작은 호수, 곧 마음을 상징한다.
우리 안의 마음은 작고 보이지 않지만, 그 깊이는 바다처럼 심연이다. 그 심연은 하늘과 닿아 있으며, 그 마음 안에 하늘의 진리가 담긴다. 작은 이슬방울 안에 온 달이 담기듯, 작은 마음 안에 하나님의 뜻이 깃든다.
김흥호 선생에 따르면, 주자는 이 괘를 ‘禮예’로 해석했다. 여기서 예는 단순한 형식이나 절차가 아니라, 조화와 질서가 살아 숨 쉬는 상태, 본래의 자리를 회복한 상태이다.
예로 돌아가는 것이 곧 “仁인”이고,
인은 사랑의 공동체이므로, 이는 플라톤이 말한 ‘이상국가’의 방향과 맞닿아 있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idea)”의 세계는,
감각으로 인식되는 현상 너머의 영원하고 완전한 실재의 영역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그림자에 불과하며,
진정한 앎은 그 ‘원형’을 인식할 때 가능하다고 그는 보았다.
공자 역시 말했다.
“克己復禮爲仁。一日克己復禮,天下歸仁焉”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하루라도 그렇게 한다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올 것이다.”
곧, 자기 안의 혼란과 욕심을 이겨내고 본래의 질서로 돌아가는 자, 그가 바로 세상을 인으로 이끄는 “天下貴人천하귀인”이다.
천택리는 세 가지를 가르친다.
心卽理심즉리 — 마음이 곧 하늘의 이치라는 것.
실천 — 하늘의 도는 말이 아닌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
믿음 — 진리를 향한 믿음이 곧 길이 되며, 신발처럼 우리를 어디로든 이끈다는 것.
하늘의 도는 멀리 있지 않다.
별이 호수에 비치듯, 진리는 언제나 우리 마음 안에 있다. 나는 오늘, 작은 신발이 되어 그 길을 걷는다.
卦辭 괘사
履虎尾 不咥人 吉
리호미 불끽인 길
“호랑이의 꼬리를 밟았는데도 사람을 물지 않았다.”
이 괘가 전하는 것은 단순한 행운이 아니다.
그것은 적대가 사라지고 두려움이 무너진 이상세계의 상징적 모습이다.
마치 손주가 할아버지의 수염을 잡아당겨도, 할아버지는 화를 내기는커녕 웃으며 함께 놀아주는 것처럼.
나라의 임금과 백성이 이처럼 너그럽고 따뜻한 관계를 맺는다면, 그 나라는 분명 행복한 나라일 것이다. 두려움이 아닌 신뢰로 맺어진 권력과 백성의 관계, 그 자체가 이상세계의 초상이다.
니체는 인간 정신의 성숙을
‘낙타 – 사자 – 어린아이’로 상징하였다.
그중 어린아이는 과거의 도덕과 권위,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순수한 존재이다. 백지 위에 삶의 새로운 의미를 그려내는 존재,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정신이다.
성경도 이상세계를 깊은 이미지로 표현한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리라.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 새끼들이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굴에서 장난하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이사야 11:6–8)
맹수와 어린 동물이 어울려 지내고,
심지어 독사 곁에서 아이가 장난치는 이 장면은, 모든 적대와 공포가 사라진 조화의 세계를 상징한다. 강자가 약자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상세계이다.
실제로도 그런 조화는 우리 곁에 있다.
본성상 적대적인 진돗개와 고양이가 한집에서 등을 맞대고 자고 있는 모습처럼. 서로 다른 존재가 다름을 인정한 채 함께 머무는 공간, 그 자체가 조화다.
반대로, 일제 식민지 시대처럼
“아이가 울면 순사가 잡아간다”는 말이 일상적인 사회는, 공포와 억압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이다. 경찰이 보호자가 아니라 위협의 상징이 되고, 권력이 돌봄이 아닌 통제의 수단이 되는 세계. 그곳엔 이상도, 인간다움도 없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부모는 자녀보다 힘 있는 존재지만,
그 힘은 위협이 아닌 사랑과 온기를 주는 힘이어야 한다. 자녀가 실수를 했을 때 먼저 꾸짖기보다, 안아주고 괜찮은지 묻고, 그다음에 바른 길을 일러주는 것. 그것이 참된 권위이며, 사랑의 방식이다.
결국 ‘호랑이와 어린아이’의 관계는 단순한 우화를 넘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의 이상적 질서와 존재의 방식에 대한 상징이다.
맹수가 약자를 해치지 않고 지켜주는 세계,
권력이 두려움이 아닌 돌봄과 포용의 근원이 되는 세계.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공자와 니체, 그리고 주역이 가리키는 삶의 이상이다.
그러나 그 세계는 먼 곳에 있지 않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품는 따뜻한 마음,
사회에서 힘 있는 이가 연약한 이를 배려하는 마음, 그 모든 작고 진실된 태도들이 모여 이 땅에 이상세계를 시작하게 한다.
우리 각자가 ‘호랑이’ 일 때를 기억하자.
어린아이의 실수를 물지 않고, 그 실수마저 감싸 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이상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彖傳 단전
履 柔履剛也
說而應乎乾 是以履虎尾 不咥人 亨
履而順 以敬言也 剛中正 履帝位而不疚 光明也。
履리 柔履剛也유리강야
부드러움이 강함을 밟는다.
『주역』의 리괘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밟는 형상이다.
柔履剛유리강 — 이는 마치 백성이 권력을 발아래 두고 있다는 상징처럼 읽힌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의 정신과도 통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권력은 위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임되는 것이다.
이 원칙은 루소의 사회계약론, 미국 독립선언서, 프랑스 인권선언 등 시민혁명의 뿌리에서 비롯되었다.
국민이라는 ‘부드러움’이 권력이라는 ‘강함’을 통제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이다.
說而應乎乾설이응호건
말을 따뜻하게 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늘에 응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국민은 좀처럼 정치 지도자를 기쁘게 따르지 못한다.
정치는 국민의 삶을 돌보기보다, 권력을 향한 게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야는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국민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만, 결국 터지는 건 국민의 등뿐이다.
是以履虎尾시이리호미 不咥人부끽인 亨형
그래서 주역은 말한다.
“호랑이의 꼬리를 밟아도 물지 않으니, 형통하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한 할머니가 실수로 주차된 고급 외제차를 긁고는 차주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차주는 손상된 차를 보고도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는 수리비도 받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연세도 있으신 분이 너무 죄송해하시더군요.”
이 사연은 SNS를 통해 퍼졌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진짜 멋진 사람이다.” “이 시대에 보기 드문 품격이다.”
그는 강자였지만, 물지 않았다.
진짜 강함은 약함을 이해하고 감싸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어떤가. 조금만 틈이 생기면 보험사기를 치고, 보이스피싱이 성행하며, 고소·고발이 일상화된다. 이익을 위해 인의예지를 저버린다면, 그 사회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옥이 된다.
剛中正강중정
강하지만 중심을 잃지 않고, 바르며 공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윤석열은 공정과 상식,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대통령이 되었지만, 불과 3년도 되지 않아 파면되었다. 그는 인의예지를 말했으나, 실제로는 그것을 통째로 훔쳐간 도적이었다.
큰 도적은 금품을 훔치는 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도덕과 정의를 도둑질하는 자다.
야당 또한 국민을 위한 대안 제시보다는
이재명 살리기 정쟁에 몰두하면서, 위기를 자초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정치가 감정의 싸움이 아니라 책임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야 모두 성찰이 필요하다.
履帝位而不疚리제위이불구 光明也광명야
왕위에 올라서도 병들지 않으면, 세상은 밝아진다.
疚는 ‘병들다’는 뜻이다.
대통령은 단지 정치를 하는 자가 아니라,
국가의 건강을 책임지는 존재다.
새롭게 대통령이 될 자는 권력을 하사품처럼 나누지 않아야 한다.
충성파를 중심으로 인사를 단행하고, 권력을 나눠 먹는 방식으로 국정을 이끈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진짜 지도자는 과거를 반성하고, 관용을 베풀며, 비리를 도려내고, 정의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자신도 되돌아보자.
눈앞의 이익 때문에 정도를 버린 적은 없었는가? “나 하나쯤이야” 하는 마음이 모여,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한다.
깨어 있는 시민, 정도를 지키는 개인.
그들 중 누군가는 언젠가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호랑이의 꼬리를 밟아도 물지 않는 자,”
즉, 강하지만 온유한 지도자일 것이다.
진정한 강함은 온유함에서 비롯된다.
공정과 상식이 살아 숨 쉬고, 권력이 국민을 해치지 않는 나라. 그런 광명의 세상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여기.
우리 모두의 깨어 있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각자(各) 자신의 성품과 천명을 바로 세우는 것, 그것이 곧 공정과 상식이 숨 쉬는 나라의 첫걸음이다(各正性命각정성명).
우리가 그 시작이 되어야 한다.
상전 (象傳)
上天下澤 履 君子以 辨上下 定民志
상천하택 리, 군자이 변상하 정민지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연못’이 있는 형상이 곧 ‘履리’이다.
밤하늘의 별들이 고요한 연못에 그대로 비치는 모습처럼, 위의 질서가 아래에 온전히 반영되는 세계이다.
‘코스모스(Cosmos)’는 질서 있고 조화로운 우주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이성과 질서가 살아 있는 조화로운 세계를 의미하며, 혼돈(카오스)의 반대 개념이다.
군자는 이러한 리괘의 형상을 본받아 혼란한 세상이 아니라 질서와 조화가 살아 있는 ‘코스모스의 세계’를 실현해야 한다.
辨上下변상하, 定民志정민지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분별하고, 백성의 뜻을 정한다.”
지위와 역할은 명확해야 하며, 제 자리에 맞는 인물이 그 자리를 맡아야 한다. 그래야 백성의 뜻이 흔들리지 않고 나라의 중심이 바로 설 수 있다. 정치란, 이러한 위계와 질서를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권력이 자신의 사적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될 때, 질서는 무너지고 백성의 뜻도 흩어진다.
1979년 12월 12일, 하나회 중심의 군 사조직이 일으킨 ‘12·12 군사 쿠데타’는 그 대표적 사례였다.
그리고 46년 뒤인 2025년, 대통령과 학연이 있는 충남고 출신들이 군 주요 보직에 발탁되며, 다시 사 조직화된 군대가 계엄을 선포하였으나, 민주화된 시민의식과 제도 앞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결국 ‘辨上下, 定民志’의 원칙을 외면한 결과였다.
권력을 공공의 질서가 아닌 사적 인연에 따라 행사한 것이며, 그로 인해 국정의 중심은 흔들렸고, 국민의 뜻은 외면당했다.
인사권을 남용한 것은 대한민국의 발전에 대단한 저해를 가져왔다.
『定民志정민지』 김흥호는 주석을 보면 “농공상고 일지우부치 소향유한(農工商賈 日志于富侈 小享有限)”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이는 모든 백성이 저마다 재벌이 되겠다고 하고, 저마다 사치하려고 한다면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없다는 뜻이다.
‘小享有限소향유한’—작은 것에서 여유를 구하라는 말처럼, 유한한 것 안에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즉,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자연인으로 살아간다 해도, 자연 안에는 다시 들여다볼수록 무한한 행복이 숨어 있다.
‘安貧樂道안빈낙도’—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도(道)를 즐긴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더라도 마음은 평안하고, 올바른 삶의 길을 따르며 기쁨을 얻는 것. 내가 가진 것 안에서 행복은 충분히 찾아진다.
‘辨上下, 定民志’의 의미는 분명하다.
국민은 오직 돈을 많이 벌고 사치하려는 데만 마음을 쏟아서는 안 되며,
관리들 또한 더 높은 자리를 탐내며 남을 짓밟는 데만 몰두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실력과 자리를 알고,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것. 이 단순해 보이는 원칙을 지키는 것만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공동체를 바르게 이끄는 길이다.
爻辭효사
初九초구
素履 往 無咎
素履往소리왕
자기 소질에 따라 걸어간다.
자신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길을 가야 한다. 물론 유망한 직업이나 트렌드를 고려해 진로를 택할 수도 있지만, 결국 자신의 본성과 맞지 않으면 불행해질 수 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소질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성공의 가능성도 커진다.
단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라고 해서 무작정 선택했다가, 인생 전체가 불행해질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象曰상왈 素履之往, 独行願也 소리지왕, 독행원야
자기 소질을 살려 그 길을 걸어가는 것, 남들이 가지 않더라도 홀로 자신만의 길을 걷는 것, 그것이 나의 진정한 바람이다.
조수미는 타고난 음악적 소질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세계적인 소프라노로 자리매김하였다. 어릴 적부터 남다른 음감을 보였고, 그 소질을 발견한 이들이 집중적으로 지도하며 잠재력을 키웠다. 그녀는 한국적인 정서와 서구 오페라의 기법을 조화롭게 소화하며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았고, 이는 자기 소질에 맞는 길을 묵묵히 걸어간 결과라 할 수 있다.
자기 소질을 따르는 길은 때로 외롭지만, 끝내 큰 성공으로 이어진다.
六二육이
履道坦坦 幽人貞吉
履道坦坦리도탄탄
‘履리’는 신발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실천’을 상징한다. 신발 하나를 가진다는 것은, 믿음을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도의 길을 실천해야 탄탄해진다. 이른바 ‘탄탄대로’란, 앞길이 넓고 평탄하여 장애물이 없는 형세를 의미한다.
즉,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신발 하나만 있어도 어디든 갈 수 있듯이, 믿음 하나만 있어도 인생을 헤쳐 나갈 수 있다.
“너희가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 마태복음 17장 20절
믿음이 겨자씨만큼 작아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한다. 상징적 표현이지만, 작은 믿음이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무턱대고 무엇이든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소질에 따라 목표를 세우고, 그 길을 향해 믿음을 가지고 걸어가야 한다.
幽人貞吉유인정길
‘幽人유인’은 세상의 소란에 물들지 않고 조용히 은거하며 살아가는 사람, 곧 隱者은자를 말한다.
그는 외부의 혼란과 유혹 속에서도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기에 貞吉정길, 바르고 길하다.
象曰 中不自亂也 상왈 중부자란야
“중심을 지켜 스스로 어지럽히지 않는다.”
어떤 외부의 자극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평정이야말로 진정한 안정이다.
욕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속에 번뇌가 없고, 그 중심은 흔들림이 없다.
老子노자의 사상은 ‘無爲自然무위자연’을 이상으로 삼는다. 억지로 하지 않고, 道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자연은 목적을 세우지 않아도 그 자체로 펼쳐지며, 진정한 힘은 부드러움에서 나온다.
자기를 낮추고 다투지 않는 사람, 그가 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며, 그런 이가 오히려 세상을 이끄는 것이다.
六三(육삼)
眇能視 跛能履 履虎尾 咥人 凶 武人爲于大君
풍천소축의 괘에서 다섯 효가 모두 陽양으로 밝고 안정적인 가운데, 유독 육삼은 陰음으로 나타난다. 전체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지만, 육삼 하나가 어그러진 모양이다. 신발 하나 없으면 길을 가지 못하듯, 그 작은 결함이 전체를 위태롭게 한다.
그러나 반대로, 신발 하나만으로도 험난한 길을 무사히 걷게 해 줄 수 있듯, 작지만 핵심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眇能視 跛能履 묘능시 파능리
애꾸눈이 제대로 볼 수 있으며,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을 수 있겠는가.
보는 능력도, 걷는 실천력도 부족한 자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履虎尾 咥人 凶 리호미 절인 흉
호랑이의 꼬리를 밟는 격이니, 결국 물려 해를 입게 된다.
그가 백성을 해치는 것은 능력 없음과 동시에,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올랐기 때문이다.
武人爲于大君무인위우대군
무인이 대군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충성을 가장한 폭력의 정당화다.
즉, 무인이 왕이 되어 정치를 한다면 그것은 쿠데타이며, 권력의 탈취다.
象曰 眇能視 不足以有明也 跛能履 不足以有行也
상왈 묘능시 부족이유명야, 파능리 부족이유행야
애꾸눈은 밝음을 갖기 부족하고, 절름발이는 실천할 능력이 부족하다.
즉, 안목이 없고 실천할 능력도 없는 자가 높은 자리에 있으면 결국 흉하게 된다.
실제로도 그러하다. 예컨대,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세계를 상대로 관세 전쟁을 벌이며 자국 중심의 경제 정책을 밀어붙였다.
결과는 증시 폭락, 경제 불안, 사회적 분열이었다. 한국도 그 여파를 피하지 못했고, 동시에 대통령 파면이라는 정치적 공백 속에 국민은 더욱 불안에 빠져야 했다.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민을 대할 때 수평적인 자세와 진정성을 갖추었던 인물이다. 퇴임 후 봉하마을로 돌아가 시민들과 막걸리를 나누고 자전거를 타며, 권위를 벗은 시민으로서 살았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그의 슬로건처럼, 권력이 아닌 인간에 주목했고, 실질적 복지를 통해 서민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다.
형식보다 진심을, 권위보다 인간의 가치를 중시한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당이 아니다. 보수나 진보라는 이념도 아니다.
‘누가 그 자리에 합당한 사람인가’, 그가 해안을 갖추고 실력과 도덕성을 지닌 사람인가가 중요하다.
정의와 공정, 상식의 정치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 서야 한다.
象曰 咥人之凶 位不當也 武人爲于大君 志剛也 상왈 절인지흉 위부당야 무인위우대군 지강야
백성을 해치는 흉함은 자리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인이 대군을 대신한다는 것은, 뜻은 강하나 정당하지 못한 권력의 상징이다.
이러한 육삼의 효상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례와도 부합한다.
그는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무력 진압으로 정권을 장악하였고,
언론 통폐합과 정치 탄압, 비자금 조성 등으로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대법원이 선고한 추징금 2,205억 원을 두고도 “내 전 재산은 29만 원”이라며 국민을 기만하였다. 그의 폭정과 부패는 현대 한국 정치사의 가장 큰 상처로 남아 있다.
六四육사
履虎尾 愬愬 終吉
리호미 소소 종길
호랑이 꼬리를 밟는 위태로운 상황일지라도, 백성들이 끊임없이 호소하고 또 호소할 수 있다면, 마침내는 길하게 끝날 수 있다는 뜻이다.
愬愬소소는 아랫사람, 즉 백성이 억울함을 위로 반복하여 호소하는 것이다.
‘嗇嗇색색’은 윗사람이 백성들의 목소리를 두려워하는 모습이라면,
‘愬愬소소’는 백성이 위정자에게 꾸짖고 바르게 하도록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신문고 제도나 국민 고충 처리 창구처럼, 국민이 억울함을 직접 권력자에게 알리고 바로잡을 수 있는 통로를 말한다.
이러한 정신은 國民召喚制度국민소환제도 에서도 드러난다.
’ 국민소환제도‘란 국민이 선출한 공직자가 국민의 뜻을 저버렸을 때, 국민이 투표를 통해 그를 임기 중에 해임할 수 있는 제도이다. 즉, “국민이 뽑은 사람을 국민이 다시 물러나게 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현재 한국은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에 대해서만 이 제도가 적용되지만, 이를 더 넓히고 강화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는 위정자들이 바른 마음으로 정치에 임하게 만들 수 있는 기준이자 방향이 된다.
象曰 愬愬終吉 志行也
상왈 소소종길 지행야
상전에서는 “백성이 거듭 호소하니 마침내 길하고, 이는 그 뜻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즉, 국민이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 뜻이 정치에 반영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길함이며 정의의 실현인 것이다.
선출된 공무원들이 격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 제도는 계속 발전하고 보완하며 만들어가야 ‘終吉종길, 이다. 모든 국민들이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상하가 노력해서 가야 ‘志行也지행야’이다.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九五구오
夬履 貞 厲 쾌리 정려
불의나 모순을 과감히 끊어내는 ‘결단’이 바로 “夬쾌”이다.
夬는 단호한 결단, 곧 잘라낸다는 의미를 지니며, 특히 목을 치는 듯한 단호함을 내포하고 있다. 아무리 제도가 훌륭하다 하더라도, 악한 무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 모순과 불의를 그대로 둔 채 법과 제도만을 정비한다고 해서 사회의 근본이 바르게 유지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夬履는 정의로운 결단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을 뜻한다.
이 결단은 貞 厲 정 려, 곧 바르되 위태로울 수 있음을 내포한다. 정의로운 결단이라도 실천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위기와 긴장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강태공은 무도한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 건국을 이끈 혁신가였다.
그는 무왕을 도와 하늘의 뜻에 따라 덕치를 기반으로 한 민본의 새 질서를 세웠으며, 갈고리 없는 낚시로 하늘의 때를 기다린 40년의 인내는 바로 그런 시대를 여는 준비였다. 강태공의 혁신은 권력보다 가치, 계산보다 신념을 중시하는 리더십의 상징이다.
그는 주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어 악한 무리들을 단호히 다스렸고, 그 단호함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왕에게 항의하였다. 이에 왕이 속도를 늦춰달라고 하자, 강태공은 자리에서 물러나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7년 동안 去惡거악을 제거하였다면 주나라는 천 년을 갔을 것이다. 하지만 3년 반 만에 멈추니 주나라는 오백 년을 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일화는 곧 다음의 주역 구절로 요약된다.
象曰 夬履之厲 位正當也
‘쾌하게 밟아 나가는 데 위험이 따르나, 그 자리가 정당하기 때문이다.’
즉, 결단이 위태로워 보일지라도, 악을 제거하여 사회를 바르게 세우는 일은 마땅히 그 자리에 선 사람이 해야 할 정의로운 책임이라는 뜻이다. 악의 세력이 단결하여 저항할 때, 그들의 위세에 눌려 물러서지 말고, 발본색원하여 뿌리째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그 결단이 지닌 정당성과 그 지위의 합당함이 살아난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
친일청산은 단순한 과거사 정리를 넘어, 정의로운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회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제이다.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그 결과 친일 세력은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뿌리내리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이 과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이는 대한민국이 정의로운 나라로 나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따라서 夬履쾌리 貞정 厲려, 결단이 바르더라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이 주역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사명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이제는 단호한 정의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상육 (上六)
視履 考祥其旋 元吉
視履시리, 실천하는 것을 보아서
考祥고상, 상 줄것을 고려해 본다는 뜻이다.
좋은 일 한 사람은 복을 주고 나쁜 일 하는 사람들은 제거해 버리는 대심판이다.
성경에도 최후의 대심판이라는 것이 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인자는 모든 민족을 심판할 때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둔다. 오른편의 자들에겐 “복 받을 자들이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라고 하시고, 왼편의 자들에겐 “저주받은 자 들아,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라고 하신다. 이는 의인은 영생으로, 악인은 영벌로 나뉘는 최후의 심판을 뜻하는 것이다.
其旋 元吉, 기선으로 돌아가게 해서 원길이다. 상벌을 줌으로 바르게 돌아가게 하여 이상세계의 행복이 되는 것이다.
象曰상왈 元吉在上 大有慶也
원길재상 대유경야 최고의 행복은 이상세계에 올라와 다하게 기뻐하는 것이다.
天澤履천택리는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작은 신발 하나를 가지는 것’이다.
신발 하나만 있어도 험한 세상 어디든 헤쳐 나갈 수 있다. 신발 하나를 가진다는 것은 곧 ‘믿음 하나를 가진다’는 뜻이다. 믿음 하나만 있어도 없던 용기가 솟고, 두려움은 사라진다.
하늘에 가득한 별들이 조화와 질서를 이루듯, 나의 마음 또한 도덕률로 정돈되어야 한다. 탐욕과 욕심의 혼돈을 벗고, 고요한 호수 위에 비친 별빛처럼 내 삶 또한 조화롭고 맑은 도덕의 실천으로 빛나야 한다.
육삼의 호랑이처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4)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길,
그것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진리와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 길 위에 선 사람들로 인해
반드시, 더 나은 세상은 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