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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서스 Nov 01. 2024

등산왕 마속, 증자왕 ㅇㅇㅇ(고려아연 사태에 한마디)

꼼수는 묘수가 아닙니다

(앞에 쓴 '고려아연이 유상증자를 한다고? 제정신이야?' 라는 제목의 글과 일부 이어집니다.)


1. 등산왕 마속


우선 삼국지 얘기로 시작하겠습니다. 많이들 아시는 얘기지만 그래도 가끔 다시 읽어보면 또 재밌기도 하죠.


제갈량이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지고 북벌을 감행했을 때. 초반에 꽤 크게 승리하고 한참 분위기 좋을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 '하후무'가 영혼까지 털려 도망치고 위나라 북서지역 방어사령관이던 '조진'이 허덕거릴 때였을 겁니다.


위나라 황제 조비는 '사마의'를 긴급 투입합니다. 맹달의 배신을 진압할 때 쾌속진군을 선보였던 사마의는 이번에도 병사들을 닥달하며 빠르게 진격해 옵니다.


제갈량은 그때까지 가장 신뢰하고 있던 영민한 장수 '마속'에게 군대를 주어 사마의를 막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엄중한 명령을 내리죠.


"절대 사마의의 군세와 싸우려 하지 말고 오로지 길을 막기만 해라. 그것만 해도 충분하다."


제갈량의 명령은 아주 단순하고 명확했습니다. 정면대결을 피하고 오로지 길만 지키면 되는 '참 쉽죠?'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속은... 이 '참 쉽죠' 명령을 매우 어렵게 꼬아 버립니다. 길만 막으라고 했는데 길을 안 막고 옆에 있는 산으로 올라가 버린 거죠.


마속의 부장(副將)으로 따라온 '왕평'이 마속의 결정에 태클을 겁니다. 제갈승상이 오로지 길만 막으면 된다고 하는데 왜 산으로 올라가려 하냐고 따집니다.


천재로 소문났었던 마속이 거만하게 대답하죠.


"병법에 따르면 군대를 높은 곳에 배치해 태산처럼 밀고 내려가라 했다. 나는 저 산에 병력을 배치해 뒀다가 사마의의 군세를 격멸할 것이다."


왕평은 크게 당황합니다. 아니 C발 제갈승상께서 길만 막으면 된다고 했는데 갑자기 군세를 격멸하다니 이게 무슨 캐오버 삽질이냐고 항의합니다.


하지만 천재자뻑병에 걸려 있던 마속은 왕평의 말을 무시합니다. 어릴 때부터 영민하다고 소문났고 촉나라를 짊어질 차세대 인재로 주목받았던 남자는 '길만 막으면 된다'는 걸로 만족할 수 없다는 듯 공적에 욕심을 냈습니다. 그리고 '등산왕'으로 등극해 병사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 버립니다.


결과는...


백전노장 사마의는 산에 틀어박힌 촉 군대를 보고서는 중턱에 있는 샘물을 점거해 버립니다. 산으로 올라간 마속의 군대는 물을 못 먹게 되죠. 물이 없으니 당연히 밥도 못 짓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먹고 마시는 걸 못 하면 힘을 못 씁니다. 마속 휘하 병사들은 하루만에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마속이 급히 군대를 몰아 태산처럼 밀고 내려오지만... 이미 하룻동안 물을 못 먹고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은 마속의 생각대로 싸워 주지 못합니다. 사마의 측 병사들이 그저 샘물 주위를 지키고 있을 뿐인데도 그걸 무너뜨리지 못하고 계속 깨집니다.


마속은 끝났구나. 가망이 없다.


등산왕 마속은 처철하게 패배해 빤쓰런 하고, 일부 병력과 함께 길을 막고 있던 왕평 또한 어쩔 수 없이 퇴각해 버립니다. 사마의는 손쉽게 승리를 거두고 조진을 구원해 냅니다.



마속의 등산 쇼는 묘수가 아니라 '뻘짓'이었습니다. 촉나라 군대 전체를 지켜내는 중대한 임무를 맡았는데 본인 공적 세우는 데에 눈이 멀어 무리하게 등산했다가 아주 그냥 나라 전체의 군대를 말아먹는 개뻘짓을 저질렀습니다.


이러면 죽여야죠.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칩니다.


1800년이 지난 지금도 동아시아 권에서 유명한 사자성어 읍참마속(泣斬馬謖)이 완성되었습니다. 마속은 '나대나대 설치다가 일 말아먹는 헛똑똑이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죠. 마속 개인적으로는 많이 안타까울 것이고 명예회복의 기회를 얻고 싶겠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이미 죽었는데.



그리고 2024년 10월.


등산왕 마속과 맞먹는 희대의 뻘짓이 '쩐의 전쟁'에 등장했습니다. 누가 낸 작전인지 개인을 특정할 수는 없어 ㅇㅇㅇ으로만 처리합니다만 '증자왕'이 등장했죠.


제목에 쓴 대로 고려아연 증자 건입니다. 마속 급 헛똑똑이가 낸 '증자왕 작전'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2. 증자왕 ㅇㅇㅇ


기업사냥꾼 사모펀드의 간악한 공격에 맞서 국민기업을 지키고 국가기반기술의 해외유출을 방지하겠다는 거대한 사명(!)을 앞세워 명분싸움을 전개하던 A회사.


회사의 여유 현금을 탈탈 털고 외부에서 큰 빚까지 져 가면서 자사주를 취득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기존에 우호적이었던 다른 재벌들의 지분과 국민연금 지분까지 끌어들이면 경영권 방어에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래도 드러난 지분만 놓고 보면 기업사냥꾼에게 경영권을 빼앗길 것 같았습니다.


이에 A회사는 극약처방을 실행합니다. '대규모 유상증자로 모두의 지분가치를 떨어뜨리고 그렇게 모은 자본금으로 빚 갚겠다!'라는 전략을 아주 당당하게 실행합니다. '이 전략은 국내 최고 최대의 로펌을 거쳐 적법하다고 판단되었습니다.'라는 추가 멘트는 보너스.


결과는... 금감원 개입.


뭐 A회사 이런 거 빼고 얘기합시다. 고려아연의 기존 오너는 거하게 삽질을 했습니다. 아주 그냥 삽으로 자기 발 밑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었습니다. 구덩이에 직접 뛰어들 상황을 자기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마속의 뻘짓에 맞먹죠. 길만 지키면 될 것을 굳이 공적에 욕심 내어 산으로 올라갔다가 불과 며칠 만에 '물길을 끊어 물을 못 먹게 한다!'는 작전에 훅 무너진 것과 맞먹는 수준입니다.


고려아연 기존 오너 측은 '기업거버넌스 강화'라는 최신 트렌드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거나 / 이를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대한민국 주식시장이 장기적인 저평가에 시달리고 금투세 때문에 그 저평가 논란이 더 커졌으며 최근 금융감독원이 거버넌스 문제에 매우 신경쓰고 있다는 걸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유상증자라는 게 기본적으로 기존 주주들을 엿먹이는 행동이라는 것조차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주식시장 주린이들도 다 아는 상식인데 그걸 가뿐히 씹어먹고 '우리는 국민기업 만들 거예요 웅앵웅'만 반복했습니다.


제 아무리 국민기업이라도 그 회사에서 상대해야 하는 국민은 '주주' 뿐입니다. 주주들의 돈을 날려먹고 주주들의 지분가치를 희석시키면서 '국민기업입니다 빼애애액!'을 시전하면 그 주주들이 허허허 웃어 줄 것 같습니까?


꼼수는 묘수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금방 뽀록나고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기 등을 찍어 버리죠. '자충수'가 됩니다.



책 외우는 데에는 천재였던 마속은 '병사들에게 지속적으로 물과 식량을 보급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걸 놓친 채 등산왕이 되었고, 그 기본을 놓친 대가로 촉나라 주력군 전체를 말아먹을 뻔 했으며 결국 자기 목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기존에 오너 마음대로 하는 기업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던 고려아연 오너와 그 휘하 참모진들은 '주식회사는 전체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걸 놓친 채 증자왕이 되었고, 이제 그 대가를 치를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려할 수 있을 때 고려하셨어야죠. 고려 못했으면 고려장 가는 겁니다.


 

3. 참모의 역할


일정 규모 이상의 회사는 모두 경영지원조직이 있고, 이 지원조직을 통해 재무/법무/기획/감사/홍보/전산 등 업무를 합니다. 직접 생산활동을 하는 건 아니지만 생산활동이 잘 되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하죠.


이 지원조직에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사람들은 '오너의 참모'로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너가 곧 회사는 아니지만 상당부분 겹치긴 하죠. 오너를 잘 보좌해서 좋은 방향으로 경영하도록 하는 것이 참모들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이 참모들이 등산왕 마속 급이라면? 혹은 오너 본인이 등산왕 마속 급이라면?


병사들의 물 보급도 신경쓰지 않은 채 등산하다가는 백전노장에게 물길 끊기고 개발살 납니다. 전체 주주들의 이익을 쌩까고 함부로 유상증자하다가는 금감원 검찰에게 크리티컬 치명타 맞고 몇 명 구속됩니다.



이번 증자왕 놀이가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는 모릅니다. 지나가던 개미1이 고려아연의 내부 고려 사정을 알 수는 없죠. 고려할 수 있을 때 고려했는지, 고려 따위 없이 묻지마돌격 모드로 밀어붙였는지는 제가 알 바 아니고 알려고 해도 알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죠. 분명 내부에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참모가 있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있었다면 이 사태를 미리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 최고 최대의 로펌을 거쳤고 금융전문가의 자문까지 받는 과정에서 왜 증자왕 놀이를 막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일은 터졌고 금감원이 개입했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라서는 검찰로 사건이 넘어가겠죠.


나중에 누군가는 기업물 소설에서 이 소재를 써먹을 겁니다. 아마 제가 써먹을 것 같습니다만 다른 분이 쓰셔도 상관없습니다. 이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저작권이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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