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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서스 Nov 19. 2024

처음에는 마냥 좋았었는데

헬로비전 입사 후

[문화를 만듭니다. CJ.]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2011~2013년 정도에 저 멘트가 TV에서 자주 나왔었습니다. 지상파3사 광고에는 잘 안나왔지만 OCN 등등의 영화채널에서는 꽤 자주 나왔었습니다.


당시에 나름 '문화기업'이라 자부하던 CJ 그룹은 매우 공격적으로 사세(社勢)를 확장하고 있었죠. (2012년 말까지는 개인적으로 관심1도 없었지만) 이 때에 온미디어 인수 등등 해서 굵직한 방송분야 M&A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음악 및 영화부문을 합쳐 'CJ E&M'이 탄생했었구요.


또한, 당시 CJ그룹은 국내 1위 육상물류업체인 대한통운 인수전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삼성하고 경쟁 붙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삼성그룹의 종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CJ그룹 측은 삼성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써내고 대한통운을 인수했었습니다. 대한통운은 'CJ대한통운'으로 상호를 바꿨고 (난데없이) CJ지주사에 매출액의 0.5%를 상표사용료로 내야 하는 뜬금포(!)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 'CJ오쇼핑'이 매우 돈을 잘 벌고 있었습니다. 2010년대 초반기가 홈쇼핑의 전성기였고, 오쇼핑은 그 홈쇼핑 중에서도 1위 사업자였죠. GS홈쇼핑 측과 서로 1위라고 주장하는 관계이긴 했습니다만 아무튼 CJ그룹 입장에서는 1위.


거기에 더해 'CGV'도 꽤 주목받고 있었습니다. E&M의 영화사업과 수직계열화를 이루기도 했고, E&M 영화가 없을 때에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을 직배급하면서 상당히 잘 나갔습니다. 이 또한 국내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는 1위였고 베트남/터키(현재는 튀르키예) 등에도 진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고불변의 핵심계열사인 '제일제당'. CJ그룹의 모태인 동시에 자금줄의 원천이고 매년 5000억원 정도는 따박따박 벌어 주는 초특급 우량 회사였습니다. 막강했죠.



2012년 경에는 이렇게 5개 회사(제일제당, 대한통운, 오쇼핑, CGV, E&M)를 CJ그룹 내에서 '메이저'로 분류하고 있었습니다. 각 분야에서 1등을 먹었고 또 매출 규모도 상당히 크다는 의미에서 메이저 계열사로 분류했었죠.


(앞에서는 E&M을 제일 먼저 소개했는데 바로 위의 괄호 안에는 E&M을 제일 뒤로 뺐습니다. 문화기업이라고 홍보할 때에는 전면에 내세우지만 돈 잘 버는 순위에서는 살포시 뒤로 빼는 게 당시 CJ 내부적인 분위기였던 듯 하네요. E&M은 흑자 내는 연도보다 적자로 허덕이는 연도가 훨씬 더 많았고, 제가 있던 2016년까지는 아예 창사 이래 단 한 번도 흑자를 낸 적이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메이저 계열사 얘기를 쭈욱 늘어놓았는데, 2012년 10월에 제가 입사했던 CJ헬로비전은 '마이너(Minor)'였습니다. 순이익 기준으로는 E&M을 '따위'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압도적으로 돈을 잘 벌었지만 매출이 5천억원 수준으로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고, 오쇼핑의 자회사(지주사 입장에서는 손자회사)로 있으면서 그룹 내 발언권도 약한 편이었습니다.


뭐, 다른 마이너 계열사에 비해서는 확실히 좋았습니다. 다른 마이너라고 하면


-  CJ프레시웨이 (식자재유통 및 급식사업),

- CJ푸드빌 (당시 뚜레주르, 투썸플레이스, 빕스, 차이나팩토리 등 오프라인 매장 브랜드 다수 보유),

- CJ네트워크 어쩌고 이름 자주 바뀌는 IT회사 (주로 그룹 내 IT업무를 몰아서 처리하며 오너 일가 지분 비율이 높은 회사),

- CJ올리브영 (2010년대보다는 최근에 더 유명하죠),

- CJ건설 (잠시 아파트도 지어 봤지만 말아먹었고 그룹사 건설 물량 중심으로 운영하는 건설사)


정도가 있었고,


이 중 올리브영이나 네트워크 쪽은 그룹 내에서 특수한 역할(장기적인 승계구도 확립)이 있긴 했지만 2010년대 초반에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푸드빌은 만성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고 프레시웨이도 쥐어짜내는 수준으로 간신히 찔끔 흑자 내는 정도였으며 건설은 문화기업에서 별 발언권이 없었죠.


즉, 제가 다녔던 CJ헬로비전은 [마이너 계열사지만 돈 버는 것만 놓고 보면 메이저 싸대기 날리는 회사]였습니다. 제일제당은 워낙 태생부터 넘사벽이고 대한통운은 CJ그룹에 편입되기 전부터 압도적인 육상운송 1위였으니 따라갈 수 없지만, 적어도 CGV와 오쇼핑 정도는 순이익으로 맞먹어 볼 만 했습니다. E&M은 빛 좋은 개살구였구요.



이런 헬로비전에 입사했을 때... 한동안은 정말 좋았습니다. 출근에 1시간40분 / 퇴근에 2시간 소비하고 매일 저녁 8~9시까지 야근을 해야 해서 집에 도착하면 11시 넘을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행복했었습니다.


일단 이전에 있던 회사가 심하게 박봉이다 보니, 헬로비전으로 옮기면서 직급을 대리로 낮췄는데도 불구하고 연봉이 올라갔었습니다. CJ그룹 자체가 그룹 네임밸류에 비해 연봉이 짠 편인데도 그랬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감지덕지였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았던 건... 역시 [CJ계열사 35% 할인 혜택]이겠네요.


2010년 초반에 문화기업을 표방하며 먹고/마시고/보고/듣고/즐기는 모든 것을 다 포괄하여 장악하겠다는 야심(!)을 떨치던 CJ. 이 그룹은 계열사 전체 임직원에게 '35% 할인 혜택'을 줬었습니다. 빕스, 뚜레주르, 투썸플레이스, 차이나팩토리 등등 CJ푸드빌에 소속된 오프라인 매장 브랜드들은 거의 다 이 할인 혜택이 적용됐었죠.


앞서 말했듯이, 저는 35살까지 모은 돈이 전혀 없었고 블랙기업에 취직하기 직전에 통장 잔고가 -300만원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월 12만원 내는 고시원에 살았구요. 그 덕분(?)인지 입맛이 저렴해져서 아무거나 잘 먹었고, 특히 뷔페 가면 아주 환장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빕스(Vips)'는 천국이었습니다. 그냥 가도 좋은데 65% 가격이라니. 어익후 개꿀.


저와 함께 블랙기업을 다녔었던 와이프도 빕스 엄청 좋아했었습니다. 당시에 CJ그룹이 문화기업 마케팅을 하면서 브랜드 이미지도 꽤 좋을 때라서 와이프 친구들이 많이 부러워하기도 했었죠.


빕스 정말 많이 갔던 것 같습니다. 아주 그냥 주구장창 갔었죠. 메인 음식은 시킬 생각도 안 했고 기본 샐러드바 이용권만 결제하긴 했습니다만 그게 뷔페 급이니 미친 듯이 먹었었습니다.



한국 나이로 35살 때까지 땡전 한 푼 모은 게 없고 그나마 늦깎이로 취직한 블랙기업에서는 최저임금 수준의 연봉을 받고 있던 남자. 그 남자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결혼하기로 결심해 준 7살 연하의 여자.


우리 부부는 행복했었습니다. 37살 후반부에 이직해 38살 때에 이제 겨우 대리 2년차였지만, 일단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었습니다.


물론 영원히 행복할 수는 없죠. 서서히 서서히 불안감이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제 불안감의 근원은 역시 '나이'였습니다.



38살에 대리 2년차.


늦습니다. 많이 늦습니다. 정상적으로 27~28살에 취직한 한국 남자들에 비해서는 약 5년 가량 늦습니다.


뭐, 제가 날려먹은 시간이 많으니 어쩔 수 없긴 했죠. 첫 취직을 30살에 했다가 뜬금없는 자존심으로 사직서 쓰고 3년간 고시생 신분으로 위장해 게임방 죽돌이로 살았으니까 5년 날려먹는 게 당연하긴 했죠.


당연하긴 했지만 당연하다고 해서 그냥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IT/방송/통신업계라면 더더욱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됐습니다.



이직할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직하고 나서 보니 건설업과 IT산업(방송통신업 포함)의 차이가 상당히 컸습니다. 무엇보다도 '직업의 생애 주기'가 많이 달랐습니다.


건설업에서는 50대 부장 직원이 상당히 많습니다. 아무래도 산업 자체가 숙성산업이고, 소위 '노가다'라 불리는 현장 분들도 50~60대가 많으며, 한 번 쌓아 놓은 경험과 지식을 50대 이후에 계속 활용할 수 있기도 합니다. 60세 정년을 채우는 분들도 꽤 많은 편이죠.


반면 IT는... '사오정'이 절대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45세에 칼같이 잘라내는 건 아니었지만 50세 즈음에는 정말로 은퇴를 준비해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2010년대 초중반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입사했던 헬로비전은 '유선방송업'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우리는 케이블방송사가 아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첨단산업을 주도하는 IT기업이야!'라는 뜬금포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그 뜬금포 때문에 더더욱 IT기업 코스프레(?)를 하려고 했었습니다. 당연히 IT기업의 특성을 따라가려 했었는데... 그 때문인지 몰라도 전반적으로 직업의 생애 주기가 짧았죠.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에 부장 급으로 조기승진해 팀장을 다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차장 직급을 없애고 부장(G6)-선임부장(G7) 체계를 확립한 CJ그룹의 특성상 차장 급에서도 팀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현상은 더 가속화되었습니다.


즉, 38살의 저는 다른 부서의 팀장들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났습니다. 5~6살 위를 찾아보면 임원 분들도 계셨어요. 40대 임원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이 상태에서 진급 연한을 꽉꽉 채운다? 그럼 그대로 사오정 됩니다. 45살에 정리해고 확정, 뭐 그랬습니다.



빕스 35% 할인으로 만족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7년 다니고 정리해고 될 게 아니라면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어떻게든 조기진급을 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저에게는 참 운이 좋게도 당시의 CJ그룹과 CJ헬로비전은 큰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럭키비키였죠. 조직 차원에서는 큰 불행이었지만.


조직 차원의 불행은 나중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제 관점에서 럭키비키 요소만 먼저 언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꽃 M&A'라는 제목으로 다음 편에서 서술하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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