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제 글을 보신 분들은 거의 다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소위 하류문화(서브컬처)에 익숙한 사람이고 돈 많이 드는 고오급 상류문화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엽기 잔혹 대학살 (창자줄넘기) 19금 소설 쓰는 사람이 고오급 문화 즐기면 그게 더 이상하겠죠.
라흐마니노프, 쇼팽, 슈베르트 가곡, 모짜르트 교향곡, 기타등등 소위 클래식(Classic) 문화는 저에게 영 거북합니다. 예전에 음악연주회 갈 일이 있었는데 아주 그냥 2시간 동안 꿀잠 잤습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깨어나 보니 끝났더군요;;
영화 중에서도 소위 '예술영화'라고 할 만한 영역에서는 대부분 꿀잠 자게 됩니다. 한때는 어려운 영화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한 적도 있지만 나이드니까 그것도 다 귀찮아요. 그냥 마음 편하게 '미국인이 나와서 다 때려부수는 영화'면 충분합니다.
제 문화생활은 대충 이러한데...
아주 가끔 '돈 많이 드는 문화콘텐츠'를 볼 때가 있습니다. 물론 고오급 상류문화까지는 아니고 적당히 대중화되었지만 그렇다고 대중이 즐기기에는 많이 비싼 편인 콘텐츠 - 뮤지컬(Musical)을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이건 꼭 돈 주고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뮤지컬이 [오페라의 유령]이었습니다. 고딩 시절에 겁나 화질 나쁜 난시청 TV로 `80년대에 제작된 영화 버전을 봤는데, 그 이후로 꼭 한 번 무대에서 공연하는 걸 보고 싶었어요. 1회 관람료가 20만원 넘어간다는 걸 알고 나서는 대학생~고시생 시절에 가는 건 포기했지만 그래도 보고 싶긴 했습니다.
결국 35살에 봤네요. 당시 모은 돈은 땡전 한 푼 없었고 한 달 월급이 야근수당 제외하면 최저임금도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과감하게 질렀습니다. 영어버전 공연도 아니고 대충 한국말로 번안해서 부르는 노래긴 했지만 나름 최대한의 감동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지금 제 아내가 된 당시 연인은 딱히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만 아무튼 잘 봤습니다.
제목을 '캣츠'라고 써 놓고 딴소리를 너무 길게 했네요.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앤드류 로이드 웨버(ALW)의 뮤지컬 중 '오페라의 유령'을 가장 좋아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굳이 다른 뮤지컬들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안 했습니다. 당연히 '캣츠'도 몰랐죠.
제가 캣츠를 본 건 2019년에 나온 (그리고 폭망했던;;) 영화 버전이었습니다. 초반에 사람 형상의 바퀴벌레를 잡아먹는 장면 때문에 한바탕 뒤집어지고 고양이 CG의 불쾌함 때문에 두 번 뒤집어지며 자존심 없이 눈물 찔찔 흘리는 그리자벨라 때문에 세 번 뒤집어진다는 작품이었습니다;;
보고 나서 뭔가 찝찝하길래 이것저것 검색해서 결국 20주년 기념작으로 나온 뮤지컬 녹화본을 봤습니다. 이걸 보니 좀 낫더군요. 원작의 그리자벨라 캐릭터가 쏙쏙 이해되기도 하구요.
아무튼 이렇게 캣츠 뮤지컬을 보고 이런저런 설명까지 찾아봤더니... '뭔가 이상한데?'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특히 '그리자벨라의 memory 노래 가사가 바뀌었다!'는 설명에서 많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서론이 길어졌으니 여기서 끊고 본론 넘어가겠습니다.
2. 본론
(1) 캣츠 뮤지컬 줄거리
캣츠 뮤지컬의 줄거리... 라고 해 봐야 별 거 없습니다. 줄거리는 진짜 간단해요. '젤리클 고양이'라는 한 무리의 고양이들이 1년에 한 번 모여서 축제를 여는데, 노래 잘 하고 춤 잘 추는 고양이들이 서로 실력을 뽐내다가 제일 잘 하는 고양이가 우승을 차지하면 그 우승자는 '헤비사이드 레이어'라는 고양이 천국으로 간다, 뭐 이게 전부입니다.
(너무 간단해서 스포일러라고 보기도 어렵네요;;)
뭐, 여기에 조금 양념이 들어가긴 합니다.
- '맥캐버티'라는 악당 고양이가 젤리클 무리의 정신적 지도자인 '올드 듀터로노미'를 납치하기도 하고,
- 어린 마법사 고양이 '미스토펠리스'가 듀터로노미를 되찾아 오며,
- 결정적으로 과거에 잘 나가다가 망가진 이후 젤리클 무리에서 쫓겨나 노숙자 신세가 되었던 '그리자벨라'가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며 노래 memory를 불러 우승한다
는 정도의 양념입니다. 아주 간단하죠.
이 간단한 양념에서 그리자벨라의 역할은 아주 중요합니다. 계속 젤리클 축제에 참여하려고 하지만 다른 고양이들에게 쫓겨나던 그리자벨라가 마지막 5분 만에 모두를 감동시키고 공감을 얻어내야 하거든요. 노래 한 곡 부르는 걸로 다 뒤집어 엎고 다른 고양이와 관객들을 전부 감동시키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죠.
20주년 기념 공연에서 다시 그리자벨라 역할을 맡은 '일레인 페이지'는 이 어려운 일을 아주 잘 해냅니다. 마침 딱 그리자벨라 역할에 적합한 나이대가 되기도 했구요. 30살에 일용엄니 역할을 맡았던 고 김수미 선생님께서 60살에 일용엄니 역할을 다시 맡은 느낌이랄까, 뭐 그런 느낌적인 느낌으로 매우 탁월한 연기력과 가창력을 선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 기준에서는 이 스토리가 좀 이상했습니다. 처음 영화 버전을 봤을 때도 그랬고, 20주년 뮤지컬 녹화 버전을 봤을 때도 그러했습니다.
제가 느낀 이상한 감정. [헤비사이드 레이어가 진짜 천국 맞아?] 라는 의문이었습니다.
(2) 헤비사이드 레이어는 천국인가? 그냥 요단강 건너는 거 아냐?
뮤지컬 캣츠의 근본이 되는 T.S 엘리엇의 원작 시는 원래 '어린이를 위한 시'였다고 합니다. 깨끗하게맑게자신있게 19금 저질 하꼬작가 따위는 감히 그 취지를 더럽힐 수 없는 좋은 취지의 시(詩)였겠죠.
그 원작 시에 '헤비사이드 레이어'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원작이 영어로 되어 있을 테니 굳이 찾아서 읽어보려면 읽어볼 수는 있겠지만 뭐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네요. 직장생활에서 영어 하는 것만 해도 머리아픈데 쉴 때 영어 읽는 건 영 거시기 하죠;;
아무튼, 19금 저질 하꼬작가인 제 시각에서는 헤비사이드 레이어가 뭔가 구린 느낌적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니 고양이 축제 우승자를 저 호텔 옥상 너머 구름까지 올려보낸다는데 이게 진짜 좋은 걸까? 그냥 요단강 건너게 해 준다는 의미 아냐?'라는 강려크한 의심(!)이 들었습니다.
제가 세상에 찌든 사람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죠. 어린이들을 위해 깨끗하게맑게자신있게 좋은 내용만 썼는데 괜히 이상한 어른이가 헛소리 하는 것일 수도 있죠. 뽀롱뽀롱 뽀로로 보고 나서 '아니 왜 북극곰 포비가 펭귄들을 다 살려 두는 거야? 포비가 다른 애들 다 잡아먹어야 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어른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저것 찾아보다 보니, 어쩌면 캣츠 뮤지컬의 초기 컨셉이 제 생각과 비슷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기에는 그리자벨라의 마지막 노래인 memory의 가사가 지금 버전과 달랐다고 하네요.
(3) memory의 초기 버전 : 그리자벨라가 죽는다(자살한다)는 느낌이 강했다고 합니다
나무위키에 짧게 언급되어 있는데, 캣츠 뮤지컬은 초기에 상당한 혹평을 받았고 그 때에는 memory의 가사가 달랐다고 합니다. 유명 작사가 팀 라이스의 초기 버전이 매우 암울한 느낌을 줘서 결국 ALW가 다 갈아엎었고, 그 뒤로 다른 작사가를 구해 현재 버전이 되었다고 하네요.
예전에 이 초기 버전을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제 짧은 영어 실력으로 읽어도 암울하긴 했습니다. 가사를 다시 찾아보기 귀찮아서 세부 내용은 패스합니다만 분명 '이런 가사로 노래 부르고 나면 죽고 싶어질 거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즉, 캣츠 초기 버전에서는
- 그리자벨라가 처절한 외로움에 발악하다가 혼자 죽어 가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고
- 젤리클 축제에서 그리자벨라가 진짜 우승한 건지 / 혼자 죽어 가는 과정에서 착각한 건지 알 수 없으며
- 헤비사이드 레이어로 날아가는 것 또한 진짜 천국으로 가는 건지 / 요단강을 건너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뮤지컬이 끝난다
는 겁니다. 안데르센의 비극동화 '성냥팔이 소녀'에서 얼어죽는 소녀가 마지막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한 결말이 되겠죠.
뭐, 이런 결말은 20만원 이상 주고 보는 뮤지컬에서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찝찝해지고 싶어서 거액의 돈을 들이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버전으로 바꾼 게 나름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또 한 번. 그런데 말입니다.
ALW가 좋은 선택을 하긴 했지만, 저 같은 19금 하꼬 작가들은 초기 버전의 비극적인 결말을 더 선호할 수도 있습니다. 칸트가 말한 비극의 미학 '카타르시스'가 살아 있잖아요. 아주 그냥 사롸있네!
이렇게 비극적인 결말을 근본(!)으로 둔다면, 캣츠에 등장하는 두 고양이의 위치를 바꿔 놓고 봐야 합니다. '올드 듀터로노미'와 '맥캐버티'를 바꿔서 봐야겠죠.
(4) 올드 듀터로노미 vs 맥캐버티 : 누가 진짜 악당인가?
뮤지컬에서 '올드 듀터로노미'는 조낸 인자하고 착하고 지혜롭고 오래 살았으며 아내도 8마리나 있는(응?) 대단한 고양이입니다. 늙어서 싸움은 못 하지만 젤리클 고양이 집단의 정신적인 리더죠.
반면 '맥캐버티'는... 소개 노래에 나오듯이 '범죄의 나폴레옹'입니다. 모든 인간의 법칙을 무시하고 중력의 법칙도 무시하며 언제 어디서 잡히든 빠져나갈 알리바이를 몇 개 만들어 두고 있는 희대의 악당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리자벨라'가 노래 memory를 불러 구원받고 우승하며 천국으로 가는 게 아니라면. 헤비사이드 레이어라는 곳으로 가는지 아닌지 알 수 없고 헤비사이드 레이어가 천국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으며 그저 외로움에 떨다가 죽어버려서 요단강 건너는 것 뿐이라면.
[올드 듀터로노미 vs 맥캐버티] 의 관계를 완전히 다르게 봐야 합니다. 듀터로노미는 젤리클 축제를 빙자해 매년 1마리의 고양이를 요단강 건너로 보내버리는 천하의 개쓰레기 (아내 8마리) 잡고양이고, 맥캐버티는 그런 듀터로노미에 맞서 희생자를 구해내려는 정의의 사도(!)가 되는 거죠.
어떨까요?
(5) 전면적으로 패러디하면 저작권 침해. 하지만 '원작의 배경을 파헤친다'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당연한 말인데, 뮤지컬 캣츠의 저작권은 ALW(앤드류 로이버 웨버) 및 그 제작자 캐머런 맥킨토시 측에 있고 사후 70년까지 보장됩니다. 저 같은 하꼬작가가 아무 권한이나 동의 없이 함부로 패러디해서 상업적으로 이용하다가는 저작권 크리티컬 맞고 피똥 쌉니다.
그러나 '원작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원작이 공연되는 현실 배경의 이면(裏面)'을 다룬다면. 즉, 뮤지컬 캣츠가 공연되고 있는 현실 자체를 새로운 창작의 배경으로 이용한다면.
이건 저작권 침해가 아닙니다. '롯데캐슬'이라는 상표에는 상표권이 있지만 한국적 아파트공화국 문화에서 '라떼캐슬'에 사는 욕망주의자들의 행태를 다루는 것은 상표권 침해가 아닌 것처럼, 뮤지컬 캣츠의 내용 자체를 패러디하는 게 아니라 그 문화현상이 일어나는 현실과 그 기만적인 본모습을 다루는 건 저작권 침해가 아닙니다. '문화해석'이겠죠.
물론 잘 써야겠죠. 아주 잘 써야 합니다. 너무 못 쓰면 아예 못 떠서 묻혀 버리겠죠;;
잘 쓰겠습니다. 때가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