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제일 싫었어요 : 서울대 어그로부터 끌고 시작

by 테서스

1. 서울대 어그로


가아끔 브런치스토리에 '서울대 어그로'를 끄는 글들이 보입니다. 서울대 나오신 분들이 전국적으로 수십만명은 될 것이고 그걸 숨길 이유도 없으니 [나 서울대 나온 사람이야!]를 강조할 수 있겠죠.


예전에는 서울대 재학생~졸업생들이 가급적 학교 이름을 밝히지 않는 예의(?) 같은 게 있었습니다만... 그런다고 대학 이름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자기 PR 시대에 서울대 나온 걸 당당하게 알려야죠. 요즘 트렌드가 그렇습니다.


뭐... 저도 서울대 어그로 끌 수 있습니다. 예전 다른 글에서 살짝 언급했듯이, 서울대 어그로에서 한 급 더 높일 수도 있어요. 지금은 사라진 대학 학부 - 서울'법'대 - 이름을 내세울 수 있거든요.


저는 서울법대 졸업장이 있습니다. 선배들 중 좌측으로는 조국 박주민 등이 있고 / 우측으로는 윤석열 한동훈 등이 있네요. 선배들 중 상당수가 감옥 갔다왔거나 현재 감옥에 갇혀 있긴 합니다만 뭐 감옥 안 가고 잘 사는 사람들도 많아요. 저랑은 별 관련 없지만 일단은 그러합니다.


그리고... 제 후배 (나이는 저보다 많은 걸로 알고 있지만 대충 학번 순으로는 후배) 중에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를 집필하신 분이 계십니다. `90년대 후반 즈음에 꽤 많이 팔렸을 거예요. 제목 어그로 제대로 끌었으니 잘 팔려야겠죠.


저도 공부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히 대다수 서울법대생들은 공부가 제일 쉽긴 했을 거예요. 운동 못하고 얼굴 빻았고 몸 비리비리하고 예체능 꽝이고 성격도 더러운데 공부라도 잘 해야죠. 신체적 정신적 물리적으로 공부가 제일 쉬운 사람들이 서울법대에 모이는데 당연히 그 집단 내부적으로는 공부가 제일 쉽긴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공부가 쉬웠을지는 몰라도... 그리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에게는 공부가 제일 싫었어요. 20대 중후반 즈음에는 학습거부증 같은 느낌적인 느낌의 증상도 있었고, 30대가 되니 더 이상 공부가 늘지 않더군요.



자, 일단 서울대 어그로를 끌었으니! 다음 챕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2. 판검사가 되어서 집안을 일으켜라?


지금 시대에는 진짜 헛소리 그 잡채입니다만, 대략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판검사가 되어서 집안을 일으켜라!]는 소리를 하는 늙은이들이 많았습니다. 매우 진지하게 저 Dog Sound를 읊어대는 집구석도 많았어요. 필자 본인이 어린시절을 보냈던 집구석도 그런 분위기였죠.


그런 집구석에서 어찌어찌 운빨로 서울법대를 갔는데...


아마 1학년 3월 첫 교양수업 때였을 겁니다. 법대 교수님께서 매우 온화한 얼굴로 (잘 안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더군요.


[여러분 서울법대 왔다고 집안 일으키는 거 아니에요. 저 보이시죠? 집안 못 일으킵니다.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이 교수님은 사법시험 조기합격 + 연수원 최상위권 + 첫 임용은 서울중앙지법 판사 + 추후 대법관 자리까지 가시는 분입니다. 그 때 당시 서울법대 수업 들으셨던 분들은 (잘 안 들리는 작은 목소리 등으로 추정해서) 대략 어느 교수님인지 바로 알 거예요. 법조계 엘리트 중에서도 최상위권 엘리트였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께서 단정적으로 말씀하시더군요. [집안 못 일으킵니다.]


서울대 나왔다고 해서 집안 일으키는 거 아닙니다. 로스쿨 이전 시대 기준으로 전국 인문계열 학부 중에서 가장 커트라인이 높았던 서울'법'대 또한 마찬가지예요. 그냥 공부 좀 잘하는 걸로 집안을 일으킨다는 환상(!)은 그냥 늙은이들의 뇌피셜일 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한물 간 뇌피셜이 아직도 유령처럼 떠도는 것 같더군요. 아주 그냥 19세기에 유럽을 떠돌던 공산주의라는 유령보다 더 독하게 살아남아 헬조선을 떠도는 것 같더군요.

2026년, '누칼협?'으로 상징되는 냉소주의 해체주의 아몰랑 중2병 시대에도 여전히 [공부 잘 하는 자식에게 몰빵해서 집안 일으키도록 만들겠다!]는 쌍팔년도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남아 있더군요.



뭐, 저 낡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괜히 명예훼손 어쩌고 하는 얘기 나올 필요는 없잖아요. 그 집 자식은 불쌍하지만 남의 집 교육문제에 망고놔라 오렌지놔라 할 것도 아니구요.


아무튼 저 낡은 사고방식을 2026년에 다시 접했더니... 기분이 더러워졌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쪽 집에 '공부 잘하는 자식'이 있어 봐야 30여 년 전의 저보다 공부를 잘 할 리 없기도 하구요. 저는 당시 기준으로 최고대학 최고학부를 나왔으니, 아직 대학 입시를 치르지 않은 현재의 학생들을 실적으로 압도하는 건 어렵지 않죠.


물론 결론적으로는 제가 그리 잘 됐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서울법대 나왔는데 사법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으면 잘 됐다고 할 수 없긴 해요. 제가 제 인생에 만족하면서 잘 사는 것과 별개로 '제3자의 시선'으로 판단하면 잘 됐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낡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반박해 줄 수는 있어요. [띠발것들아 니들 따식이 그렇게 공부를 달 해? 옥땅으로 따라와.] 는 아니고... 공부는 제가 더 잘했고 아마 99.9% 확률로 그 집 자식이 대학을 갈 때에도 제가 더 잘했던 걸로 확정될 겁니다. 깝치지 마세요.


그리고... 굳이 남의 앞길에 나쁜 얘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저렇게 낡은 사고방식의 집구석에서 자란 자식들은 언젠가 한번쯤 필연적으로 불가피하게 [학습 거부증] 및 그게 변형된 각종 증상들을 겪습니다. 그 시기가 대학입시 이전일지 / 이후일지 / 혹은 아득하게 먼 미래에 사회진출 이후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한 번은 올 거예요.


학습 거부증. [공부가 제일 싫었어요]를 외치는 시기가 옵니다. 어느날 도둑처럼 문을 두드릴 겁니다.



3. 공부가 제일 싫었어요


공부가 제일 쉬웠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제일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쉽게 잘 하는 것과 좋아하는 건 달라요. '적성'과 '취미'가 다른 겁니다.


또한, '공부'라고 퉁치는 넓은 범주 내에도 다양한 학문이 있습니다.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영어, 국어, 역사 등등 수많은 학문이 있어요. 그 중에 뭘 잘하고 뭘 좋아하느냐에 따라 수백만 개의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하지만 Hell조선은 그딴거 싹 무시하죠. 21세기 초반까지는 묻지마 법대. 로스쿨로 법조계가 기울어지니 이제는 묻지마 의대. 그걸로 끝.


물론 '깨어 있는 부모'들은 자식의 적성과 취미를 고려하여(고려대의 고려가 아니고 고려할 수 있을 때 고려하세요의 고려도 아니고 그냥 고려하여) 적절한 전공을 찾도록 해 주고, 또 적극적으로 후원해 줍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에게 맞는 학문의 길을 찾은 학생들은 잘 살겠죠.


반면, Hell조선 분위기대로 적성 취미와 무관하게 그냥 부모님이 떠드는 쌍팔년도 헛소리에 따라 묻지마법대 묻지마의대 쪽으로 몰빵한 사람이라면... 언젠가 한 번은 [공부가 제일 싫었어요]를 맞이하게 됩니다. 니체의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싸우던 초인이 [너는 해야 한다]는 비늘을 잔뜩 달고 있는 용(龍)을 만나는 것처럼, 묻지마법대 묻지마의대 합격자들은 [공부가 제일 싫었어요] 증상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공부가 제일 싫었어요 괴물의 하이퍼 업그레이드 버전인 [인생 자체가 싫었어요]를 만날 수도 있구요.



다행히 저는 '인생 자체가 싫었어요'를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학습거부증을 겪었죠. 결과적으로는 저 개인적으로 더 잘 된 일이긴 합니다만 아무튼 그 때는 그랬습니다.


저에게 학습거부증이 온 건 수능+본고사 이후 시점이었어요. 그나마 고등학교 시절에는 안 왔으니 서울법대를 갔겠죠.


서울법대에서 고시공부를 할 때 뭔가 적성에 안 맞고 취미도 전혀 안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하긴 했고 처음에는 나름 성과가 있긴 했습니다. 제 암기력이 법대 동기들 평균보다 떨어지고 응용력은 판례 외우는 데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따위' 능력으로 전락했습니다만, 응용력으로 수학 본고사 잘 풀던 사람이라고 해서 암기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니거든요. 수학 본고사로 문과계열 기준 전국10등 할 수 있으면 암기과목도 전국1000등 안에는 들어갑니다.


그렇게 묻지마 암기력으로 고시서적을 외우다가... 집에서 '거짓말'을 들었습니다. 자식이 판검사 돼서 집안 일으키는 날만 오매불망 기다리시던 아버지께서 '우리 아들 사법시험 붙었다!'라는 거짓말을 시전해 버렸죠.


20대에 학습거부증 오면 쪽팔려서 어디 말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냥 공부 안 하면 그만이에요. 게임방은 고시생으로 위장한 백수들의 좋은 놀이터죠.



뭐, 50살이 넘은 지금에 와서는 다 추억(!)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죠. 다행히 35살 이후로 정신 차리고 열심히 일해서 연봉도 꽤 올렸고, 저렴한 게임을 즐기다 보니 돈 쓸 일도 없습니다. 이제는 '내가 중산층 반열에 올랐나?' 라는 느낌적인 느낌도 들긴 합니다.


이렇게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다시 '쌍팔년도의 유령'을 만나게 되니... 여러모로 멜랑꼴리하네요. 남의 집에 나쁜 말 할 이유는 없지만 그 집 자식이 잘 되길 빌어 줄 이유도 없을 거구요.



물론 오래 신경쓰진 않을 겁니다. 저는 본질적으로 소시오패스(Sociopath)고 남의 일에 관심 없거든요. 제 자식들만 잘 키우면 그만이죠.


집안을 일으킬 기둥 후보님들. 알아서 잘 사세요. 쌍팔년도의 유령과 싸우든 / 그 유령에 빙의되어 또 다른 괴물이 되든 /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극복하며 진정한 인간승리를 이루든, 어느 쪽이든 본인 인생입니다.


산만한 글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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