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전에 영화 '대홍수'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잠시 언급했던 내용인데,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어서 추가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문화콘텐츠에서 [설정]을 접하게 됩니다.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소설 등 '설정'이 중요한 장르가 많죠. 특히 SF나 판타지처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하려면 설정의 중요성이 더욱 더 커집니다.
그런데, 이 문화콘텐츠 설정 중 어떤 것은 우리를 매우 즐겁게 해 주는 반면 / 어떤 설정은 우리를 매우 짜증나게 합니다. 마음 편하게 영화 한 편 보거나 소설 한 권 읽고 쉬려고 하는데 설정이 개판이라 짜증나면 더 스트레스 받죠.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얼척없는 설정을 전개한 후에 "내 심오한 설정을 이해 못하는 니들이 멍청한 거라구욧 빼애애액!"을 시전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더더욱 빡치죠. 분명 돈 내는 사람은 고객인데 그런 고객들 상대로 정신승리 시전할 거면 그냥 문화산업에서 떠나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극단적으로 고객상대 정신승리를 시전하는 창작자는 몇 명 안 됩니다. 저처럼 밑바닥에서 박박 기는 하꼬들은 고객님들의 취향을 최대한 존중하고 거기에 맞춰 가야 합니다. 그게 상업적 창작자의 기본 자세죠.
다만... '고객님들의 취향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게 참 어렵습니다. 고객 취향은 천차만별이고, '주류 취향'이 있긴 하겠지만 의외로 창작자들은 그 주류 취향을 갖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렇긴 하지만! 일단은 저 자신을 중심으로 취향을 분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는 문화콘텐츠 고객이 저 자신 뿐이니 제 기준에서라도 잘 분석해야죠;;
서론이 길었는데, 일단 제 기준에서 재미있는 설정 / 짜증나는 설정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분류이니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의 의견은 적극 환영합니다.
(1) 태양광 : 슈퍼맨 vs 흑철깡통
(2) 여성주인공 : 터미네이터 1,2 vs 터미네이터 6
(3) PC주의 : 드래곤 길들이기, 주먹왕 랄프 vs 흑돔공주, 황설탕공주
(4) 전투기 영화 : 탑건 매버릭 vs 알투비(R2B)
(5) 짜증나는 설정을 피하려면 : 개인 철학 최소화. 원작모욕 하지 마라
정도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2. 본론
(1) 태양광 : 슈퍼맨 vs 흑철깡통
[앞으로 50억 년 간 지속될 친환경 무한동력 에너지, 태양].
예전에 제가 다니던 회사에서 (쥐뿔 전기기술자도 한 명 없으면서 매출액 늘리겠다고 나대나대 나대면서) 태양광발전 뛰어들 때 내세웠던 홍보멘트입니다. [우주의 70%는 수소]에 맞먹는 홍보멘트죠. 틀린 말은 아니지만 21세기 현재 인류의 기술수준과 지구환경의 한계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헛소리입니다.
뭐, 태양광이 훌륭한 에너지 공급원인 건 맞습니다. 그 에너지를 활용하는 방법이 부족할 뿐, 태양광 자체는 아주 좋아요. '엽록소를 가진 식물'은 태양광만 잘 받아도 무럭무럭 쑥쑥 자랄 수 있죠.
그렇긴 한데...
지구에는 '단시간에 태양광보다 훨씬 더 강력한 에너지를 내는 물질'이 많습니다. 물론 환경파괴 문제가 따르겠지만 일단 '시간 대비 에너지'를 따지면 태양광보다 강력한 게 많아요. 석탄, 석유는 기본이고 원자력은 압도적이죠. 핵융합 기술이 개발되면 원자력도 뛰어넘을 거구요.
잠시 말이 옆길로 샜는데, 다시 슈퍼맨 vs 흑철깡통 얘기로 돌아와서!
우선 태양광 에너지를 단순 열량으로만 계산하면, 1제곱미터(m^2)에 1일 동안 내려쬐이는 태양광의 열량이 3000~3800킬로칼로리(kcal)라고 합니다. 1kcal는 물1kg을 1도 높일 수 있는 열량이니까 3000kcal면 물 60kg을 50도 높일 수 있겠네요. 이 정도면 성인 남성 1명의 체온을 하루종일 유지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게 해 줄 겁니다.
(실제로 성인 남성 1명의 기초대사량은 하루에 2000~3000kcal 정도 된다고 하죠.)
즉, 1제곱미터 당 내려쬐이는 태양광의 열량은 '성인 남자 1명이 하루 먹고 싸는 음식 에너지'보다 조금 더 많은 수준입니다. 성인 남자의 신체 표면적 중 햇빛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의 면적이 1제곱미터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 정도라고 가정할 때, 태양광을 100% 생체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생물이 있다면 이 생물은 하루종일 햇빛을 받아야 겨우 하루 3끼 음식 먹는 걸 대체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DC코믹스의 상징이자 근본 히어로인 수퍼맨(Superman)은 태양광을 5초~10초 정도만 받아도 모든 상처를 회복하고 떨어진 기력을 다 보충할 수 있습니다. 뭔가 주위에서 태양광 에너지를 더 흡수한다거나 하는 설정도 없는데 일단 노란태양의 햇빛을 받기만 하면 무한회복. 금방 죽을 것처럼 큰 부상을 입어도 태양광만 받으면 만사 OK.
과학적 상식으로 보면 수퍼맨의 '태양광 흡수 및 회복 능력'은 말이 안 됩니다. 수퍼맨의 덩치에 하루종일 햇빛을 받아도 일반 성인 남성의 3끼 식사 정도의 에너지만 흡수할 수 있는데, 이걸로 부상을 다 회복하고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아다니며 주먹질 한 방에 수만톤 규모의 우주선을 찌그러뜨린다니. 지구에 내리쬐이는 태양광을 10초 가량 모두 흡수한다면 모를까, '수퍼맨의 몸에 내리쬐이는 태양광'만으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립니다. 아무리 수퍼맨이 외계인이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죠.
그렇지만 여기에 이의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중딩 수준의 과학적 상식만 있어도 말이 안 된다는 걸 다들 알 텐데,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 줍니다.
왜냐고요? 재밌으니까요.
그리고 반대 사례.
흑철깡통, 아이언니거 등등 다양한 멸칭(!)으로 불리고 있는 '아이언하트'. 저는 안 봤습니다만, 아이언하트 드라마 버전에서 [아크 리액터를 장착하지 않은 흑철깡통]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 흑철깡통을 움직이는 동력원은... 태양광 패널과 손바닥만한 풍력발전기.
미쳐도 제대로 미쳤죠. 태양광 패널 따위로 아크 리액터를 대체하다니. 선풍기 크기도 안 되는 풍력발전기를 달아 놓은 것도 제대로 병림픽인데 면적 1~2m^2 수준의 태양광 패널을 달았다고 무려 '아크 리액터'를 대체한다고? 앰흑매직이면 다 되는 줄 아나.
현실에는 당연히 아크 리액터가 없습니다만, 일단 MCU 설정상 '아크 리액터 1호'의 출력이 3GW(기가와트)입니다. 어지간한 원자력 발전소 2개에 해당하는 발전량이고, 태양광 패널 따위로는 감히 따라갈 수도 없어요.
(앞 슈퍼맨 데이터에는 태양광을 kcal 단위로 계산했습니다만 아이언맨에서는 전기 w 단위로 계산해 보겠습니다. 그게 각 창작물의 취지에 맞겠죠.)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태양광으로 1kw 발전을 하려고 하면 약 7~8m^2의 면적에 패널을 깔아야 한다는데, 그럼 3GW는 (메가는 킬로의 1000배고 기가는 메가의 1000배이므로) 7.5*1,000*1000*3으로 무려 22,500,000m^2의 태양광 패널 면적이 필요합니다. km^2로 환산하면 2만2천5백 제곱킬로미터네요. 서울시 총 면적이 605제곱킬로미터니까 서울보다 37배 넓은 지역에 태양광 패널을 깔고 그걸 최대의 효율로 가동해야만 겨우 아이언맨의 아크 리액터 1호 휴대용발전기 1개와 엇비슷한 출력을 낼 수 있습니다.
(이건 평균값으로 계산한 것이니 햇빛이 잘 내리쬐는 한낮 기준으로 하면 면적이 대폭 줄어들겠지만, 저 아이언하트 드라마에서는 '달빛을 받으며 충전한다'고 합니다. 아니 달빛으로 태양광충전이 가능하다구요? 일단 용어 자체를 월광충전으로 바꿔야 하는 건 둘째 치고, 달빛 정도로는 태양광패널에 기별도 안 갈 겁니다. 진짜 달빛으로 충전하려면 한반도 전체에 태양광패널을 깔아도 안 될 것 같네요.)
그리고, 아크리액터 1호는 (MCU 세계관 기준으로) 엄청 후져요. 당장 아이언맨 1탄에서 토니 스타크 본인이 더 우월한 성능의 아크리액터를 만들었다가 오베디아에게 빼앗겼었고, 2탄에서는 팔라듐 대신 '배드애슘'을 활용해서 아크리액터의 출력을 +30% 정도 개선했으며, 이후 나노슈트 단계에서는 더 향상되죠. 이 정도 되면 태양광 패널을 서울 100배 면적에 깔아야 겨우 아크리액터 1개를 따라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흑철깡통이 면적 1~2m^2짜리 태양광 패널로 아크리액터를 대체한다구요? 무슨 장난감 선풍기 같은 풍력발전기랑 합쳐서?
(비록 현실에서 불가능한 설정이지만) MCU 세계관 내에서 최대한 합리적으로 아크리액터 설정을 만들어 놨는데 어디 타우렌 쿵쿵타 맞은 것 같은 블랙쌍판 도둑년이 태양광 패널 두 장으로 교체한다고? 장난하냐 앰흑년아? 니가 보기엔 이게 재밌어?
전혀 재미없습니다. 쌍욕 나오는 게 당연해요. 각본 쓴 PCPC 앰흑매직 추종자는 혼자 재밌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딴 저능지 빡대가리 수준으로 SF 흉내를 낸다는 것 자체가 아이언맨에 대한 모욕입니다.
흑철깡통 시리즈를 돈 내고 본 건 아니고 그냥 유튜브 요약본으로 봤을 뿐인데도 빡치네요. 이걸 돈 주고 본 분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 전합니다.
(2) 여성주인공 : 터미네이터 1,2 vs 터미네이터 6
'강인한 여성 전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성공하는 작품이 많지만, 그 중 단연코 1등은 '터미네이터'입니다. 사라 코너 역할을 맡은 '린다 해밀턴'은 여전사 순위를 매길 때 거의 1등 아니면 2등을 하죠.
(린다 해밀턴과 업치락뒤치락 1~2위 순위경쟁을 하는 사람이 에일리언 2에서 리플리 역할을 맡았던 '시고니 위버'인데, 특이한 게 터미네이터와 에일리언2의 감독이 모두 [제임스 카메론]입니다. 젊은 날의 카메론 감독이 킹왕짱이었죠. 요즘은 늙어서 아바타 2, 3 모두 기존 작품 우려먹기에 그치는 것 같습니다만 젊을 때는 대단했습니다.)
터미네이터 1편의 사라 코너는 초반에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습니다. 사라 코너 스스로 "나는 가계부도 제대로 못 쓰는데 무슨 인류 최강 전사를 낳고 훈련시킨다는 거죠?" 라고 당황할 정도였습니다. 미모는 출중하지만 그것 외에는 아무런 장점도 없고 그저 '카일 리스'의 목숨 건 희생에 의존해 간신히 살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편 종반부에서 사라 코너가 급 각성을 하죠. 평생의 사랑으로 업그레이드(!)된 카일 리스 상병이 죽음을 각오하고 터미네이터와 맞짱뜨다가 사제폭탄 폭발에 휘말려 죽어버렸을 때, 사라 코너는 '생존을 위한 고독한 투쟁'을 시작합니다. 한 쪽 다리에 파편이 박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바닥을 기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터미네이터의 추격을 피하려 하죠.
그리고... (하반신이 날아간 상태로 끝까지 기어서 따라오는) 터미네이터를 역으로 제거(Terminate)해 버립니다. 공장의 자동 압착 기계를 기어서 빠져나간 뒤 기계를 작동시켜서 따라오던 터미네이터를 짓이겨 버리죠. "You are terminated, Fucker!"라는 강렬한 대사와 함께.
그 후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사라 코너는 '진정한 여전사'로 거듭납니다. 턱걸이 20개는 기본. 90kg 넘을 것 같은 남자와 맞짱떠서 기절시키는 격투기술은 보너스. 탁월한 사격술까지. 님 좀 짱인 듯.
단순히 전투기술만 향상된 게 아닙니다. 액체금속 터미네이터의 칼날공격에 등짝을 베이고 어깨를 찔렸는데도 잘 버티는 정신력, 경찰 SWAT 팀 전체를 상대하면서도 적절히 시간을 끌어 주는 전술적 판단력, 그 와중에도 결국 사람은 못 죽이는 인애(仁愛)의 마음까지. 사라 코너는 최고의 군사지휘관이었습니다. 영화 설정상 인류 최고의 영웅인 '존 코너'를 키워낸 어머니이자 스승으로서 손색이 없었죠.
제임스 카메론은 매우 자연스럽게 '여성주인공 전사'를 만들어 냈고, 매우 자연스럽게 '여성 중심 PC주의'를 녹여냈으며, 매우 자연스럽게 '영웅 서사'를 창조했습니다. 그 누구도 사라 코너의 성장과 활약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어요.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터미네이터6에 나온 여자 주인공.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앰흑마법 대신 노리끼리 히스패닉 혼혈을 내세운) 이 여자는 도대체 뭐죠? 영웅 서사 따위는 똥구멍으로 씹어먹고 그냥 '니가 바로 여자 존 코너다!'라고 우기는 게 전부인 이 허접 주인공은 뭔가요?
뭐, 6탄 초반에 여자주인공이 공장장에게 항의하는 장면을 넣어서 나름대로 깡다구 있는 리더 성격이라는 암시를 주려고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어요. 그 뒤에는 그저 앰흑마법에 맞먹는 PC매직 뿐.
- 미래 세계관에서 살인 강간에 미친 찌질남들을 허접한 격투실력 + 허접한 말빨로 모두 설득해 버리고,
- 엔도스켈레톤과 액체외피로 2단분리되는 적 터미네이터에게서 계속 도망치다가 밑도끝도 없이 발전소 인근에서 "여기서 싸우면 돼. 저 놈 박살냅시다!"라고 하더니 아무 계획도 없이 싸우며,
- 싸우는 것도 특별히 달라진 거 없이 미래형 사이보그 여전사 + 노인학대 터미네이터 조합으로 허벌나게 깨지더니 운빨로 승리. 심지어 어떻게 이겼는지도 기억 안 남.
이런 캐허접 서사로 (설정상) 인류 최고의 영웅 존 코너를 대체하겠다구요? 제정신입니까 닝겐?
단언컨대, 터미네이터 6탄은 1~2로 구축된 프랜차이즈 신화에 대못을 박아버렸습니다. 노리끼리 히스패닉 혼혈 여주는 이름도 기억 안 나고 / 최후 승리 엔딩도 기억 안 나며 / 대충 사이보그 여전사는 괜찮은 비주얼이었던 것 같지만 그것뿐이에요. 아돌드 형님과 린다 누님이 고생하시는 게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얘기가 길어졌네요. 적절히 끊고 (하)편으로 넘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