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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서스 Apr 10. 2024

남극곰, 사자 방생, 인간 방생

1. 서론


지구온난화로 인해 남극의 빙하가 대규모로 녹고 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기사 작성하신 기자 분이 뭔가 단위를 착각하신 듯 '남극의 기온이 섭씨 47도로 올랐다'는 문구가 있는데... 대략 화씨 47도인 섭씨 8도 수준이겠죠. 이런 건 적절히 상황에 맞게 읽으면 됩니다.


때마침 요즘 자주 언급되었던 ['나는 북극곰입니다' 광고 찍으면서 평소에 골프광인 모 배우 이야기]가 겹쳐 보이더군요. 두 가지 사실이 연상작용을 일으키면서 '북극곰이 남극에 이송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극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 봤는데... 어어, 이 주제로 소설 쓰신 분이 계십니다. 물론 저처럼 엽기잔혹살인 19금 소설 쓰시는 분은 아니고;; 깨끗하게맑게자신있게 동화 쓰시는 분이신 것 같습니다.


북극곰을 남극으로 옮기고 '남극곰'이라 이름 붙인다. 이 생각 자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 그걸 어떤 식으로 전개하는지는 각 작가마다 다르겠죠. 어린이의 순수한 꿈을 위해 동화를 쓸 수도 있고, (저처럼) 잔뜩 배배 꼬인 어른 스타일로 전개할 수도 있습니다.


배배 꼬인 스타일로 진행하기 전에! 우선 영화 얘기부터 해 보겠습니다. '사자 방생'을 다룬 영화입니다.



2. 사자 방생 영화 : 화이트 라이언 찰리


원래 제목을 몰랐는데 이번 글 쓰면서 찾아보게 되었네요. '화이트 라이언 찰리'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대략 줄거리는...

- 전멸 위기에 처한 백사자. 어린 백사자 새끼인 찰리는 사람 손에서 자라남

- 백사자 새끼와 인간 소녀가 친해짐

- 그런데 찰리를 키운 사설동물원 인근에는 '트로피 사냥'이 유행 중. 즉, 사자를 키우는 게 결국 유럽인들의 사자 사냥으로 이어짐

- 사실을 알게 된 소녀가 백사자 찰리와 함께 도망침

- 최종적으로 찰리를 방생. 찰리는 잘 살았다 끄읕.

입니다.


전에 TV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장면은 '타조 사냥 씬'입니다...


한평생 사설동물원에서 사람이 던져 주는 고깃덩어리만 먹고 자라난 백사자 찰리. 이 찰리가 야생에 적응하려면 자체적으로 사냥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연하겠죠.


찰리는 (대형마트를 지나가면서도 사람을 사냥하지 않고) 아주 다행스럽게도(!) 타조를 사냥합니다. 뭐 전체관람가 영화니까 타조 목에서 피 철철 흐르거나 내장이 쏟아지거나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고, 소녀가 박수를 치며 "잘했어 찰리! 바로 그거야!" 라고 외치면서 감동적인 브금이 깔리는 정도입니다.


제가 이 장면을 봤을 때 드는 생각은... 'C발 타조는 어쩌라고.'



멸종위기 수준으로 따진다면 타조 전체는 백사자 집단보다 훨씬 더 많긴 합니다. 사바나 평원에 돌아다니는 흔한 타조1은 이제 야생으로 돌아가야 하는 백사자에 비해 훨씬 더 사소하고 별 비중 없는 생명체이긴 하죠. 지나가는 물고기1이 도시어부에게 잡혀서 팔딱거리는 것과 별 차이 없습니다.


백사자를 보호하려면 타조/얼룩말/누/물소/영양 기타등등 흔하고 멸종위기 없으며 개체 수가 많은 초식동물이 희생되는 건 당연합니다. 압도적인 포스를 가진 데다 색깔까지 멋지구리한 백사자 1마리를 위해 잡 초식동물 1천마리 정도는 죽어 줘야죠.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론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타조라면? 그 영화를 보는 저 자신이 타조 급으로 흔하디 흔한 일반인이라면?



기분이 더럽더군요. 영화에서 감동적인 브금 깔아 주니까 더더욱 모순이 느껴지더군요. 흔하디 흔한 일반인들이 백사자 제일주의 영화를 보고서 그 영화에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흙흙흙' 댓글 다는 거 보니까 더더욱 가관도 아니더군요.


(지금 검색해 봐도 저 영화 보고 '감동이 똥물친다'는 댓글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제가 배배 꼬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적당히 환경보호 외치는 선진국 예술가들에게 적당히 속아넘어가서 적당히 감동 받고 적당히 눈물 흘리면서 '백사자 킹왕짱! 잡아먹히는 흔한 타조1 따위 까라그래! 나는 백사자를 보호하고 싶어!' 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못하는 게 제 정신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 모순은 인간 세상에 흔하디 흔한 건데 유독 이 건에서만 발작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저 자신이 대리~과장 급 '흔한 직장인 1'로서 바닥을 기다 보니 더더욱 타조에 감정이입하고 화려한 백사자 따위에게 뽁큐 날려 주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뭐 아무튼 그랬습니다. 그 날 내내 기분이 찝찝했죠.


남극곰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떨까요? 타조가 아닌 펭귄 입장에서.



3. 남극 펭귄이 잘 살아남은 이유 : 더럽게 맛이 없어서


우리 인간에게 잘못 걸린 생물은 99.9% 멸종합니다. 북극 근처에 살던 바다사자들, 에뮤, 기타등등 멸종된 사례가 많습니다.


그런데 남극 펭귄은 무사합니다. 인간과 몇천년간 공존해 왔지만 펭귄이 전멸 위기라는 얘기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펭귄고기가 더럽게 맛이 없어서'입니다. 이게 사실상 유일한 이유라고 하네요.


(당연히 저는 펭귄고기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만) 검색해 보면 고무 씹는 거랑 비슷하다고 합니다. 인간이 소화할 수 없는 단백질과 기름 성분이 많다고 하네요. 인간 입장에서는 잡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북극곰이 남극으로 이송되어 펭귄을 사냥한다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곰의 입맛은 사람과 다르니 의외로(!) 펭귄고기에 적응할지도 모르죠. 그러면 남극곰 입장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에덴동산'이 새로 열릴 겁니다.


다만, 북극곰의 고기 취향이 인간과 비슷하다면... 남극곰에게는 헬오브지옥 열리는 거죠. 살아남으려면 펭귄 잡아먹어야 하는데 막상 먹으면 고무 씹는 느낌. 진짜 죽지 못해 사는 기분이고 확 그냥 빙하에 머리 들이받고 싶어질 겁니다.



그리고 펭귄 입장에서는... 위 타조와 비슷한 기분이겠죠. 'C발 북극곰은 너무 소중해서 골프광 배우가 얼굴에 자막 덮어씌우면서 홍보해 주고 비행기 태워서 남극까지 이송해 주고 이제부터 너는 남극곰이다 소중하게 잘 살아 웅앵웅 해 주는데 펭귄은 수천마리 죽는다. 이게 지구냐! 지구냐고!' 라는 말 나올 만 합니다.


북극곰(남극곰)이 펭귄고기를 좋아하면 더 큰 문제입니다. 하루에 펭귄 1마리 죽을 게 수십마리로 늘어날 것이고, 영양 상태 좋은 남극곰이 번식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부터는 펭귄이 멸종위기생물에 오를 거예요.



(읽어본 건 아니지만) 남극곰 동화책에서는 이런 내용까지 다루진 않을 겁니다. 저도 저희 집 애들에게는 건전한(!) 동화책만 권장할 겁니다. 그 이상 가는 어른의 사정은 어른 되고 나서 고민해도 충분하죠.


다만, 어른끼리는 좀 다릅니다. 어른의 장점이 '끝까지 파헤치고 상상하며 그 상상과 현실을 명확히 구분한다'는 건데, 어른답게 계속 가 봅시다.



4. 펭귄고기 좋아하는 남극곰 : 인간 방생 테마와 연결


'나는 북극곰입니다' 광고로 기부금 수십억 달러를 모집하는 어느 환경보호단체.


이 단체는 정말로 진지하게 북극곰 보호 운동을 벌인다. 백사자 한 마리 방생하려고 타조 죽는 건 감동브금 깔아 주는 영화처럼, 북극곰을 남극곰으로 바꿔서 종(種)을 보호해 주려고 수억 달러 쓴다.


처음에는 실패했다. 펭귄고기는 맛이 없더라. 곰 입장에서는 그냥 굶어죽는 걸 선택하더라.


하지만 소시오패스 과학자가 개입하면서 달라진다. 이 과학자는 남극곰에게 살짝 유전자변형을 가한다. 펭귄고기의 특정 성분을 소화시킬 수 있게 특정 유전자를 변형시켜 준 것이다.


남극곰은 살 판 났다. 펭귄들은 죽어나가지만 남극곰은 승승장구한다. 아주 그냥 북극곰보다 남극곰이 더 많아질 기세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 인간들이 대량으로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마치... 펭귄들처럼.


(혹은 남극곰 테마와 인간 테마가 병행해서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들을 죽이는 것은 외계생명체. 어느 외계인이 '우리 소중한 애완동물 방생했어욧 감동브금 깔아 주면서 인간 따윈 다 사냥해 버렷 흙흙흙'을 시전해 버린 것이다.


인간들은 처참하게 죽어 나갔다. 지금까지 최강의 포식자로 군림하다가 갑자기 피식자 신세가 된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원점에서 검토하고 도전해야 했다.


그 결과 역사적 진실이 밝혀진다. 50만 년 전 뗀석기 시대를 시작한 인류가 바로 '방생(方生)'의 결과물이었다는 것.



인류가 본격적인 발전을 하기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그 직계 영장류는 그저 여러 중간포식자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 때만 해도 영장류가 집단사냥 전술을 개발해 매머드를 멸종시킬 거라고 생각한 지성체는 없었다. 저 우주 어디에도 그런 지성체는 없었다.


그러나, 어디에나 소시오패스는 있는 법. 한 소시오패스 외계인 과학자가 지구 영장류를 조사하다가 그 가련한 생물체들에게 연민을 느꼈고, 그 영장류에 유전자변형을 해 준다.


마치... 21세기의 인류가 남극곰의 유전자를 바꿔 준 것처럼.


지구 인간은 탄생 당시부터 모순을 품고 있었다. 실제로 2천명 수준까지 줄어들었다가 특정 유전자가 변형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난 만큼, 인간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해 심층적인 의문을 갖고 있었고 그 의문 때문에 멸종생물을 보호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다른 생물의 가치는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은 인과율로 이어진다. 인간의 모순은 남극곰의 모순으로 이어졌고, 그 모순은 펭귄으로 넘어갔으며, 결국 모순의 근원인 외계인이 다시 개입하게 되었다.



이 거대한 우주적 모순 앞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처럼 절망하고 미쳐 버려야 하나? 혹은, 모순의 근원인 외계인(혹은 창조주 신)을 죽여버리고 인간 자체가 모순을 극복해야 하나?


결론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 참고로 덧붙이면, 제가 '남극곰'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소설 쓴다고 해서 먼저 동화책 쓰신 분에 대한 저작권 침해는 아닐 겁니다. 제목이 동일해도 내용이 완전히 다르면 저작권과 무관하거든요.


다만, 미리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은 의도로 좋은 동화책 쓰셨는데 동일한 주제를 놓고 이렇게 크툴루 방식으로 꼬아 버리면... 죄송합니다.


언제 쓸지는 모르겠습니다. 늘 그렇듯이 상업적으로 폭망하는 건 각오하고 써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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