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배터리

꽉 찬, 또는 비어있는

by 휴사

-이 검사를 진행하신다면 학습하게 되어 45만원을 날리시니 읽지 마세요-


모종의 계기가 생겨 내 인생에 전혀 관계없던 '풀 배터리'라는 지능검사를 진행했다.

목적은 일단 날 아는 것.

자력으로 없애지 못하는 특약점을 찾아내서, 공략하고 고정된 사고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수치로 본다는 것은 그걸 뜻했다고 믿고 싶었다.



일단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참 어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문제가 술술 풀리는 것들이 있었던 반면에

'아 기능적으로 바보가 맞구나' 라고 뇌가 울릴 정도로 벙어리가 되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니까. 중간도 있지만 그 존재감은 희미했다.


2시간 반 동안 땀이 나왔다. 그것을 알게 된 건 모든 테스트가 끝나고 나서 뒷목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만져봤을 때였다. 이유는 긴장해서.

경위는 모르지만 돈 내고 서비스 받는 건데도 그렇게 된 것이다.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부터 공기가 달랐다고 여기는 무의식을 나만 빼고는 다 알아차렸다.


날 감히 때릴 수 없게 쳐놓은 이 방패가 상대로 하여금 불편하고, 상황에 따라 얕잡아 보는 거라고 느껴지게 만드는 위선이 뭉쳐 생긴 실타래는 경험 앞에서 풀리는 게 아닌 가위로 싹둑 잘렸다.


감히 넘겨짚건대 위의 것을 포함한 두 문제점이 하나부터 열까지 영향을 끼쳐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수치로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불타올라 몸 전체에 번지는 마인드맵의 형태를 띈 "생각"

나도 불편하지만 됐어. 왜냐면 남은 편할 거라는 망상의 수갑 "경직하고 들어가는 태도"


이건 발동걸리는 순간 눈앞의 것은 보이지 않고 나는 위대한 닥터 스트레인지가 된다.

천만 가짓수에서 딱 하나만 건져낼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머릿속은 차오르고 있었다.

저리도록 인지하게 되니 오랜만에 힘이 빠져 집으로 걸어가면서 눈앞에 있는 것들만 보았다.


그 이후로는 펜을 그을 때 생기는 미세한 떨림이 줄어들었다.

이어서 편하게 사과를 해 보았다.

현상만 관찰했다.

좋아하는 것에게는 내려놓아 보았다.

이 작은 일상에 생긴 균열은 나에게는 매우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기적이었다.


만물에게 불편하게 or 편하게

언제 어느때든 두 가지에 꽂히지 말고 상황에 맞춰보는게 정답이 아닌 해답인가 궁금해졌다.

판단하고 들어가기><들어가고 판단하기는 충돌한다. 그렇기에 가능하다면 둘 다 인가.


아직 모르지만 언젠가는 알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함께 그날은 그렇게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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