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의미있는 삶에 대해

by 지용욱

삶과 죽음, 참 심오한 주제다. 우리의 모든 것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있음에도, 가장 와닿지 않는 주제다. 특히나 '죽음'같은 가치들 말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은 공포와 같다. 물론 어느정도 무서울 순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그 절망적이고 허무한 순간이, 나로서도 무서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이란 본질에 대해 이해조차 하지 못한채, 무작정 무서워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삶도 똑같다. 죽음과 함께 우리의 모든 것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있음에도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가치가 되어 전혀 와닿지 않는다. 죽음과 삶은 대대로 인간의 가장 큰 의지였다. '삶'은 '죽음'과 '생명', 그리고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있어야 실현되는 가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발판을 밟지 않은채 나아가려한다. 이대로라면 죽음이 일상화가 되는 이 시대가 미래로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그허무한 고리를 끊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삶, 죽음, 생명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실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삶과 죽음을 알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생명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다. 생명은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의 기초이자, 삶의 근본이다. 모든 인간은 생명을 통해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렇기에 생명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며 이는 헌법의 최고 이념인 '인간의 존엄'에서 도출된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생명이 모든 기본권에 앞서있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생명에 대해 조금 더 깊게 들어가보자. 생명은 가장 중요한 가치지만 그것은 생명의 자체적인 의미에서 오는 뜻이 아니다. 생명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 이유는 인간이 그 생명을 기초로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인간의 생명이 중요한 이유는 '더 나은 삶의 형성'에서 오는 뜻이란 거다. 생명의 모든 존중은 또 다른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할 이해는 바로 '존엄사'란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생명 존중에 대해 파헤치게 되면 존엄사란 문제를 필수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존엄사란, 인간이 모든 의학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전이 보이지 않을때 무의미한 모든 치료를 멈추고 존엄성과 명예를 지킨채 죽는 행위를 말한다. 쉽게 말해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편하게 죽기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생명 존중은 이 존엄사란 문제에 대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총 두 가지 선택지를 준다. 이 두 가지 선택지는 생명 존중에 대해 얼마나 이해했느냐에 따라 파가 갈리게 된다. 생명이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 뜻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한 사람들은 존엄사란 선택에 대해서 인정을 할 것이고,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죽음을 '악'으로 인식하여 막는 것이다. 생명은 중요하다. 그리고 생명 존중 또한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을 이해했다면 존엄사에 대한 선택은 충분히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동양철학에서의 삶과 죽음은 깊은 내용을 자랑한다. 그 예로 '삶은 곧 죽음이고, 죽음은 곧 삶이다'라는 문장을 들 수 있다. 특히 노자와 불교의 무위자연 사상과 윤회설은 죽음이 '대자연과 다시 하나가 되는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동양철학에서의 삶과 죽음을 그대로 이번 주제에 적용해본다면 아주 간단한 답이 나온다. 그러기 위해선 죽음에 대해 조금 더 알고 넘어가야 한다. 우선 죽음은 '삶의 고통에서 도피하는 도구 혹은 수단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인식하여 안락사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관념일 뿐이다. 죽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행위이다. 모든 인간관계, 추억, 재산, 명예들을 지워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허무하고, 절망하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만약 죽음이 이리 허무한 것이라면 우리는 왜 살까? 죽음 앞에 설때 인간은 가장 본능적이다. 무너질 것을 앎에도 도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 그 모든 과정을 지나 '우리는 왜 살지?'라는 고통스러운 결론을 맞이한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이야기 할 죽음은 좀 다른 것이다. 동양철학의 '삶은 곧 죽음이고, 죽음은 곧 삶이다'라는 문장은 죽음과 삶의 이념을 똑바로 바라보게 해준다. 죽음은 삶의 거울이다. 그리고 우리는 거울을 바라보며 조금 더 의미있게 삶을 사는 법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허무하게 끝날 우리의 죽음이지만,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더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에게 있어 가장 충실한 삶이다. 죽음은 결국 삶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이란 거울을 똑바로 응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발전 또 발전해가는 것이다. 의미있는 삶을 위해 노력할때 우리의 삶은 보다 더 진실해지고 충실해지며 깊어지기 시작한다. 더 나아지기 위한 모든 삶의 발악이 의미있는 영향력을 위한 준비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면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고 단단히 마음가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의미있는 삶은 죽음이란 거울로부터 나온다.

스코트 니어링은 죽음에 대해 통찰력있게 바라본 인물이다. 그 이유는 그의 유언만 봐도 알 수 있는데, 그의 유언에는 '조금 더 죽음의 과정을 생생히 느끼게 해달라'라는 의미의 문장이 써있었다. 죽음을 아름답고 귀중한 가치로 바라보며 조금 더 진실하게 받아들인다는 그의 자세는 현 시대의 모든 인류가 마땅히 본 받아야 할 자세이다. 죽음에 대해 받아들이는 자세는 '묘비명'에서도 알 수 있다. 묘비명에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의 마음가짐이 담겨있다.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했다는 것이다.

자살이란 자기 자신을 스스로가 죽이는 행위이다. 삶의 오랜 결투끝에 주로 나오는 행위이며, 이는 안락사도 마찬가지다. 몽테뉴, 몽테스키 같은 사상가들은 '생명은 오직 인간의 것이며 해치지 못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자살에 찬성하며, 칸트와 스피노자같은 철학가들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보존해야할 필요가 있다.' 라는 의미에서 자살을 반대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내려오는 이 문제는 아직 명백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생명의 궁극적인 주인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 인류는 꼭 이 답을 찾길 바란다.


모든 죽음은 일상화가 돼버렸으며, 죽음의 깊은 영향력은 피해자와 가족에게만 닿아있다. 이 사회는 그들을 봐줄줄 모르고, 사람이 쉽게 죽는다는 것이 이리 비참하게 증명된다니 참 절망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도 아직은 죽음의 영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선지 죽음에 대한 의식이 간접적으로 뚜렷할 뿐 직접적으론 잘 와닿지 않는 편이다. 아직도 죽음이란 이념으로 인해 많은 가족들이 슬퍼하고 있다.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당사자의 마음가짐도 중요하겠지만, 당사자가 죽고난 후의 삶을 경험하게 될 또 다른 당사자들에게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다. 죽음은 확실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삶과 죽음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한들, 그 고통마저 영원히 삶과 같이 가져갈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인류에게 죽음은 두려울 것이다. 이해와 위로가 필요한 것은 죽음이든 이 세상이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복잡해질 뿐이다. 우리는 이제 그 죽음에 조금 더 담담해지기 위해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기억되기 위해, 나아지기 위해, 의미있는 영향력을 펼치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힘든 나날이겠지만 어떤 순간이든 발전해야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는 문장이 가장 적절한 이 시대에, 모두가 힘냈으면 좋겠다. 조금 더 의미있는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자. 그것이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인류의 공통된 목표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제 글쓰기 <삶과 죽음> 2021 08 12 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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