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畫風) 같은 사진, 단 한 장만이라도 갖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운해(雲海) 속에 우뚝 솟아있는 산(山)은 상상만 해도 가슴을 뛰게 하는 멋진 모습이다. 이러한 갈증에 한줄기 빛이 되어준 이가 베트남 출신 사진작가 故‘돈 홍 오아이(Don Hong-Oai)’이다. 그의 사진은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 같은 담백한 작품이다. 마치 한 획의 붓으로 만들어진 그림이며, 필력이 살아있는 붓글씨처럼 간결하면서도 강한 힘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묵향(墨香)이 물씬 풍기는 고고한 품위가 있다.
그의 작품을 보고서 마치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다. 자연 속 삶의 모습을 사골국물처럼 담백하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섬세함에 넋이 나가고, 마치 한 줄기 대금소리가 작품 여백 속에서 흘러나오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특히 그의 작품 송봉효무(松峰晓雾)을 보면서 수묵화 같은 사진 한 장 찍어보고 싶어 흑백사진으로 어설픈 흉내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의 작품 같은 사진을 얻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런 저런 방법을 찾아 2년간 헤매던 중 동해안 어느 해변에서 갯바위를 바라보다가 야경사진 촬영에 자주 쓰이는 장노출 기법이란 힌트를 얻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가 원하는 사진을 조금씩 얻기 시작했다. 마침내 파도는 운해가 되고 갯바위는 산이 되어서, 바다! 또 하나의 풍경 사진을 얻게 된 것이다.
파도는 운해가 되고, 갯바위는 산이 되었다.
바다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풍경 사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파도와 구름과 갯바위가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이 동해안 바닷가에서 찾았다. 바다가 만들어낸 한 장의 사진을 만들기 위해서 일기예보에 따라 바닷가를 수 십 차례 찾아 갔다.
며칠 전부터 동해안 바닷가에 파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해안가 주변에 주의가 필요하다고 일기예보에서 연일 방송 중이다. 다행스럽게도 주말까지 날씨도 흐리고 파도가 높다고 한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하지 않던가. 오랜만에 기회가 온 것이다. 서둘러 카메라를 준비하지만 마음은 급하다. 혹시나 빠뜨린 것이 없는지 몇 번이고 다시 체크해 본다. 소풍가는 아이처럼 들떠 잠을 청하기도 어렵다.
동해안 심곡해변에 도착하자 비린내음이 코를 자극하고 잿빛 하늘과 파도는 거세다. 마치 성난 황소가 콧김 불며 날뛰는 것 모습이다. 파도소리는 황소 울음소리처럼 우렁차다. 포말은 황소 코에서 내뿜는 씩씩거림처럼 거칠게 날아온다. 갯바위도 파도에 강펀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검은색으로 변한다. 갈매기도 바람과 맞서 바위에 앉아 움직이지 않아 그림이 좋아 보인다. 다행히 해안도로까지 파도가 밀려오지 않아 안심이다. 그러나 부딪히는 파도 포말이 날리면서 카메라 렌즈를 괴롭힌다. 렌즈를 닦으면서 멋진 풍경을 담아내길 기대하지만 쉽지가 않다. 쉽게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성급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원하는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하늘과 바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파도는 어느 정도 높아야 한다. 너무 높아도 안 되고 너무 낮아도 안 된다. 파도가 너무 높으면 갯바위를 완전히 덮어 산은 사라진다. 너무 낮으면 운해가 없다. 갯바위 크기와 모양에 따라 파도 높이가 적당해야만 파도는 갯바위를 산으로 만들면서 스스로 운해가 된다.
카메라 셔터가 닫히기 전에 갯바위 사이로 파도가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지나간다면 더욱 좋다. 자연스러운 운해를 만들기 위해 파도가 멀리서 밀려오는 시간도 나름대로 경험치를 계산해 주어야 한다. 구름이 두꺼워 흐린 잿빛 하늘이면 최고다. 파란 하늘은 바다도 파랗게 보이기 때문에 운해를 표현하기 어렵다. 그리고 바람이 문제다. 아무리 카메라를 삼각대 위에 고정한다 해도 바람 때문에 흔들린다면 원하는 사진을 얻기란 쉽지 않다. 셔터가 열려 있는 시간 동안 흔들림 없어야 한다. 하지만 파도가 거센 날은 언제나 바람도 거칠게 불기 마련이다. 온 몸으로 카메라를 감싸며 바람과도 싸우기도 한다. 굳건하게 제자리를 잡은 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림뿐이다. 셔터가 열리고 닫히는 몇 초, 때로는 십여 초라는 기다림과 함께 사진 한 장을 얻는 것이다.
날도 저물어가고 담고자 했던 것은 다 담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모니터에 머리를 맞대고 한 장 한 장의 사진을 감상할 것이다. 남길 것은 남기고 버릴 것은 미련 없이 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포말에 날려 염분이 가득한 카메라를 열심히 닦을 것이다. 집안 청소도 제대로 한 적 없으면서 카메라를 닦는 내 모습을 보는 아내의 까칠한 눈길을 슬그머니 피할 것이다. 내색하지 못하는 곰탱이 같은 미안한 마음뿐일 것이다.
사진 속에 시간을 담았던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면서 실없이 웃을 때가 있다. 식은 김밥 한 줄과 바나나 우유 하나로 한 나절을 보낸 시간들, 메모리 카드 없이 갔다가 마음에 담았노라고 너스레 떨던 때. 무슨 사진 찍는지 궁금해 하던 아저씨의 어설픈 미소, 예쁘게 사진 찍어 달라며 눈웃음 보내던 이들, 취기 띤 얼굴로 불쑥 카메라 앞에서 포즈 취하던 이, 그들의 지나친 관심에 잠시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이러한 에피소드가 있었기에 또 하나의 추억이 남는 것이 아닐까.
밀려오는 높은 파도를 운해로, 갯바위를 산으로 변화시킴으로서 바다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내가 얻고 싶다고 얻게 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파도와 갯바위, 구름과 빛이 도와주었기에 얻을 수 있었던 시간을 담은 사진이었다.
파도와 갯바위를 소재로 한 사진을 촬영하면서 지나온 시간을 되새겨 보면, 살아가면서 내 인생의 자그마한 지침서가 만들어졌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고, 기존 틀에서 벗어나야만 새로움을 찾을 수 있음을 알았다. 나만의 색깔을 가진 한 장의 사진을 만들기 위해 인내하며 이 길을 누렁소처럼 걸어가야겠다. 이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