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머물다

by 만보

가을이 머물다.


가을이 머물다_축소.jpg


가을, 잠시 머무는 빛


낙엽이 바람에 실려 느릿하게 떨어지는 햇살 좋은 오후.


카메라 어깨 들러 매고 천천히 걸었다. 낙엽 하나가 내 발끝을 건드리고 어디론가 제 갈 길로 갔다. 마치 나에게 ‘잠시 멈추라.’고 말하는 듯하였다. 그 낙엽을 잠시 바라보았다.


가을은 언제나 머문다. 그리고 생각도 머문다. 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떠나가고, 햇살이 기울면 저물어버린다. 그래서일까, 가을을 담는 일은 언제나 이별의 연습 같다. 렌즈를 통해 본 단풍은 살아있는 불꽃 같다. 그 불꽃이 꺼져가는 순간까지 모든 빛을 나는 담고 싶었다. 사진은 결국 사라지는 것의 흔적을 남기는 예술이니까.


나는 늘 사진 속 계절보다 한발 늦게 감정이 다가온다. 셔터를 누를 때는 몰랐다. 그저 빛이 좋았고, 안정된 구도가 보였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화면을 열어보면, 그 안에는 미처 보지 못한 시간의 결이 담겨 있다. 낙엽 떨어지는 순간의 고요함, 바람이 지나간 자리의 쓸쓸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부드러운 햇살의 온기. 그것들은 마음의 그림자였다.


잠시 머무는 법을 배우다.


이날 찍은 사진 한 장이 유난히 마음에 남는다. 잔잔한 호수 위로 노을빛이 퍼지고, 그 빛을 머금은 나뭇잎이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물 위의 잔물결은 하늘을 닮았고, 하늘은 다시 나를 닮았다. 렌즈가 아닌 마음으로 초점을 맞췄다.

‘이곳이 내가 잠시 머무는 곳이구나.’

가을은 그렇게, 나의 내면에 조용히 머물렀다.


사람의 마음에도 계절이 있다면, 지금의 나는 분명 가을에 서 있다. 뜨거웠던 여름의 열정이 식고, 겨울의 고요로 향하기 전의 잠깐의 쉼. 그 중간에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여전히 빛나는 것들을 찾아내고 있다. 젊은 날에는 변화를 갈망했고, 이제는 머무는 법을 배우고 있다. 가을은 나에게 ‘머문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주는 계절이었다.


카메라를 든 손끝이 조금은 떨렸다. 셔터를 누르며, 마음속으로 ‘고맙다.’라고 속삭였다. 계절이 떠나기 전, 내 안에 잠시 머물러 준, 모든 빛과 바람과 그리고 색에게. 사진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것은 빛의 기록이라 하기보다는, 사라짐의 전조 속에서 피어난 감사의 표현이었다.


가을이 떠나도 사진 속의 가을은 남는다. 사진을 담은 나 또한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니듯이, 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그 안에서 조금씩 변해간다. 어쩌면 ‘가을이 머물다.’는 계절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세월의 강을 건너며 잠시 머문 마음의 한 페이지.


벌써 창밖에는 겨울의 냄새가 스며들고 있다. 낙엽은 흩어지고 있지만, 내 마음엔 아직도 가을이 남아 있다. 그 낙엽이 내 발끝에 잠시 머물던 순간처럼, 나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잠시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또 한 계절이 저문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셔터를 누른다.

‘가을이 머물다.’

내 안의 시간도 함께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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