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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 Oct 06. 2024

꼭 그렇게 되지 않아도

영상의학과 의사의 이야기 4.

 외과의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어릴 때 우연히 보게 된 의학드라마에서 외과의사의 모습을 보고 가슴에 불이 붙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아이돌 팬들의 언어로 쓰자면 '덕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다만 그 상대가 연예인이 아니라 직업이라는 점이 달랐을 뿐.

 

 누군가를 사랑하면 보고 싶고 안고 싶어 지듯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던 그 꿈에 닿고 싶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공부하기 너무 싫어지는 순간이 오면 집 근처였던 여의도 성모병원에 가서 괜히 병원 안을 돌아다녀보거나 지하철을 타고 종로종각 영풍문고에 가서 뭔 소리인지도 모를 (지금 돌이켜보면 해부학 교과서였던 것 같다. 그림이 많았던 기억이 나는 걸 보니) 의학 전공 서적들을 한참 읽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하고 나면 그토록 원하는 의사가 된 내 모습이 눈에 그려지듯 선명해지는 기분이어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공부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아 의대에 합격하게 되었고 또다시 긴 학업의 시간을 거쳐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공과를 정하게 되는 인턴 시기, 수술방에서 수술보조를  나는 돌연 실신했다. 한바탕의 소란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나에게 미주신경성실신이라는 증상이 있다는 사실을.


 미주신경성실신은 심각한 병은 아니다. 병이라고 부르기조차 애매한, 그냥 삶이 조금 불편해지는 정도의 무언가랄까. 교감신경계 부교감신경계 어쩌고 해서 (자세한 내용은 검색엔진 참조) 결국 긴장 상태에 놓이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증상이다. 돌이켜보면 청소년 시절에 한두 번 쓰러진 적이 있는데 그냥 살다 보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이유 없이 기절하는 날도 있겠거니(?)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던 것 같다. 알고 보니 이름이 있는 증상이었고, 게다가 명확한 치료 방법도 없었다.


 이 증상이 있는 경우에 실신을 일으키는 유발 인자는 다양하다. 몸에 무리가 가는 자세를 오래 취하고 있거나, 오래 서있는 것, 정신적으로 긴장하는 것, 좋지 않은 냄새를 맡거나 스트레스를 일으킬만한 광경을 보는 것들이 포함된다. 모두 수술방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들이다.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가 예측 불가능한 시간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수술하던 메스를 들고?! 무균 상태여야 할 환자의 수술부위가 오염되는 것은 물론이고 중요한 혈관이나 주변 기관을 손상시킬 수도 있으며 생사를 결정하는 골든타임을 놓칠 수도 있으니, 의심의 여지없이 대재앙이다.


 그렇게 외과의사가 되는 길을 포기했다. 힘껏 달리기를 하다가 결승점 앞에서 트랙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한동안 고민하다가 영상의학과에 지원하게 되었다. 영상의학과 의사는 일을 하다가 실신을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 일은 없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자주 하는 말이 "어쩔 수 없지"이다. 대학 시절 우리는 늘 붙어 다녔는데, 먹고 싶었던 음식이 다 팔려서 없으면 나를 보고 씩 웃으며 "어쩔 수 없지"라고 말했다. 열심히 공부했던 시험을 망쳤을 때도, "어쩔 수 없지", 원하던 전공과에 자리가 나지 않아도 그저 지나가듯 "어쩔 수 없지"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져서 좋았다. 늘 안달복달하며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자기 성질을 못 이기던 나에게, 그 친구의 "어쩔 수 없지"는 마음을 잠잠하게 해주는 주문 같은 것이었다. 오래 바라보던 목표가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나는 그 친구의 말을 떠올려보았다. "어쩔 수 없지"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어쩌겠는가.


 영상의학과 의사로서의 삶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사의 삶과는 좀 다르다. 영상의학과 의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분들도 많다. 심지어 의학 드라마에도 영상의학과 의사는 잘 나오지 않는다 (가끔 미국 드라마에는 나오는데 그때마다 엄청 쪼잔하고 음산한 느낌의 엑스트라로 출연한다. 내가 드라마 연출자라도 그렇게 했을 것 같기는 하다). 왜냐하면 초음파 할 때를 제외하고는 환자분들과 만날 기회가 없으니 드라마틱한 일도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모니터 앞에서 CT며 MRI들을 판독하는 일을 하는 일종의 사무직이랄까.  


 의사가 되기를 꿈꾸던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그런 삶을 살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영상의학과 의사가 된 나는 어떨지 그려보지 못했다. 다시는 나의 인생에 가슴 뛰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만 같아 무의식적으로 포기하는 기분으로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렇지만 막상 이러한 삶을 살아보니, 나쁘지 않았다. 아니, 어찌 보면 처음 내가 꿈꾸었던 길보다 좋은 점도 많이 있었다. 종종 완벽하게 수술을 마치고 수술방에서 나오는 외과 선생님들을 마주칠 때면 여전히 동경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되지만, 현재의 삶에 감사한다. 스스로의 장벽에 막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삶이긴 했지만 막상 겪어보니 예상 밖의 기쁨들이 숨어있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인생을 반추할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면 여전히 아쉽고 후회되는 순간들이 있다. 내가 몰라서 선택하지 못했던 것들도 있고, 간절히 원했지만 결국 갖지 못했던 것들도 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항상 내가 원했던 것이 꼭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못해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던 첫사랑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정도까지 사랑할만한 사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기도 했고, 간절히 원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어 선택한 전공은 의외로 적성에 잘 맞아서 큰 기쁨이 되기도 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내가 생각하거나 원했던 것이 꼭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음을 배웠는데도 여전히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성질부터 와락 내거나 생각대로 될 때까지 온갖 조바심을 내곤 한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어서 오늘 이 글을 쓴다. 지금 이렇게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가 있어도, 그게 꼭 앞으로 내내 좋은 일일 거라는 보장은 없다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오히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게 더 좋은 일일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그러니 조바심과 불안감은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삶이 내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지 기다려봐야겠다. 그러다 보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기쁨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꼭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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