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에 관한 고찰 (feat. 화산귀환)
우리는 종종 영화관을 방문한다. 예약한 영화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팝콘을 먹으며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지나가는 파노라마를 보고, 저마다의 해석을 하고, 그에 대해 영감을 받으며 깊은 감정의 떨림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는 본 영화에 대해 떠들고 이야기하며 각자의 감상평, 감정들을 공유한다.
이렇듯 우리는 어떤 콘텐츠를 소비하며 내면의 만족감을 끌어올린다. 그 콘텐츠라는 것이 영화일 수도, 드라마일 수도, 유행하는 예능일 수도 있다. 현대 사회에는 정말 무한대에 수렴하는 콘텐츠들이 존재하고, 그렇게 형성된 콘텐츠의 바다에서 우리는 각자의 취향에 맞는 것들을 소비한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잘 보지 않는다. 일단 영화관에 가거나, 앞에 드라마를 틀어 놓으면 어느새 스토리에, 등장인물의 감정선에 몰입해 있는 나를 발견하기는 한다. 영화나 드라마 그 자체를 싫어한다기보다는,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끝까지 봐야 하기에 그 시간의 무게감에 짓눌리기 싫어하는 것 같다.
그렇게 영화,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나는 정말 오래전부터 소비해 온 콘텐츠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웹툰’이다.
웹툰은 기본적으로 웹 사이트에 연재되는 만화를 일컫는 것으로, 여태까지 내가 본 웹툰의 개수만 해도 100개는 아마도 우습게 넘어갈 것이다. 내 기억으론 초등학교 5학년 즈음부터 봤으니 13년 동안 웹툰을 본 것이다. 그렇게 웹툰과 함께한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본 웹툰의 개수가 늘어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이렇게 웹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콘텐츠나 영화, 웹툰 자체의 본질에 관해 고찰하기 위함이 아니다. 요즘 주변 지인들한테 하는 말이 있다.
“너 화산귀환 봐?”
화산귀환은 현재 ‘네이버 웹툰’에 연재되고 있는 소설 원작 웹툰이다. 중국의 무림 세계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다룬 웹툰으로, 단전에 내공을 쌓고, 등장인물들이 번쩍거리며 싸우고 뭐 그런 것들이 담겨 있다.
어쨌든, 이렇게 웹툰에 대한 긴 서론으로 ‘화산귀환’이라는 작품을 언급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작중 엄청나게 많이 언급되는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당신은 ‘도’가 무엇인지 아는가?
예전에 길을 가다가, 20미터 앞에 있는 사람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걸 본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또야..?’
그리고 조금 생략되었지만,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도를 아십니까?”
당신도 아마 이에 대해서 알 것이다. 사이비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들의 단골 대사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작중 나온 ‘도’와 방금 언급한 ‘도’는 같은 한자를 쓰기 때문에 같은 것이긴 하다. 하지만 내가 이제부터 말할 ‘도’는 사이비나 종교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도(道)’는 길을 뜻한다. 그 길이 검의 길이든, 당신이 걷고 있는 길이든, 폭포수가 흐르는 길이든, 세상 만물의 이치를 관통하는 법칙이든, 그 모든 것을 통틀어 말하는 아주 넓고 방대한, 그렇기에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개념이다.
내가 도를 닦지는 않지만, 뭔가 도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화산귀환’을 보면서였다.
작중 이런 글귀가 나온다.
‘태극이 도를 담는다면, 새벽녘 잎 끝에 맺히는 이슬에도 도는 담겨있는 것.
그 모든 것이 도이고, 그 모든 것이 자연이다.
매화 잎은 그저 휘날릴 뿐이지만, 그 안에는 세상의 이치가 담겨 있다.’
-웹툰, '화산귀환' 중-
저 글귀를 보고 작가가 말하고 싶은 ‘도’란 어떤 것인지 살짝 엿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수양에 힘써 ‘도’에 닿으려고 하는 것만이 ‘도’가 아니다. 그저 존재하고, 자연스럽게 거동하는 모든 것. 세상의 법칙, 어쩌면 이치, 심지어 불협화음과 같이 듣기에는 거북해도 세상을 이루는,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들도 모두 포용하는 것이 ‘도’이다.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무슨 웹툰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냐?’
아무리 가볍게 볼 수 있는 웹툰이어도, 내가 그것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거기서 조그마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처음의 형태는 상관없지 않을까?
아무튼, 그렇다면 사람을 제외한 다른 존재들은 이미 그 자체로 ‘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강아지, 곤충, 개미, 나무 등등 이런 것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들이고, 자연의 형태는 그 자체로 자연스러움, 즉, ‘도’에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도’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고 그에 대해 철학적인 고찰을 하는 사람은 ‘도’라고 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엔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우리가 화석 연료를 태우고, 산을 깎아 자연을 파괴하고, 심지어 다른 동물들을 죽이는 짓을 일삼는다 해도, 그것이 ‘도’에 벗어난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은 ‘도’에 벗어나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일으킨 환경오염이 누적되거나, 핵전쟁 끝에 지구가 멸망해 버린다고 해도, 그것이 ‘도’가 아닌 것은 아니다.
즉, ‘도’에는 선도, 악도 없다. 그저 자연스러움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도’가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도’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아닐까? 무슨 짓을 해도 ‘도’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 것이 아닐까?
감히 나의 생각을 말해보자면, 우리는 각자의 길, 즉, ‘도’를 가지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그에 대해 한 점 부끄럼 없는 것. 또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 또한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런 일련의 과정의 방향성을 정해주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도’가 아닐까? 만약 그 끝이 파국일지라도, 그런 방향성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그 사람은 ‘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화산귀환’을 보며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노자는 ‘도’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도를 도라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노자, '도덕경' 제1장-
‘도’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은 뒤인데 저런 말을 하면 나의 의견이 신빙성이 없어질 수도 있지만, 괜찮다.
나는 철학가도 아니고, 도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최근에 한 생각에 대해 고찰하고, 그것을 당신과 공유하고 싶었을 뿐이다.
‘도’에 관한 나의 견해가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또한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떠한 의미를 찾았고, 당신에게 도달한 의미는 당신으로 하여금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당신 안에 있는 ‘도’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곳에는 선과 악도 없다. 옳고 그름은 더더욱 없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흐르는 시냇물이 강을 타고 마침내 바다를 맞이하듯이, 우리도 흐르다 보면 종국에는 내가 쌓아온 것들, 내가 목표로 했던 것들을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2024. 0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