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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국 Nov 09. 2024

비워내며 채우는 것들

술이 맛있나요? 진심?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술은 좀 마셔야 하긴 한다.”

     

이 말을 듣고 조금 의아했었다.

     

당시 그 담임선생님은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근처 학교 친구들까지도 다 알 정도로 엄한 선생님이었고, 사소한 잘못을 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투블럭 머리 스타일을 한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것을 본 뒤로 감히 머리를 기를 생각도, 다른 스타일링을 할 생각도 하지 못했고, 교복 외 다른 옷을 입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술’은 그저 좋지 않은 것, 나쁜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나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씀하시는 선생님을 보고 조금 괴리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기는 하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술에 대한 거부감은 잊어버린 채 스무 살이 되던 2019년 1월 1일에 과일 소주 반 병을 마시고 취해 비틀비틀 집으로 향하던 기억은 아직까지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어쨌든 이렇게 술에 대한 장황한 서론을 늘어놓은 것은 지금부터 이야기할 최근 경험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얼마 전, 친구와 홍대에서 술을 마시다가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나 좀 취한 것 같아.”

‘?’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항상 취한 이들을 챙기는 쪽이었던 나는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이후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조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술집에서 계산하고 나온 직후 친구는 홍대 길거리를 본인의 옷으로 청소하고 다녔다.

    

길바닥에 철푸덕 쓰러지고, 내 신발에 침 뱉고... 쓰다 보니까 화만 더 나는 것 같아서 이 이야기는 이만 줄이겠다.

     

이렇게 조금만 많이 마셔도 사람을 병든 개처럼 변하게 하는 술을 우리는 왜 좋아하는 것일까?

     

같은 과 후배가 이런 말을 했다.

     

“술이 젤 맛있어요~” 

    

그리고 주변에 이런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을 너무나도 많이 봤다.

     

“오늘 술이 달다.”

“소주는 맛있다니까?”

“아직 인생이 안 써서 그래.”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술을 마시는 친구들, 지인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온 세상이 나를 몰래카메라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알고는 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의 맛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취했을 때의 느낌, 분위기와 같은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래서 술을 싫어하는 사람도 술자리에 종종 가는 것이지 않을까?

     

아직 별로 친하지 않은 지인들과 술을 마시고 나면 맨 정신으로 친해지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친해지는 것도 이 이유이지 않을까?



     

해가 거의 다 져버린 저녁에 만나서 술집에 들어가 한잔씩 술을 마시다 보면, 들어간 술의 양에 비례해 어둠 또한 깊어진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사람들은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그렇게 형성된 분위기는 맨 정신으로는 전할 수 없는 감정, 말들을 쏟아낸다. 그렇게 서로 마음을 열어간다.

     

첫 잔은 항상 가볍다. “뭐 하고 살았어?”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별 것 아닌 이야기로 시시덕거리고, 그렇게 두 번째 잔, 세 번째 잔, 마침내 세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술을 비우게 되면 알 수 없는 용기가 샘솟는다.

     

즉, 결국 술이 주는 것은 일종의 용기이다. 오가는 눈빛, 몸짓, 말, 잔을 부딪히는 소리까지 모두 모여 근원을 알 수 없는 용기를 부여한다.

     

또한, 술은 위로이기도 하다.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겉으로 표출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나의 잔을 채워 주고, 내가 상대방의 잔을 채우는 손길만으로도 서로의 힘든 일들을 위로한다. 마치 “오늘도 고생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각박한 세상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술이란 용기를 주는 존재이자 삶을 위로해 주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사람과 술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지 않을까.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도 이런 의미이지 않았을까.

     

지금의 나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으셨던 그 선생님께서도, 위로를, 용기를 찾고 싶어 지인들과 술을 드시지 않으셨을까.

     

만약 그 의미가 나에게 제대로 전해져 온 것이라면, 늦게나마 고생하셨다고, 힘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술을 마시자고 하는 친구들을 외면하지 않기로 노력하기로 했다.

     

그 친구가 필요한 것은 단순히 술이 아니라 용기와 위로이기에.


2024. 11. 09.     


ps. 그래도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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