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2010년 제47회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연출상을 수상한 <칼로막베스>(고선웅 연출)가 극단 마방진 20주년 기념공연으로 26년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16년 만에 재공연 되었다. 3월 15일 산수유가 노릇노릇 피어나는 봄기운을 만끽하며 국립극장을 향해 올라갔다. 그날은 <칼로막베스>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관객은 하늘극장을 가득 메웠다.
칼로 막 베다?
<칼로막베스>라는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분명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인데 꼭 그렇지도 않다. ‘칼로 막 베다’를 연상시키는 이 제목은 언어유희를 통해 고전을 해체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실제로 무대는 칼싸움이 난무하며 마구 베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원작 <맥베스> 역시 살육이 극 전반에 펼쳐지지만, 고전 비극이 잔인한 장면을 직접 제시하지 않고 암시적으로 처리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막이 열리면 무대 중앙에 항아리가 놓여 있고 그 안에 다수의 목검이 들어있다. 인물들은 무대에 등장하여 한 사람씩 목검을 꺼내 든다. 이렇듯 서막은 칼로 마구 베는 장면이 많을 것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원작 <맥베스>의 인물들이 거의 그대로 등장하고 서사 역시 원작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캐릭터로 변신한 인물들이 엮어내는 이 공연의 저변에는 고전의 해체와 새로운 버전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장르의 해체
원작의 해체는 다각도로 이루어진다. 무엇보다도 장르의 해체가 두드러진다. 연극사에서 비극은 가장 장중하면서 아름답고 클래식한 장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비극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시민들에게 사랑받았던 예술이었다. 당시에는, 요즘에도 뜨는 드라마를 보지 못하면 친구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듯이, 그리스인들 역시 비극 공연을 보고 이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하나의 사회 현상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비극은 영국에서 다시 한번 절정기를 맞이한다. 고전 중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는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공연되며 여전히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연극의 장르로서 비극에는 절대적인 규칙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언급한 비극의 규범도 있지만 17세기 프랑스 신고전주의자들이 이를 재해석하여 더욱 엄격한 비극의 규칙이 생겨났다. 삼일치법칙도 이들 규칙 중 하나다. 그런데 <칼로막베스>는 이러한 정형화된 법칙을 마음껏 깨뜨린다. 비극을 존경하는 대신 철저하게 해체하고 심지어 희화화하고 있다.
비극과 희극의 본질적인 차이는 관객의 몰입에 있다. 비극은 무대와 객석을 철저히 분리하여 공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개입할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다. 그래야 진실한 몰입이 가능하고 궁극적으로 공포와 연민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희극에서 웃음은 관객의 몰입 본능을 깨트린다. 무대와 동화되려는 순간 빵 터지는 웃음은 순간적으로 무대와 거리를 두도록 한다. 이러한 점에서 희극은 우리의 전통 연희가 떠오르게 한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 없이 이따금 대사마저도 관객과 즉흥적으로 주고받는 전통 연희 방식은 지속해서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다. 무대와 객석이 유동적이고 관객이 극에 개입하는 것은 감정 이입을 방해하고 거리를 두도록 하는 수법이다. 특히 지배계급을 풍자하는 서민들의 전통 연희는 적절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함께 웃으며 사회 현상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따라서 <칼로막베스>를 꼭 집어 희극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왠지 비극적 희극이라고 말하고 싶다. 언어의 비틂, 관객과의 소통 방식, 무대 공간의 활용이 전반적으로 비극을 해체하면서 관객의 웃음을 끌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해체의 무대 미학
국립극장 하늘극장은 그리스식 반원형 객석을 지닌 원형극장 계열의 현대식 실내 극장이다. 객석이 반원형으로 펼쳐지고 무대가 낮고 넓게 열려 있어 관객은 한정되지 않은 넓은 시야각으로 무대를 바라볼 수 있다. 이 덕분에 배우와 관객 사이의 경계가 상대적으로 느슨해지고 공연은 폐쇄된 재현 형식이 아닌 공유된 현장으로 거듭난다.
이러한 공간 구조 또한 우리의 전통 연희 공간과 맞닿아 있다. 물론 전통 연희가 지닌 비고정적 객석과 달리 하늘극장의 객석은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연기자들이 객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관객과의 직접적 소통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실제로 그들은 무대에서 벗어나 객석에 침입하여 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무대 장치 또한 대체로 사실적 재현이 아니라 상징적 구조로 제시되었다. 특히 무대 안쪽의 철제 구조물은 높낮이를 변화시켜 배우의 동선을 입체적으로 확장시키고, 공간을 고정된 배경이 아닌 역동적 장이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구조물에서 연기자들이 만들어 내는 움직임은 엄숙한 비극을 재현한다기보다 마음껏 자유롭게 뛰노는 일종의 놀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극단 마방진 연극이 그러하듯, 이번에도 연기자들은 쉼 없이 달리고 뛰며 검술을 펼쳤다. 그런데 근육질의 신체가 만들어 내는 이러한 역동적 움직임이 긴장과 폭력성보다 놀이하는 에너지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 결과 관객은 비극적 상황을 마주하면서도 웃음으로 반응하였다. 이렇듯 이 공연에서 장중해야 할 비극은 놀이라는 형식으로 변환되고 무거운 정서는 경쾌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인물의 해체
<칼로막베스>의 인물들은 원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더블 캐스팅한 남자 배우(원경식과 김준수가 열연한 레이디 맥베스는 이날 공연에서는 원경식이 출연하였다.)가 여장을 하고 레이디 맥베스를 연기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 비극의 핵심 서사는 맥베스 장군이 자신의 군주인 덩컨 왕을 살해하고 왕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주인공은 자기 성에 묵고 있는 왕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마지막 결단의 순간에 망설인다. 존경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믿었던 군주를 배신한다는 것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가 망설일 때 그를 강하게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다. 후대에 레이디 맥베스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녀가 남편보다 더 집요하고 강력한 야망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 비극에서 레이디 맥베스는 거사를 준비한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다. 그녀는 비극의 구조를 작동시키는 촉발자이자 주인공 내면의 거울 역할을 한다. 최고의 권력을 쟁취하려는 욕망을 밀어붙이는 의지이자 그 욕망이 초래하는 죄의식의 파국을 온전히 몸으로 증명하는 인물인 것이다. 심리적으로 보면 그녀는 맥베스의 억압된 욕망과 잔혹성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결단의 순간에 맥베스는 윤리의 책무로 망설이면서 공포에 떨지만 레이디 맥베스는 냉혹하고 강렬하게 결단을 실행하도록 남편을 부추긴다. 이는 극작품이 쓰인 당시를 기준으로 볼 때도 비상적일 정도로 강인한 남성적 모습이다. 그녀는 여성성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올리는가 하면(Come, you spirits... unsex me here... 1막 5장) 감정보다 권력 의지에 우선권을 주기도 한다. 물론 극초반에 보인 그녀의 남성성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녀 에너지 덕택에 맥베스의 거사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권력을 움켜쥔다. 하지만 이들은 환각에 시달리고 레이디 맥베스는 몽유병자가 되며 반복적으로 손을 씻는 강박증세도 보인다. 양심을 제거하라고 외쳤던 그녀는 양심에 의해 완전히 파멸된다.
그렇다면 <칼로막베스>에서 이러한 레이디 맥베스를 강조하기 위해 남자 배우를 캐스팅한 것일까. 남편보다 키가 크고 가발을 쓴 호리호리한 레이디 맥베스는 처음엔 약간 낯설게 느껴졌지만 이내 카리스마가 넘치는 맥베스의 아내가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젠더의 해체는 권력 욕망과 폭력성이라는 것이 실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두 인물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그녀가 사실 맥베스의 또 다른 자아라는 해석을 강화한다. 이러한 캐스팅은 거리두기의 효과도 있다. 관객은 기대했던 성별이 어긋나는 순간 자연스럽게 낯섦과 거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주제의 해체
원작의 주제를 압축하면 ‘과도한 욕망이 인간을 파괴한다’라고 할 수 있다. 통제 불능의 권력 욕망이 주인공의 윤리와 자아를 잠식하여 결국 파멸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맥베스가 처음부터 군주를 암살하려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눈먼 마녀의 예언을 계기로 내면 깊숙이 잠재해 있던 욕망이 활성화되어 점차 그에 잠식된 것이다. <맥베스>는 바로 그 욕망이 현실화되는 과정과 그 파국을 집요하게 그려낸다.
<맥베스>와 <칼로막베스> 모두는 악인이 패배하고 선이 회복된다는 점에서 권선징악의 구조를 지닌다. 그러나 <칼로막베스>에서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도덕적 귀결을 넘어서는 불교적 사유다. 무대에 등장하는 승려의 존재, 반복되는 목탁 소리, 그리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반야심경의 독송은 권력과 욕망의 실체 없음, 즉 공(空)의 개념으로 이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제왕절개로 태어난 맥더프에게 패한 후 허공에 매달린 채 불에 타는 맥베스의 모습은 절대적 권력조차 결국 한 줌의 재로 소멸한다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한다. 이로써 작품은 권선징악의 서사를 표면에 두면서도 그 이면에서 모든 존재와 욕망이 공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칼로막베스>에서 해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칼로막베스>는 원전을 무겁게 체험하게 하기보다 낯설게 인식하게 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전통적인 <맥베스>는 카타르시스를 유도하지만, <칼로막베스>는 감정적 몰입을 유보하고 관객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사유하도록 한다.
둘째, 이러한 전략은 욕망으로 생겨난 비극의 기원을 특정 인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상태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비극적 재현에서 이야기는 맥베스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수렴되지만, 희극 형식으로 전환하는 순간 절제하지 못한 욕망의 비극은 우리 모두에게로 확장된다.
셋째, 장중하고 엄숙한 비극도 언제든지 가볍고 유동적인 놀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 비극은 하나의 형식일 뿐이며 그 형식은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다. 이는 욕망과 권력의 실체 없음이 드러나는 순간이며, 모든 형식이 결국 공(空)으로 환원된다는 인식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