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힘든 귀가>가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

공연 리뷰

by 인산




26년 3월 28일부터 4월 5일까지, 서울 대학로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극단 서울괴담의 연극 <힘든 귀가>가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2011년 초연 이후 2013년 성수아트홀에서 발표된 <두할-할망할망>을 계보적으로 계승하면서도, 동시대적 감각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3월 28일 공연 첫날, 3시에 쿼드를 찾았다. 첫 공연인 탓인지 객석이 군데군데 비어있었다.


극단 서울괴담은 2010년 창단 이후, 도시에서 발생하는 비합리적이고 기이한 현상들을 괴담이라는 형식을 통해 재맥락화해 온 단체다. 이들은 전통적인 극장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거리와 특정 장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연극의 형식 자체를 확장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들의 작업은 공동체 속 개인이라는 문제의식을 중심에 두고 창작과 공연을 통해 소외된 존재들의 불안, 고통, 사회가 은폐해 온 균열을 가시화하는 데 집중한다.


일상의 배반 : 존재론적 질문으로 환원된 귀가


일반적으로 귀가는 편안함 또는 휴식을 뜻한다. 힘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다. 가벼워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귀갓길이 힘든 것이라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집이라는 곳이 힘든 것일까, 도착하기가 힘든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게 하는 연극 <힘든 귀가>는 일단 일반 연극 양식에서 빗겨서 있다. 한 마디로 서사 대신 이미지, 신체 배열, 감각적 리듬을 통해 존재를 사유하도록 하는 탈서사적 미학을 지향한다. 이 연극에서 이야기는 일관성보다는 파편화된 장면들과 기호적 몸짓으로부터 생성되었다가 해체되는 과정 그 자체로 얽혀 있다.


예컨대, 무대에는 폐지와 고물을 수집하며 생존하는 샴쌍둥이 할망이 등장한다. 할망은 도시가 생산하고 배제하는 잉여의 신체를 응축한 상징처럼 보인다. 창작 과정에서 실제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할망은 다큐멘터리의 사실성을 예감하도록 하겠으나, 기괴하게 증폭된 신체 이미지로 전이되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다른 인물들 역시 개별적이기보다 도시의 균열에서 증식한 보편적 존재로 보인다. 폐지는 누군가에게는 폐기된 잔여물에 불과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 연극은 일관된 서사보다 이렇게 가치가 전도된 지점에서 출발하여, 도시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들이 다시금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귀가는 도시에서 배제된 존재가 다시 도시 내부로 진입하려는 존재론적 몸부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힘든 귀가>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행위를 존재론적 질문으로 환원한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그리고 누가 그 경계를 정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무대 위의 신체들은 우리가 외면해 온 세계의 또 다른 얼굴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배경과 서사 구조


<힘든 귀가>는 화려하게 정돈된 도시의 이면에 존재하는 인물들, 즉 도시 밖으로 청소되어 밀려난 존재들의 삶을 조망한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무대 양쪽에는 폐지와 고물들 등의 소품들이 놓여 있고, 한 인물이 비닐을 덮고 죽은 듯 누워 있다. 그처럼 다른 인물들 역시 쓸모를 다한 사물들처럼 취급되는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들은 사회 시스템에서 탈락하거나 주변으로 밀려난 존재들로서,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 신체들의 집합체다. 그런데 연극은 이들을 피해자로 바라보지 않고 대신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힘든 여정으로 구현한다. 그리고 결국엔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동적 주체로 재탄생시킨다. 마지막 장면에서 군대에서 죽은 남자가 금빛 동상으로 환생되는 것은 이런 의미로 읽힌다.


이미지, 신체, 그리고 비장소


유영봉 연출의 특징은 사실주의적 재현을 거부하고 기이함과 해학이 교차하는 이미지들의 층위를 구축한다는 점이다. 대사는 서사를 전달하기보다 시각적 이미지와 신체적 움직임을 보조하는 요소로 후퇴한다. 의미는 언어보다 신체의 리듬과 장면의 배열 속에서 생겨난다. 즉 무대는 텍스트는 중심에서 이탈하고, 이미지, 신체, 소리가 주된 언어로 작동한다. 이런 유형의 연극이 펼쳐 보이는 서사는 마르크 오제(Marc Augé)가 말한 ‘비장소(non-lieux)’의 개념과 유사하다. 버려진 공간 혹은 기억의 잔해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들은 명확한 인과적 서사를 거부하고 정서적 흐름과 감각적 연쇄에 따라 전개된다. 장면들은 논리적 연결을 거부한 채 파편적으로 병치 된다. 극단의 명칭이나 제목에서 눈치를 챌 수 있듯이, 이 연극은 예술성보다는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사건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짚어가면서 현대 사회 현상을 고발하는 일종의 사회 참여극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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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 구조


무대는 공연장 전체 공간의 중앙에 길게 놓인 백색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언 듯 터미널이나 거대한 흰 박스를 연상시킨다. 이 인공적이고 정제된 공간은 양 끝에 무질서하게 흩어진 폐기물 같은 소품들과 강한 대비를 이루며, 도시의 표면과 이면을 시각적으로 분할한다. 한쪽에 놓여 있는 맨홀 형태의 네모난 구멍은 수직적 이동의 통로이자, 은폐된 세계로의 균열로 기능한다. 이곳을 드나드는 인물을 보며 도시의 지하에서 살아가는 잊힌 사람들이 떠오른다.


공간 구조상 관객은 무대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볼 수밖에 없다. 런웨이(Runway) 형태의 무대라고 생각하면 쉽다. 이는 전형적인 트래버스 무대(Traverse Stage)로써, 배우뿐 아니라 관객 역시 시선의 주체이자 객체가 되도록 한다. 관객의 시선은 일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상호 교차하고, 무대와 객석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로 작용한다. 관객은 배우의 연기뿐 아니라 무대 너머에 앉아 있는 다른 관객들의 표정과 반응까지 동시에 보게 된다. 이러한 공간 구조는 무엇보다도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해체한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암전을 배제하고 장면 전환을 완전히 노출함으로써 무대의 사건들이 환영이 아니라는 미학을 강화한다. 이렇게 해서 관객은 사건 내부의 시선으로 편입된다.


트래버스 무대는 <힘든 귀가>의 주제와 어떻게 연계될까? 일단 관객은 극을 감상하는 제3 자가 아닌 길거리에 내몰린 소외된 존재들을 양옆에서 지켜보는 진지한 목격자가 된다. 또한 본의 아니게 무대 너머의 다른 관객의 표정을 보면서 우리에게 이 소외된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서로의 얼굴을 통해 확인하도록 한다. 나아가 <힘든 귀가>는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이들이 펼쳐내는 길 위의 서사라는 점에서, 양 끝으로 길게 뻗은 무대는 그들이 끊임없이 걷고, 밀려나고, 되돌아와야 하는 길 자체를 형상화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인물과 신체의 기호화


인물 설정 또한 연극이 지향하는 탈인격화와 존재의 객관화라는 주제를 극대화한다. 가령 모든 인물은 피에로처럼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있다. 하얀 얼굴은 은폐 또는 과장으로 개개인의 고유한 표정과 감정을 지워버린다. 따라서 사회 시스템에서 개별성을 상실하고 익명의 존재로 전락한 무명의 소외된 자들이라는 강한 인상을 준다. 희극성과 비극성의 충돌 효과도 있다. 피에로의 이미지는 겉으로는 웃음을 주거나 희극적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깊은 슬픔과 결핍이 숨겨져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과장된 얼굴은 고통을 고통으로 표현할 수 없는, 즉 고통마저 기호화되어 소비되는 현대인의 비극을 드러내려는 것은 아닐까.


일반 연극이 인물을 설정하고 그의 심리를 따라가는 감정 이입에 중점을 둔다면, 이 연극은 탈인격화의 방식으로 인물의 상태와 조건을 드러낸다. 이렇게 되면 인물이 누구인가 보다 어떤 상태인가가 중요해진다. 이는 특정 개인의 불행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버려짐, 떠돎이라는 조건을 관객의 눈앞에 물리적으로 제시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일목요연한 서사 대신 신체의 변형과 충돌로 이루어진 무대는 문명화된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를, 비틀리고 뒤엉킨 신체 언어로 증명하려는 시도다. 이 변형된 신체는 사회적 압력이 각인된 흔적으로 그들이 겪어온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굽은 등, 절뚝이는 다리, 과장된 몸짓은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귀가의 고단함이 신체의 기호로 각인된 것이다. 이렇게 인물과 신체의 기호화는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비인간화된 현실을 고발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당신의 귀가는 안온한가


누군가에게 귀가는 안락한 휴식이지만, 또 다른 누구, 즉 무대 위 기호화된 인물처럼, 귀가는 밀려남 혹은 도달할 수 없는 장소로의 배회이기도 하다. 이 연극은 집이라는 공간이 지닌 폐쇄성과 그 안으로 편입되지 못한 이들을 향한 사회적 냉대를 기괴한 이미지로 변주한다. 공연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서둘러 귀가할 곳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겨난다. 이는 목적지를 잃은 현대인의 존재론적 방황을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연이은 질문, 이러한 귀가는 누구에게 허락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귀가가 보편적 권리가 아닌, 선택된 자들의 특권인가? 무대 양옆에 앉아 이 힘든 귀가를 지켜보는 관객에게, 자신의 귀가는 어떤지 혹은 자신이 누리는 귀가의 안온함이 누군가의 소외를 담보로 한 것이 아닌지 한 번쯤 성찰하게 한다면, 이 연극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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