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빅 마더>가 그려낸 투명한 감시 사회

공연 리뷰

by 인산

서울시극단에서 이준우 연출로 현대 프랑스 극작가 멜로디 무레(Mélody Mourey)의 희곡 <빅 마더>(Big Mother)를 무대에 올렸다. 이 연극은 2026. 3. 30 일부터 4. 25일까지 세종M씨어터에서 공연된다. 4월 5일 일요일 오후 3시에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장은 빈자리가 드물었다. 극단 측은 이 연극을 “프랑스 연극계 최고 권위 몰리에르상 노미네이트작이자 작품성과 화제성을 모두 입증한 글로벌 히트작”으로 소개하면서 밀도 높은 전개와 긴장감 넘치는 서사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한다. 아닌 게 아니라 줄거리가 스캔들을 폭로하려는 기자와 이를 막으로는 거대한 세력 간의 다툼이 손에 땀을 쥐게 하여, 마치 한 편의 네플릭스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EC%9E%91%EA%B0%80.jpg?type=w773 극작가 멜로디 무레

멜로디 무레는 누구인가?


작가 겸 연출가인 멜무레는 심리학을 전공했고 음악원에서 음악을 연극학교에서 연기를 공부했다. 그녀는 잡지 레레팡(L'éléphant)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한 두 명의 폴란드 저항군에 대한 실화를 접한다. 이를 계기로 2018년 이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모험 코미디 <미친 두꺼비들>(Les Crapauds Fous)을 쓰고 직접 연출한다. 2021년 파리 베리에르 극장에서 공연된 두 번째 작품 <거인들의 경주>(La Course des Géants)는 젊은 미국인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우주 탐험의 장대한 역사를 엮어낸 작품이다. 그리고 드디어 2023년 2월, 대중 조작을 다룬 <빅 마더>가 공연되었고, 몰리에르상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이 연극은 현재에도 여전히 공연 중이다.


<빅 마더>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무레의 작품은 마치 영화나 드라마 시리즈를 보는 듯한 긴장감과 속도감이 특징이다. 작가로서 무레는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의 에피소드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소수의 주인공에게 집중하기보다 여러 배우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극 전체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방식을 선호한다. 연출가로서 그녀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거나 여러 장소를 빠르게 전환하는 연출 기법을 즐겨 사용한다. 이러한 특징은 저널리즘 스릴러 <빅 마더>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제목 <빅 마더>


제목이 <Big Mother>인 것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속 ‘빅 브라더’(Big Brother)를 직접 비틀고 변주했기 때문이다. 무레는 이 희곡을 통해 현대 사회의 감시 시스템이 과거의 권위주의적인 방식, 가령 가부장적 통제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어머니는 돌봄을 가장한 통제를 의미한다. 즉 어머니라는 단어가 주는 따뜻함과 돌봄의 이미지를 데이터 독점 기업에 투사한 것이다. 일반 대중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검색하는지 다 알고 있는 빅테크 기업들이 마치 엄마처럼 우리를 챙겨주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 정보를 조작해 정치적 음모를 꾸미고 대중의 심리를 조종한다는 역설을 담고 있다.


작품에서는 거대 언론사와 정치적 스캔들이 얽히며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이 과연 누구에 의해 설계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무레는 감시의 주체가 과거처럼 눈에 보이는 독재자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정보를 제공하고 의존하는 데이터 시스템(Big Mother)으로 변모했음을 경고하기 위해 이 제목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제목은, 현대판 빅 브라더는 더 이상 형(Brother)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곁의 친숙한 시스템, Mother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날카로운 통찰을 담고 있다. 작가 특유의 현대적 감각이 돋보이는 제목이다.


줄거리


뉴욕의 탐사보도 기자 줄리아 로빈슨은 현직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을 입증할 결정적 사진을 입수하고 이를 취재하던 중 뜻밖의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실리콘밸리의 거물 집에 무단 침입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피고인 '피터 굴드'가, 4년 전 사고로 죽은 자신의 연인 '에단'과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아 있었던 것이다. 줄리아는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개인적인 추적을 시작하고, 이 과정은 팀 동료들이 쫓던 대통령 스캔들 및 거대 데이터 기업의 음모와 하나로 맞물리게 된다. 취재팀이 마주한 실체는 단순한 정치적 비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을 이용해 대중의 심리를 정교하게 조작하고 여론을 통제하는 전례 없는 규모의 매스 매니퓰레이션(Mass Manipulation) 프로그램, 즉 빅 마더의 거대한 그물망이었다.


극에 등장하는 빅 마더 시스템은 사람들의 검색 기록, 구매 패턴, SNS 활동 등을 분석해 그들이 무엇을 믿고 싶어 하는지 파악한 뒤, 맞춤형 가짜 뉴스를 주입해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를 무력화한다. 줄리아와 동료 기자들은 진실을 보도하려 하지만, 이미 데이터에 의해 세뇌된 대중은 오히려 기자들을 불신한다. 팀원들은 각자의 개인적인 상처와 한계를 극복하며, 목숨을 위협받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도를 감행한다. 하지만 그들이 폭로를 마친 직후, 시스템은 기다렸다는 듯이 작동한다. 그들이 올린 기사와 증거 자료들은 순식간에 인터넷상에서 삭제되거나 조작된 가짜 뉴스로 낙인찍힌다. 결국 대통령 선거는 음모의 중심에 섰던 인물 머서(Mercer)는 미국 제47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실제 47대 대통령이 트럼프라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마지막에 줄리아를 포함한 기자들은 증발해 버린다. 얼마든지 공식적인 기록에서 사라지거나, 혹은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처리될 것이다.


줄거리의 흐름에서 중요한 지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자들이 밝혀내려 했던 추문과 음모들은 빅 마더 시스템에 의해 오히려 상대 후보를 공격하거나 본인의 이미지를 세탁하는 도구로 역이용된다. 들째, 인물 머서는 정치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데이터가 진실을 압도하는 새로운 시대의 상징적 통치자가 된다. 셋째, 진실을 보도하려 했던 기자들이 사라진 자리에 머서는 빅 마더의 비호 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대통령으로 군림하게 된다. 결국 이 작품은 머서라는 인물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데이터와 자본이 결합했을 때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인물들

기자들.jpg 뉴욕 탐사보도 기자들


서사가 워낙 정교한 스릴러 구조를 띠고 있지만, <빅 마더>가 평단의 극찬을 받은 이유는 그 복잡한 시스템의 톱니바퀴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결함 있는 인간들의 입체적인 성격 덕분이다. 작가는 인물들에게 각기 다른 심리적 결핍을 부여함으로써 시스템이 어떻게 개인의 약점을 파고드는지 극적으로 보여준다. 가령 줄리아 로빈슨은 과거에 묶인 추격자라고 할 수 있다. 4년 전 사고로 죽은 애인으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녀의 에너지는 정의감 이전에 개인적인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연인과 똑같이 생긴 남자를 발견했을 때, 기자의 냉철함보다 연인의 간절함이 먼저 튀어나온다. 시스템은 그녀의 이 그리움이라는 심리적 취약점을 이용해 그녀를 혼란에 빠뜨린다.


편집장 오웬은 전형적인 염세주의자 혹은 냉소 뒤에 숨은 이상주의자로 볼 수 있다. 그는 세상 모든 것에 냉소적이고 사람을 믿지 않는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팀원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그의 독설은 사실 시스템에 오염된 세상에 대한 방어기제에 가깝다. 알렉스는 인정 욕구에 목마른 2 인자라고 할 수 있다. 신문사 사장의 아들이지만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늘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정의감 이전에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위험한 취재에 뛰어든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상을 대변하며, 관객이 가장 이입하기 쉬운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이들과 대립하는 인물 머서는 빅데이터 기업을 운영하며 대통령이 되는 인물로, 인간을 데이터의 집합체로만 간주한다. 그는 전형적인 악당이라기보다, 철저하게 효율성과 통계에 함몰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악을 행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데이터를 통해 혼란스러운 세상을 정리하고 질서를 부여한다는 확신에 차 있다. 이 확신의 면모가 더 큰 공포를 준다.


%EB%A8%B8%EC%84%9C%EC%9D%98_%EB%8C%80%ED%86%B5%EB%A0%B9%EB%8B%B9%EC%84%A0.jpg?type=w773 결국 머서는 대통령에 당선된다.

각 인물은 현대인이 가진 불안, 즉 상실, 열등감, 고립 등을 하나씩 상징한다. 복잡한 정치 음모 속에서도 관객이 길을 잃지 않는 건, “줄리아가 과연 연인을 찾을 수 있을까?”, “알렉스가 드디어 인정받을 수 있을까?” 같은 개인적인 서사가 닻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자 융이 언급한 자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는 셈이다. 시스템(Big Mother)은 그 그림자를 이용해 인물들을 통제하려 하고, 인물들은 그 그림자를 직면하며 진실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다.

%EB%AC%B4%EB%8C%80.jpg?type=w773 조명과 영상 언어 그리고 무대 구조를 잘 보여준다.

무대, 첨단 기술로 구현된 투명한 감시 사회


이번 공연의 무대는 현란한 시각적 에너지를 뿜어낸다. 관객을 향해 ㄷ자 형으로 열린 무대 구조는 전통적인 프로시니엄 무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듯 보인다. 정면은 활짝 열어두되 양옆과 안쪽을 닫아 집중도를 높였고, 특히 무대 깊은 안쪽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빈번한 장소 이동과 심리적 서스펜스를 극대화하고 있다.


조명과 음향 그리고 상하로 놓인 이중의 스크린을 통해 펼쳐지는 화려한 영상미는 압도적이다. 유리 무대와 유기적으로 결합한 이 영상 연출은 모든 것이 노출되고 기록되는 투명하게 감시당하는 사회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이 작품은 서사 자체가 복잡하고 과거와 현재를 쉴 새 없이 오가는 비선형적 시간 구조와 다층적인 공간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를 구현하기 위해 제작진은 연출 기법의 다양화에 공을 들였다. 첨단 기술로 구현된 무대장치는 방대한 서사를 속도감 있게 밀어붙이는데 도움을 준다. 문득, 배우의 육체를 강조하며 가난한 연극을 주장한 그로토프스키가 이 무대를 봤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그는 아마도 이 화려한 기술적 기교를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과잉된 기술이야말로,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대 데이터 사회의 본질을 가장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현대적 교육 연극


마치 한 편의 영화나 고도로 설계된 드라마 시리즈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연극은, 관객을 강렬하게 흡입시키는 동시에 적절한 거리두기를 병행한다. 거대한 스크린이 무대의 주도권을 잡을 때 관객은 잠시 공연장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영화적 몰입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 몰입이 극에 달할 무렵, 배우들은 객석을 가로지르거나 관객과 직접 눈을 맞추며 이 환상을 깨트린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시각적 재미를 위한 선택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갈수록 알고리즘과 AI의 보이지 않는 지배 아래 놓여가는 현대 사회의 위험성을 경고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극은 관객에게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지금 당신이 마주한 이 상황 속에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하겠는가?”라고 노골적인 질문을 던진다.

KakaoTalk_20260406_091706161_04.jpg?type=w773 공연이 끝나고


이 질문은 관객의 단순한 감상을 넘어선 인식의 변화, 즉 일종의 사회적 교육으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스릴러의 형식을 취한 <빅 마더>는 사실상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의 생존 방식과 윤리를 성찰하게 하는 현대판 교육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한 기술로 치장된 무대에서 역설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아날로그적인 가치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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