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리뷰
<리어왕외전>은 <리어외전>이란 제목으로 2012년 LG아트센터에서 초연되었다. 2020년 재연 이후 2026년 극단 마방진 창립 20주년 기념 공연으로 <리어왕외전>으로 제목을 바꿔 3월 20일부터 4월 12일까지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되었다. 2026년 공연에서는 제목에 ‘왕’을 붙여 좀 더 직관적으로 다가갔고, 연출 특유의 속사포 대사와 파격적인 결말이 더욱 정교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4월 4일 화창한 봄 날씨에 하늘극장을 찾았다. 객석은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리어왕>의 비극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King Lear)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통과 허무 그리고 파멸을 처절하게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인공 리어왕의 행동과 상황은 자아가 붕괴되면서 겪는 노년의 정체성 위기, 자기를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여정으로 읽을 수 있다. 주인공 리어는 효심을 위장한 두 딸 거너릴과 리건에게 속아 막내딸 코델리아를 버림으로써 비극이 시작된다. 또 다른 편에서는 글로스터 백작이 서자 에드먼드의 계략에 속아 적자 에드거를 내쫓음으로써 비극에 빠진다. 이 두 서사는 눈먼 아버지와 배신하는 자식이라는 공통된 테마를 통해 개인의 비극을 보편적인 인간사의 비극으로 확장한다. 또한 리어는 최고의 권력을 쥐었을 때는 진실을 보지 못하다가, 광야에서 미쳐버린 후에야 인간의 본질과 민초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글로스터는 두 눈이 멀쩡할 때는 에드거의 진심을 보지 못하다가, 두 눈이 뽑힌 뒤에야 “넘어지면서 보았다”라고 고백하며 진실에 눈을 뜬다. 이러한 리어와 글로스터의 비극적 상황은 <리어왕외전>의 주요 토대가 된다.
<리어왕외전>의 막장비극
<리어왕>에 ‘외전(外傳)’을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 외전은 보통 정사 이외의 전기다. 그러니까 제목 <리어왕외전>은 일전의 <칼로막베스>와 마찬가지로 고전 중 고전인 셰익스피어 <리어왕>을 완전히 해체하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그런데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파격적인 변주로 잘 알려진 연출가겸 작가인 고선웅이 붙인 ‘외전’이라는 타이틀에는 특별한 의도가 담겨 있다. 일단 외전은 원작의 비극을 비트는 시선의 확장을 뜻한다. 원작이 리어왕의 몰락과 비극적 종말에 집중한다면, 외전은 “왜 그런 비극이 일어났을까?” 혹은 “그 이면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원작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가기보다, 그 틈새를 공략하여 해석을 덧붙인 것이다. 또 하나는 주변 인물에 대한 재조명이다. 보통 외전의 특징 중 하나가 조연의 시점이다. <리어왕외전>은 리어왕 주변의 인물들이나 사건의 인과관계를 독특한 시각으로 풀어낸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익히 알던 비극을 생소하고 신선한 관점으로 마주하게 된다. 또 다른 하나는 고선웅 스타일의 변주로서 신파와 풍자다. 그는 비극적인 상황을 과장되게 표현하거나, 코믹하고 속도감 있게 몰아치는 데 일가견이 있다. 이렇듯 <리어왕외전>은 본편 뒤의 이야기가 아니라 원작이라는 뼈대 위에 연출가의 독창적인 살을 붙여 만든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리어왕외전>은 원작을 완전히 해체한다. ‘오락적 막장비극’으로 부를 만큼 전혀 다른 양식의 연극으로 변모한다. 일단 리어가 다르다. 원작에서 왕은 배신의 충격에 실성하여 광야를 헤매다 비참하게 죽는다. 외전에서는 안개 섬에 버려지지만 좌절하지 않고 그곳을 평정한 다음 장총을 들고 배신한 딸과 사위들을 차례로 처단한다. 적극적이고 힘 있는 인물로 재탄생한 것이다. 비극의 엄격한 결말은 단연 주인공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허망함과 슬픔, 공포와 연민의 감정이다. 하지만 <리어왕외전>에서는 리어가 복수를 완성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또 원작에서 셋째 딸 코딜리어는 착하고 고결한 인물이라면, 외전에서는 맹랑하고 톡톡 튀는 캐릭터로 변신한다. 심지어 원작과 달리 그녀는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첫째 사위 올바니의 변화된 성격도 재미있다. 그는 우유부단한 인물에서 노래를 부르며 티베트의 성자를 꿈꾸는 음유시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원작에서 철학적인 선문답을 던지던 어릿광대 대신, 외전에서는 거북이와 극의 흐름을 설명하고 박진감을 더하는 9명의 코러스를 등장시켜 극의 흥과 박진감을 돋우는 것도 새로운 양상이다.
한편 <리어왕>에서 흥미로운 인물은 광대다. 리어의 광대는 왕에게 독설을 내뱉으며 객관적인 진실을 일깨우는 이성의 목소리 역할을 한다. 왕이 미쳐감에 따라 광대는 무대에서 사라지는데, 이는 리어왕이 광대의 조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전한 광기와 비극 속으로 침잠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리어왕외전>에서는 광대 대신 거북이가 등장한다. 아무래도 거북이로의 변신은 속도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모두가 전광석화 같은데 유독 느린 거북이가 등장한다면 시각적인 대비가 뚜렷해진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인간들의 탐욕과 복수 사이에서, 거북이는 자신만의 속도로 움직이며 극에 기묘한 긴장감과 리듬감을 부여한다. 광대가 말로써 리어왕의 어리석음을 꼬집었다면,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는 존재 자체로 인생의 덧없음을 침묵 속에 웅변한다. 또한 거북이의 등껍질은 리어의 리어카와도 연결된다. 리어가 자신의 집(왕국)을 잃고 리어카에 의지해 떠도는 신세라면, 거북이는 자기 집(등껍질)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는 존재다. 집이 없어 고통받는 인간과 집이 곧 자신인 거북이를 대비시켜, 진정한 안식처 또는 소유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광대의 철학을 시각화한 거북이는 비극조차 결국 흘러가는 시간의 일부임을 말하고 있다.
리어와 가족
보기에 따라, <리어왕>은 거대한 국가적 서사 이전에 가족 해체와 노년의 실존적 위기를 다룬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설명서에 “아버님들, 언제까지 사실 거예요? 그냥 여쭤보는 거예요. - 불효막심한 콩가루 집안의 무장르 쌈박질!”, “부모는 너무 오래 살고, 자식은 너무 오랫동안 효도해야 한다! 쌈박질 안 하고 어찌 배기나!” 등의 요사한 문구가 적혀있다. 2026년 현재 노인 인구가 21%를 넘는 초고령사회인 한국 사회에서 이런 문구는 예사롭지 않다. 그렇다면 <리어왕>을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즉 가족 문제로 봐도 손색이 없겠다. 사회면을 장식하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아버지 리어는 세 딸에게 영토를 나눠주기에 앞서 “누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지” 말해보라고 강권한다. 이것이 곧 비극의 원인이다. 리어는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권위를 확인시켜 주는 수단으로 대한 것이다. 이에 코델리아는 “할 말이 없습니다(Nothing)”라는 진심을 전하지만 리어는 인정욕구에 사로잡혀 배신으로 오해한다. 사실 코델리아가 선택한 “Nothing”은 진실을 담고 있다. 두 언니 거너릴과 리건의 화려한 수사는 내면의 진실과 분리된 기표에 불과하다. 말은 진실을 왜곡한다. 코델리아는 사랑을 측정이 가능한 말로 환산하려는 아버지의 언어 체계에 편입되기를 거부한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억지로 언어화하는 순간, 그 사랑은 진실성을 상실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극의 끝에서 리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코델리아의 헌신적인 사랑을 확인한다. 결국 말은 배반하지만, 침묵 속의 행동은 사랑을 증명한 것이다. <리어왕외전> 역시 이 점을 강조한다.
하나의 궁금증이 있다. 지혜로운 왕이었던 리어는 왜 그토록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을까? 여기에는 노년의 심리적 취약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하나는 확인받고 싶은 자기애의 발로다. 왕권을 내려놓기로 한 시점에서 리어는 극심한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왕이라는 강력한 페르소나를 벗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고 사랑받는 존재임을 자식들로부터 확인받고 싶어 했다. 이를 눈치챈 두 딸의 과장된 찬사는 그의 굶주린 자아를 채워주는 달콤한 먹이였다. 또 하나는 통제권에 대한 집착이다. 그는 사랑조차 영토처럼 수량화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누가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사랑을 심판하고 배분하는 권력자로서의 위치를 마지막까지 확인하려는 시도였다. 또 다른 하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본 투사의 결과다. 그는 두 딸의 말을 믿었다기보다 듣고 싶었던 찬양받는 아버지의 상을 딸들의 입을 빌려 확인한 것이다. 코델리아의 침묵이 보여준 진실은 아프고 불편했지만, 두 딸의 거짓 웅변은 당장의 불안을 잠재웠다. 여기에 노년의 고독과 유아적 퇴행도 한몫한다. 겉으로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왕이었지만, 내면은 무조건적인 수용을 갈구하는 아이였다. 이 내면 아이는 비판적 진실의 성숙한 사랑보다 무조건적인 찬사라는 원초적인 만족을 택하도록 했다. 비록 절대 권력자였지만 노인 리어는 타인의 침묵의 무게를 견딜 만큼 내면이 단단하지 못했던 것이다.
상속의 문제
리어는 절대 권력자다. 그는 늙었다. 이제 모든 것을 자식에게 상속해야 한다. 일상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의 상속 문제가 시끄럽고 복잡하다. 만약 리어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당연히 왕국은 아들이 물려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딸만 셋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와 그 이전의 중세적 가치관에서 왕위 계승의 제1원칙은 남계 우선 장자 상속제였다. 아들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리어왕이 아무리 늙고 망령이 들었어도, 왕국은 분할되지 않고 고스란히 장남에게 승계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 “누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식의 효심 테스트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리어가 아들이 없다는 것은 리어왕 가문의 성씨와 정통성이 끊길 위기를 의미한다. 딸들에게 영토를 나눠준다는 것은 곧 사위인 올바니 공작과 콘월 공작에게 권력이 분산됨을 뜻하고 이는 곧 국가의 분열을 의미한다.
리어가 왕국을 세 조각으로 나누려 한 것은 딸이 셋이어서보다 나름의 정치적 복선이 깔린 결정이다. 거너릴과 리건은 이미 결혼하여 강력한 공작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리어는 이 둘에게 땅을 나눠주어 서로 견제하게 만들고, 가장 아끼는 막내 코델리아에게 비옥하고 넓은 중앙의 땅을 주어 실질적인 중심을 잡게 하려 했다. 당시 프랑스 왕과 버건디 공작이 코델리아에게 구혼 중이었다. 리어는 코델리아를 자신이 직접 고른 사위와 결혼시켜 자신의 곁에 두고, 노후를 보살핌받으며 실권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안전장치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사실 효심 테스트는 상속의 명분이었다. 리어가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딸들에게 영토를 나눠주는 것은 신하들의 반발이나 사위들 간의 전쟁을 불러올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따라서 리어는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가장 큰 땅을 주겠다”는 감성적인 명분을 내세워 자신이 편애하는 코델리아에게 정당하게 몰아주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코델리아의 “Nothing”은 리어가 설계한 이 정교한 상속 플랜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계획이 틀어지자 리어는 분노했고, 결국 왕국을 반으로 나누어 악랄한 두 딸에게 넘겨주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글로스터 백작
<리어왕>이 시대를 초월한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리어 왕가의 상속 문제와 글로스터 백작의 상속 문제를 완벽하게 병렬 배치했기 때문이다. 글로스터 가문의 갈등은 리어왕 가문보다 좀 더 구조적이고 신분적인 상속 문제를 다룬다. 적자인 에드거는 당연히 아버지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권리가 있다. 반면, 서자인 에드먼드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법적으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처지다. 이에 절망한 에드먼드는 자기 출생과 신분의 한계를 절감하며 아버지를 증오하고 가짜 편지를 통해 형 에드거를 내쫓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음모에 조작된 허위의 편지(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 역시 글의 허망함과 위험성을 보여준다. 리어가 말에 속았다면 글로스터는 글에 속는다. 두 딸의 감언이설에 속은 리어와 에드먼드에게 속은 글로스터는 눈뜬장님이었다.
눈뜬장님
권좌에 앉아 있을 때 그들의 눈을 가린 것은 권위와 타인의 찬사라는 안대였다. 리어는 왕이라는 페르소나에 도취되어 있었다. 딸들이 바치는 화려한 말은 그의 권위를 확인시켜 주는 거울이었고,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보느라 코델리아라는 실체를 보지 못했다. 글로스터는 사회적 관습과 적자 서자라는 도식에 갇혀 있었다. 에드먼드가 내민 위조된 편지는 그의 편견을 자극했다. “나는 넘어지면서 보았다(I stumbled when I saw).” 글로스터의 이 고백은 권력을 쥐고 당당하던 시절이 오히려 암흑이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이들에게 진실을 보게 되는 대가로 가장 소중한 것의 파괴를 요구한다. 리어가 인간의 본질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폭풍우 치는 광야에서 미치광이가 됨으로써 이성의 눈을 감았을 때이다. 그는 비로소 가난한 자들의 고통, 권력의 허무함 그리고 코델리아의 진심을 깨닫는다. 글로스터는 두 눈이 뽑히는 육체적 거세를 당한 후에야 에드먼드의 배신을 깨닫는다. 육신의 눈이 감기자 에드거의 결백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눈뜬장님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 역시 무거운 역할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타인 혹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리어와 글로스터는 믿고 싶었던 환상이 깨지고 추악한 진실을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의 깨달음이 생겨난다. 리어왕이 코델리아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매우 어리석고 가련한 노인이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진실에 눈뜸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리어와 글로스터는 상실을 통해 보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이 된다. 문득 또 다른 질문이 생겨난다. 우리는 무엇을 잃어야 진실을 볼 수 있을까?
역동적인 무대
공연장에 들어섰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 중앙에 설치된 둥근 원형의 덧마루다. 무대 속 무대인 셈이다. 배우들은 원형 무대와 그 주위를 활용하며 마음껏 움직인다. 이 원형 무대는 시각적, 상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운명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수레바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윤회와 운명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원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순환하는 운명을 상징한다. 이 원형은 리어왕이 최고의 권력에서 최저점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 그리고 다시 복수를 위해 일어서는 과정을, 굴러가는 바퀴처럼 멈추지 않는 운명을 시각화한다. 모든 것이 시작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 결국 인간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굴레에 갇혀 있음을 원이라는 형태를 통해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사방이 탁 트인 원형 무대는 관객의 시선을 중앙으로 모으는 효과가 있다. 리어왕의 내면적 광기나 인물들 간의 팽팽한 대립이 일어날 때, 이 원형 공간은 밀도 높은 에너지들의 충돌로 펄펄 끓는 일종의 압력솥이 된다. 나아가 버려진 리어왕이 원형 무대 위에 홀로 서 있을 때, 그 원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고립된 섬으로 변신한다. 화려한 궁전이었던 곳이 비바람 치는 들판이 되거나 수용소가 되는 마법 같은 공간 변화가 이루어진다.
아울러 원형은 전통 연희의 놀이판을 연상시킨다. 즉 무대 중앙의 원은 이곳이 비극의 현장이라기보다 모두가 어우러져 한판 신나게 노는 연극적 놀이판임을 선언하는 장치다. 그러니까 <리어왕외전>은 세상사 다 이와 같으니, 관객은 무대에서 펼쳐진 비극적인 스토리를 관조하면서 각자의 상황에 맞게 해석하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아울러 원형 무대는 직선의 움직임보다 곡선의 움직임을 유도하므로 배우들의 움직임이 훨씬 입체적이고 역동적이도록 한다. 특히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리어왕외전>처럼 속도감이 생명인 공연에서는 인물들이 원을 따라 돌거나 교차하며 나타날 때 극적 긴장감이 극대화된다.
이렇듯 무대 중앙의 원형 무대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이자 비극의 주인공을 가두는 고립의 공간이다. 동시에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역동적인 놀이판의 의미도 있다. 자세히 보면 리어가 원 안에서 밖으로 밀려나거나, 다시 그 중심을 차지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습 자체가 인생의 부침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원형 무대는 마지막 장면에 위로 들려 올라간다. 인간사 굴레로부터의 해방과 종결을 의미하면서, 한 판의 놀이가 끝났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다.
한편, 소품 리어카는 의미심장하다. 딸들에게서 쫓겨난 리어는 리어카를 끌고 방황한다. 리어카는 발음의 말장난을 넘어, 연출 미학과 리어왕의 추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소품이다. 일단 리어와 카가 결합한 리어-카(Rear-car)는 말맛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연출의 언어 유희다. 또 리어라는 이름에서 자연스럽게 리어카를 연상시키는 것은 관객의 긴장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고도의 전략이다. 비극적인 고전을 지나치게 엄숙하게 다루지 않고, 대중적인 농담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관객이 작품을 더 가깝고 흥미롭게 느끼도록 하려는 의도다. 또한 왕의 화려하고 웅장한 가마가 리어카로의 변화는 왕권의 외피를 벗어버리고 바닥까지 추락한 노인의 처지를 시각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때 나라를 호령하던 왕이 폐지를 줍거나 짐을 옮기는 데 쓰이는 리어카에 의지한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권력의 허무함을 상징한다. 극 중 리어는 딸들에게 배신당하고 안개 섬의 치킨 사육장으로 쫓겨난다. 여기서 리어카는 그가 유일하게 소유한 재산이자 그곳에서 죽은 자들을 실어 나르는 도구가 된다. 리어카는 가운데 설치된 둥근 무대 주위를 바쁘게 굴러다니며 공간을 분할하거나 극에 속도감을 부여한다. 연극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연출미학이 리어카라는 소품 하나에 집약되어 있는 셈이다. 리어카는 왕의 몰락을 비웃는 해학적 장치이자 고전을 현대의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는 가교인 것이다. 언어유희로 시작해 페이소스로 끝나는 리어카 소품은 <리어왕외전>이 왜 단순한 재공연이 아니라 독창적인 외전인지를 잘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음악 역시 이러한 막장극 공헌한다. 비극적인 순간에 느닷없이 조용필의 ‘허공’이 흘러나오거나, 마지막에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는 등 음악은 비극을 해학적으로 풀어내는 역할을 한다. 치킨 수용소에서 마이크를 잡은 리어는 신고식에서 노래 ‘허공’을 실제로 부른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의 노래 가사는 어제까지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리어에게, 하루아침에 딸들에게 버림받고 안개 섬으로 쫓겨난 현실은 믿기 힘든 악몽과도 같은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반영한다. 찬란했던 과거를 꿈으로 돌리기엔 그가 가졌던 권위와 사랑에 대한 미련이 너무나 크다. 노래 ‘허공’은 원형 무대가 허공으로 솟구치는 장면을 통해 다시 한번 인생은 한판 놀이였고, 그 무대마저 허공으로 사라짐으로써 “모든 것은 덧없다”(Nothing)는 주제를 해학으로 매듭짓는다.
효도
공연의 마지막에 큼지막한 뒤편 스크린에 “효도하세요”라는 커다란 자막이 나온다. 관객은 쿡 하고 헛웃음을 짓는다. 이 역시 연출 특유의 해학과 도발이 마지막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셰익스피어의 웅장한 비극을 해체한 뒤 한바탕 휘몰아치듯 보여주고 나서, 갑자기 아주 일상적이고 교훈적인 문구를 툭 던지는 것은 해학을 넘어 일종의 도발이다. 이 자막은 무엇보다도 비극의 무게를 털어내는 연극적 농담이다. 리어의 비극과 통쾌한 복수, 자살 등의 팽팽한 긴장감과 비극적 정서에 짓눌려 있던 관객은 “효도하세요”라는 문구로 그 긴장을 단번에 무너뜨린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연극 놀이니 너무 심각해하지 말라는 연출가 특유의 장난기이자 관객을 현실로 복귀시키는 하나의 유쾌한 방식이다. 아울러 <리어왕외전>이 가족, 노인, 세대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리어는 자식들에게 버림받고 자식들을 죽여 복수한다. 이런 참혹한 광경을 마주한 관객에게 “효도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강렬한 반어법에 가깝다. 효도하지 않으면 이런 끔찍한 피의 복수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경고를 웃음 속에 뼈 있게 담아낸 셈이다.
<리어왕>은 권력, 배신, 광기, 인간 본성 같은 거대 담론을 다룬 작품이다. 하지만 <리어왕외전>은 그 복잡한 철학적 논쟁을 결국 부모와 자식 간의 도리 문제라는 단순한 도덕 메시지로 요약한다. 고전을 박물관에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 집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가족의 비극으로 끌어내고 있다.
고선웅의 작품에는 늘 신파와 해학이 공존한다. 리어왕의 처지를 통해 부모의 사랑과 자식의 도리를 한 번쯤 생각하게 만들지만, 그것을 훈화 말씀처럼 지루하게 전달하지 않고 자막 한 줄로 쿨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은 비극의 숭고함에 머물러 있기보다, 가족이라는 현실적인 화두 하나를 툭 안고 간다. 그는 “400년 전 텍스트를 그대로 쓰면 나부터 지루해서 못 견딘다”라고 말한다. 이 말마따나 고전의 권위라는 무게를 깨고 관객과 신나게 호흡하려는 시도가 바로 이 <리어왕외전>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무거운 리어왕이 아닌 화끈한 할아버지를 만난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