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소년의 시간>(Adolescence, 2025)은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국 드라마다. 잭 손과 스티븐 그레이엄이 공동 창작과 각본을 맡고, 필립 바란티니가 연출한 4부작이다. 4주 연속 넷플릭스 글로벌 1위를 차지할 만큼 시청자의 관심을 받은 작품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태어나 성장하고 교육받고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가족, 학교, 직장 등의 환경이 중요한 역할로 작용한다. 이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13살 사춘기의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갈등은 어른이 되기 위한 조건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정체성 확립을 위한 질풍노도의 시기로, 가족과 학교는 너무나 중요한 환경이다. 드라마는 사춘기 소년 제이미가 저지른 잔혹한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성 문제, 학교 문제 그리고 가족 문제 등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전반을 깊이 있게 다룬다.
<소년의 시간>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등장하는 인셀, SNS상의 혐오 방식, 몸캠 등 청소년들 사이의 신조어를 알아야 한다. 인셀(Incel)은 Involuntary celibate (비자발적 순결주의자 또는 비자발적 독신주의자)의 약자다. 일종의 성 소외자로서 연애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모인 남초 커뮤니티의 남자 집단을 일컫는 영미권 신조어다. 피해자 케이티는 인스타에 댓글을 달아 제이미를 인셀이라고 놀린다.
몸캠은 몸과 캠(Cam)의 합성어로, 상호 자기 신체를 노출하는 영상 채팅을 뜻한다. 온라인 데이팅의 한 유형으로 모바일 환경에서 영상 채팅이 가능해지고 활발해지면서 점차 늘어나고 있다. 몸캠이 상호 합의한 상황에서 일대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음란 채팅을 시도하려 한다면 이는 통신매체 이용 음란죄에 해당한다. 몸캠은 영어권에서 섹스팅이라고 한다. 케이티는 몸캠을 했다가 남학생들에게 유출되는 일을 겪는다.
드라마는 지루하리만큼 천천히 진행된다. 일반 드라마라면 점프해서 넘어갈 장면들도 상세하게 묘사된다. 정신없이 재빠르게 진행되는 할리우드의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지루할 수 있지만, 집중해서 따라가기만 한다면 이야기가 계속 긴장감을 주므로 지루할 틈이 없다. 충격적인 살인 사건이 배경이고, 피의자로 지목된 제이미가 범행을 시종일관 부인하고 있어 계속 궁금증을 유발한다.
4부로 이루어진 각 에피소드가 커트 없이 원테이크로 촬영된 만큼,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다큐처럼 카메라로 잡아낸 느낌이다. 영화의 독창적 언어인 편집을 포기한 것은 실로 대단한 용기다. 컷과 편집이 없을 때 연기자들의 실시간 연기는 연극무대처럼 긴장감과 집중력이 요구된다. 이런 까닭에 드라마는 실화를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창작자들은 실제로 발생한 청소년의 살인 범죄, 특히 남자가 여자를 가해한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1부는 제이미의 체포와 조사 과정을 낱낱이 다룬다. 어느 날 새벽, 밀러 집에 중무장한 경찰들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강제로 현관을 부수고 들어와 총을 겨눈 채 이 집 아들 제이미를 체포한다. 갑작스러운 경찰의 난입에 이들 가족은 너무 놀란다. 제이미 역시 너무 놀란 탓에 바지에 쉬를 하고 만다. 경찰서에 연행된 제이미는 경찰에게 신문을 받지만, 자기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체포와 연행이라는 긴박한 상황이 지나가면 경찰서에서 경찰이 피의자를 대하는 매뉴얼이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피의자의 권리, 변호사 선임, 미성년자일 경우 부모 중 누구를 보호자로 지정할 것인지, 어떻게 참관하는지 등을 빠짐없이 보여준다. 제이미가 엄마 대신 아빠를 보호자로 지정하는 것은 의미 있는 부분이다. 카메라는 단 한 번의 커트도 없이 핸드헬드 카메라로 찍는 듯 마구 움직이며 경찰서 이방 저 방을 따라다닌다. 화면이 수시로 흔들리며 산만한 느낌을 주지만 긴박하고 생생한 현장감을 전한다.
2부의 배경은 제이미가 다니는 학교다. 그곳에 수사를 담당한 루크 배스컴 경위와 미샤 프랭크 경사가 나타난다. 그들에겐 동영상이라는 명확한 살인 증거가 있지만 살인 동기와 살인 도구를 찾아야 한다. 학교를 찾은 것도 이를 위해서다. 재미있는 것은 루크 경위의 아들 아마리도 이 학교 학생으로 왕따를 당하고 있어 학교에 가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루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학교는 말 그대로 엉망이다. 경사 미샤는 학교는 왜 꼭 이렇게 매스꺼운 냄새가 나는지 모르겠다며 역겨워한다. 교사는 교사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엉망진창이다. 통제 불능의 이곳이 과연 배움터인지, 제대로 교육이 가능할지 의아심이 들 정도다. 루크는 원래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미샤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이는 축복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느낌을 준다. 루크와 파트너가 교실을 돌아다니며 살인 동기와 흉기를 찾아내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마리는 이런 아빠의 모습을 보다 못해 조용한 곳에서 잠깐 대화하기를 원한다.
아들과의 대화에서 나타난 루크 세대의 경찰이 갖고 있는 사건에 대한 인식은 현대의 청소년이 벌이는 사건 방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루크는 아들의 말을 듣고 자기가 잘못되었음을 크게 깨닫는다. 하나는 사건의 본질과는 무관한 곳에서 헤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과 사이가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3부는 제이미가 수용된 보조 훈련 센터에서 이루어진다. 임상 상담사 에린 도허티와 제이미의 상담 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개된다.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제이미는 여러 상담사에게 상담받아 왔고 이들의 상담 기록은 판사에게 제출되어 제이미의 판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상담사 에린은 젊고 예쁜 여성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에린은 제이미가 좋아하는 핫초코를 준비할 정도로 제이미를 잘 알고 있으며 제이미 역시 에린을 잘 따른다.
3부의 상담 과정에서 살인 동기랄까, 드라마의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즉 <소년의 시간>은 청소년의 성 문제, 인스타 문제,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 등을 다루며, 그 기저에는 왜곡된 남성성이 있다.
제이미가 살인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는 형사 루크는 제이미의 살인 동기를 밝히려고 한다. 루크의 수사 방식은 고전적이다. 청소년이 흔히 저지를 수 있는 마약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여 하수구를 뒤진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인 방식으로는 살인 동기를 밝히기가 쉽지 않다. 그때 도움을 주는 이가 루크의 아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제이미와 아빠와의 관계와 루크와 아들과의 관계가 중첩된다는 점이다. 근육질의 형사 아빠와 아들, 제이미와 언제 분노가 폭발할지 몰라 은근히 긴장감을 조성하는 아빠 에디의 설정은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주제, 남성성을 강조한다. 루크는 뒤늦게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아들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드라마의 제목, Adolescence는 소년보다 청년기 즉 사춘기에 더 가깝다. 성에 대한 관심이 가장 고조되는 이 시기에 남녀공학의 학생들은 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다양한 관계 맺고 예민한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학교에는 당연히 인기 있는 아이들이 있다. 드라마에서 말하는 80대 20이란 것이 있다. 80%의 여자애들이 20%의 남자애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남자애 중 80%는 여자에게 인기가 없고 여자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것이기보다 예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복잡한 심리와 밀접한 남녀 관계에 더하여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문제가 더욱 구조화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SNS다. 드라마는 요즘 대세인 SNS는 어떤 점에서는 유용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부정적 파급효과가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간에게 성(sex)은 중요하다. 더구나 사춘기에 성의 관심은 증폭된다. 에린은 제이미가 생각하는 ‘남성’(masculin)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 한다. 제이미에게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달라고 한다. 남성은 강한 존재로서 여성을 지배하는가? 상담사는 제이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해 질문한다. 술집을 출입하고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 남자인가? 그의 아빠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제이미는 분명 아빠의 영향권에 있다. 아빠가 자신을 데리고 축구장에 갔지만 자기의 형편없는 축구 실력에 실망했다는 것도 잘 안다. 제이미는 아빠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지만, 남자로서 잘하는 게 없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아빠는 남자의 모델로서 아빠가 생각하는 남성성에 이르려는 욕망이 강하지만 아빠를 실망하게 했다는 자괴감에 빠져있다.
에린은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은지, 여자 친구가 있다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등을 질문한다. 그녀의 집요한 질문에 제이미는 자신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말한다. 남자답지 못함은 여자와 사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여자 친구가 없으면 섹스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에린이 묻는다. “여자들이 너한테 끌리는 것 같니?” 그러자 제이미는 자기는 못생겼다고 대답한다. 사춘기 소년에게 자기는 못생겼다는 생각, 여자 친구도 없을뿐더러 여자와 섹스도 못할 남자라는 생각은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갈 위험이 있다.
현실에서 왕따인 제이미는 인스타그램에 빠져있다. 인스타는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다. 그런데 그의 인스타에 케이티가 댓글을 단다. 보통 댓글은 관심의 표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케이티의 댓글은 제이미를 놀리기 위한 것이다. 케이티는 강낭콩, 진실 그룹, 인셀 등으로 제이미를 괴롭힌다. 그런데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케이티의 벗은 상반신 사진이 남학생들 사이에 유출된 것이다. 앞서 말한 몸캠의 희생자가 된 셈이다. 놀랍게도 사진이 돌고 난 후 제이미는 케이티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케이티가 충격을 받아 약해졌을 수 있고 혹시 자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소위 “약해서 더 얻기 쉽다는 이론”에 이른다. 이는 남자로서 자신감이 없을 때 생겨나는 심리다. 제이미는 케이티에게 함께 유원지를 가자고 제안하지만, 거절당하고 인스타에서 문제의 이모티콘으로 인셀이라고 놀린다. 제이미는 상실감과 수치심이 상당했을 것이다.
살인 사건이 있던 날 제이미는 친구가 준 칼을 들고 케이티에게 따지러 간다. 상담 과정에서 제이미가 그때 케이티를 만난 건 사실이고 칼을 가져갔지만, 그냥 겁을 주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고 말한다. 사실일 것이다. 칼은 남성성의 상징이다. 왕따의 이들은 칼을 든 위협적인 행동으로 폭력적인 남성성을 과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케이티의 단호한 태도에 화가 치민 제이미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칼을 휘두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인스타에서 나를 괴롭혔어요. 매일 저를 조롱했어요. 처음엔 그냥 겁만 주려고 칼을 가져갔는데….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어요.”
제이미가 감정 조절에 얼마나 취약한지 상담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제이미는 상담 과정에서 두 번에 걸쳐 크게 화를 낸다. 한 번은 에린이 자리에 앉으라고 하자 자신을 통제하지 말라고 하면서 분노를 표출한다. 그는 소리친다. “앉으라고 하지 마. 날 통제하지 못해.” 명령과 통제에 대한 분노는 친구들에게 당한 따돌림과 인스타에서의 놀림감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또 한 번은 상담이 끝날 무렵이다. 오늘이 상담의 마지막 회기라고 말하자 그는 화를 내며 큰 소리로 “날 좋아하세요?”라고 말한다. 젊은 여성 에린이 좋아한다고 말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자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누군가 특히 여자가 자기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강한 기대감이 있고 이것이 실현되지 못했을 때 화를 참지 못한다.
경관에게 끌려 나가면서 제이미는 “아빠에게 괜찮다고 말해 줘요.”라고 말한다. 이 역시 그가 알게 모르게 아빠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제이미가 소리를 지르며 끌려 나간 후 혼자 남은 에린은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제이미에 대한 안쓰러움이 있었을까? 제이미가 살인범이라는 것을 확신했을까?
4부는 다시 제이미의 가족이다. 사건이 일어난 후 1년이 지났고 에디의 생일날이다. 아내와 딸은 남편이자 아빠인 에디의 생일을 축하한다. 하지만 그들 가족의 삶은 제이미의 사건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 에디의 차에 ‘강간범’이라고 낙서하는 등 가족은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그들 각자는 제이미에 대한 까닭 모를 죄책감도 있다.
가족은 한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가족의 상황에 의해 아이는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드라마는 제이미의 빈방에서 아들을 생각하며 오열하는 아버지 에디를 비추면서 끝이 난다. 과연 에디는 어떤 사람이며, 그의 가족은 어떤 가족인가. 어쩌다가 아들이 살인자가 되는 가정이 되었는가? 흔히들 문제의 가정에 문제아가 있다고 한다. 문제아에게는 십중팔구 문제의 부모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제이미의 가족은 평범하다. 에디는 욱하는 성질은 있지만 식구에게 폭력을 가한 적은 없다. 그는 아내와 사이가 좋고 아이들에게도 자상한 편이다. 또 제이미의 누나도 착하다. 이러한 가정에서 자란 제이미, 겉보기에 여린 모습을 지닌 제이미가 그러한 무서운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몇 가지 근본적인 궁금증을 던진다. 하나는 제이미는 왜 살인했을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이미는 왜 살인을 부인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드라마를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제이미는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하는 의문은 3부의 상담 과정에서 밝혀진다. 둘째, 왜 살인을 부인하는가? 제이미는 살인을 완강하게 부인한다. 그의 가족은 그의 말을 믿는다. 그런데 CCTV에 찍힌 명백한 증거가 있다. 그 영상을 보는 순간 아빠는 믿을 수밖에 없어 절망에 빠진다. 그런데도 제이미는 상담사에게 영상 속 인물은 자신이 아니며, 영상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고 반박한다. 제이미는 정신적으로 이상 증세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는 제법 성적도 좋고 일반 학생들과 다를 바 없다. 특별히 문제 행동을 하거나 거짓말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살인을 저지른 것을 잘 알고서도 안 한 척한다고 하기에도 미심쩍다.
이렇게 가정할 수 있다. 제이미는 자기가 살인자라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므로 이를 부인하는 것인가. 또는 그가 분노 조절이 약하다는 점에서 살인의 순간이 기억에서 사라진 것인가. 또는 현실이 아닌 온라인에서 생겨난 일이라고 믿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철저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드라마의 전체적인 흐름으로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계속해서 전문 상담사들을 투입하여 상담하는 것을 보면 그의 심리가 과연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가 수용된 곳이 정신병 환자들이 있는 곳이라는 것은 이 점에서 의의가 있다.
1년이 지난 4부에서 제이미는 아빠와 통화를 한다. 이 통화는 모든 가족이 듣고 있다. 제이미는 통화하는 가운데 살인을 인정하겠다고 말한다. 이 말을 하기까지 1년이 걸렸다. 그만큼 인정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왜 살인을 부인하는지 정확하게 제시되지는 않는다. 위의 가정 중의 하나일 수 있다. 다만 제이미는 심리적으로 연약한 편이며 열등의식이 크고 내부에 왜곡된 남성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조심스럽게 추리해 보자면 제이미가 거짓말을 한다기보다 당시 감정이 폭발한 극적 순간이 기억에서 지워졌을 수 있다. 극한 상황에서 기억이 지워지거나 단절되는 해리성 기억상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 드라마는 1부에서 제이미가 범인이라는 것을 밝혀준다. 그가 범인이냐 아니냐의 진실 탐구가 아니다. 문제는 왜 평범한 13세 소년이 살인자가 되어야 했는가이다. 드라마는 현대 사회, 구체적으로 학교 내에서 청소년들이 직면한 위험들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SNS를 통한 온라인상의 괴롭힘과 따돌림은 부모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과거에는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아이의 보호막이 되었지만 이젠 자기 방에 혼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부모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물론 드라마에서 가정,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아버지 에드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며 성장한 과거가 있다. 그는 자기가 아빠가 되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실제로 그는 아내나 자녀에게 폭력을 가한 적이 없다. 화가 나면 물건이나 창고를 부수기는 해도 가족을 때린 적도 없다. 그는 가족을 사랑한다.
제이미의 인격 형성은 가족과 무관할 수 없다. 특히 남성성에 있어 아버지의 모델은 결정적인 요소다. 에디는 근육질이고 욱하는 성질이 있으며 폭력성이 잠재해 있고 스포츠도 좋아한다. 소위 남자답다. 그러나 제이미 자신은 남자다운 아버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제이미가 보호자로 엄마가 아닌 아빠를 선정했다는 것은 이런 부분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이번 사건이 혹시 자기가 남자다운 행동을 보여준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 아빠라면 조금은 이해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을지도 모른다. 영국 축구의 훌리건주의처럼 폭력성이 곧 남성적이라는 왜곡된 인식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제이미의 폭력성을 에디의 폭력성과 연결된다.
영화 <빌리 엘리엇>(Billy Elliot, 2000)는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다. 역시 영국이 배경이 이 영화에서도 남자는 축구나 권투 등 거친 스포츠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충만해 있다. 주인공인 남자아이 빌리는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권투를 배우지만 영 소질이 없다. 대신 그는 여자가 배우는 발레에 흥미를 느낀다. 이는 남자로서 부끄러운 짓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주인공이 훌리건식 전통적인 남성성에 도전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제이미가 빌리처럼, 뭔지도 모르는 남성성을 과시하기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였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지 모른다.
현대에 범람하고 있는 SNS를 통한 소통은 분명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과연 그 역기능을 어떻게 차단할 수 있을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주어진 숙제다. 온라인 세상은 N번방 사건, 온라인상 성착취, 리벤저 포르노 등 다양한 문제를 양산한다. 그렇다고 아이 방문을 열어 놓도록 하거나 24시간 감시할 수도 없다. 아이들의 세계는 무한히 멀어지는데 어른들은 여전히 제자리걸음 하고 있다. 제이미의 가족은 결손 가족이 아니다. 가족 관계도 무난하고 재정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평범한 가족이다. 문제 아이는 문제의 부모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소년의 시간>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빠는 제이미의 빈방에 들어가 그의 곰 인형을 침대에 눕히고 오열한다.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 대부분은 이러한 상황이다. 부모의 힘만으로는 아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과거에는 부모의 교육으로 충분했을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네트워크가 발달한 현대는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이제 아이는 한 마을을 넘어 사회 전체가 키워야 한다. <소년의 시간>은 현대에 들어와 청소년의 문제를 가족, 학교, 사회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