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간은 드라마를 만든다. 삶은 한 편의 드라마인 것이다. 다만 드라마는 인간의 이야기 가운데 좀 더 극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상은 극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일상 중 흥미진진하거나,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 극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폭싹 속았수다>는 애순이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그녀의 일대기를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그녀가 겪는 사건들은 어떻게 보면 정말로 극적일까 하고 의아심이 갈 정도다. 여자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가난으로 고생하다가 결혼하고 자식 낳고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이 그렇게 드라마틱하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구나 그렇게 비슷한 모습으로 살지 않은가?
드라마는 애순이가 10살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을 그린다. 1960년부터 이어온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제주도에 사는 주인공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가 이 드라마의 골자다. 굳이 극적인 것이 무엇인지 찾을 필요도 없다. 잔잔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 드라마는 삶이란 그런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우리에게도 과연 우리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삶이란 무엇인지 되새김질하도록 한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폭싹 속았수다>는 가위 혁명적이다. 드라마는 평화롭고 은은하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그 내면을 관통하는 주제는 한국 사회에 송곳 같은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남존여비의 전복
<폭싹 속았수다>는 여성 드라마다. 한 마디로 현대판 <여자의 일생>이다. <정년이>처럼 여성의 삶을, 대를 이은 여성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여자의 일생은 남편을 뒤치다꺼리하고 시댁 가족을 부양하고 뼈 빠지게 일하면서 끈덕지게 살아남는 여자의 모습이 아니다. 이 드라마에서 여성들은 할말 하다고 똑 부러지고 억척스럽다. 절대로 기죽지 않고 남자에게도 당당하다. 오히려 남자가 떠받들도록 한다. 대를 이은 여자들의 삶은 제주도라는 특수한 환경이라서 가능할 수도 있겠다. 아름다운 화산섬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자 한때 가장 인기 있는 신혼여행지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제주도를 굽어다 보면 할말을 잃는다. 과거의 한반도에서 민초로 산다는 것은 지배계급의 등살에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며 연명할 정도였지만, 더 심한 곳이 제주도였다. 여자, 바람, 돌이 많기로 유명하여 삼다도로 불린 제주도의 환경 덕택에 이러한 여성 캐릭터가 가능한 것일까. 여하튼 <폭싹 속았수다>는 혁명적이다.
첫째로 혁명적이랄 수 있는 것은 남녀에 관한 문제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는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다. 조선시대에 걸쳐 내려온 전통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겠는가. 한국전쟁 중에 태어난 애순이의 성장기 시절에도 남녀의 차별은 심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광례, 애순, 금명의 대를 잇는 여성 주인공(들)은 이러한 차별에 정면으로 맞선다. 드라마는 애순과 그녀의 딸 금명이를 동일한 배우가 연기한다는 점도 파격적이다. 애순과 금명을 동일한 배우가 연기한다는 점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시청자는 동일한 배우가 어머니와 딸을 연기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애순이 곧 금명이며 금명이 곧 애순이라는 등식에 토를 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등식을 대입하면 문학소녀이자 시를 쓰는 애순이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 된다. 이처럼 <폭싹 속았수다>는 남성 중심의 혈연 대신 여성 중심의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좀 더 살펴보자.
드라마 곳곳에는 여성 비하, 남성 우월의 장면들이 존재한다. 애순의 작은아버지는 할머니의 제사를 지낼 사람은 자기 아들 종구라면서 애순과 차별하도록 종용한다. 국민학교 시절 애순은 반장 선거에서 부잣집 아들에게 이기고도 진다.
애순의 남자, 무쇠로 불리는 관식이는 철저하게 애순만을 위해 사는 남자다. 이 드라마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관식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는 데 있다. 무쇠 남자는 아마도 모든 여자가 바라는 캐릭터일 것이다. 평생 한 여자만 바라보고 사는 남자, 관식은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결혼한 후에도 부모의 며느리로 고생할까 봐 애순의 철저한 바람막이가 된다. 매우 의미 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관식의 집에서는 밥상이 두 개다. 하나는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관식이가 밥을 먹는 밥상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와 애순이 그리고 딸 금명이가 먹는 밥상이다. 그런데 어느 날 관식이는 밥그릇을 들고 애순의 밥상으로 자리를 옮긴다. 과거에 남녀의 차별이 심했을 때 두 개의 밥상은 흔한 것이었다. 아랫목의 밥상은 어른들 혹은 남자들 차지였고 윗목의 밥상은 여자들이나 아이들 몫이었다. 그런데 관식이는 단번에 이 전통을 깨트려 버린다. 그가 밥그릇을 들고 밥상 옮기기는 행동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애순이과 관식이 사이에 세 명의 아이가 있다. 순서에 따라 이름이 금 은 동으로 이루어진 것도 재밌다. 이들 중 동명이를 사고로 잃고 큰 딸 금명이와 아들 은명이가 남는다. 당시 대부분 집이라면 아들 은명이를 더욱 애지중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은 그렇지 않다. 누나와 차별받는다고 느낀 은명이는 저항심이 크다. 보통은 딸이 아들에게 차별감을 느끼지만 이 집은 정반대다.
부자는 행복한가?
부와 가난의 문제는 <폭싹 속았수다>의 두 번째 혁명적인 요소다. 드라마는 빈부의 문제를 직접 다룬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부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가난뱅이가 되는 그러한 문제가 아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치면 애순이와 관식 부부를 당할 사람이 없다. 드라마에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존재한다. 이들의 갈등은 드라마를 이끌고 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삶의 행복도는 가진 것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돈이 다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애순이와 선을 본 남자 상길과 관식을 비교해 보자. 이 둘의 삶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 다만 상길은 부자고 관식은 가난하다. 하지만 두 남자 중 누구를 택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시청자는 당연히 관식을 택할 것이다.
또 다른 예로, 금명이는 대학 시절 정부에서 금지한 과외를 한다. 부잣집 학생의 어머니는 금명에게 대리 시험을 부탁한다. 그러나 금명은 이를 단칼에 거절한다. 그녀가 거액을 거절할 힘은 부모의 교육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대리 시험자를 물색하여 딸의 대리 시험을 치르게 했던 부잣집 사모님은 들통이 나 철장 신세가 된다. 시청자에게 이들 가족과 금명의 가족 중 누구를 택하겠냐고 하면 당연히 금명의 가족을 택할 것이다.
금명이의 남자 영범과 충섭을 비교해도 좋을 것이다. 성장한 금명이는 영범이와 열렬한 사랑을 한다. 첫 남자 영범이는 성격도 좋고 학벌도 좋고 집도 부자다. 다만 그의 어머니는 며느리는 남편과 시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시부모상을 지니고 있다. 영범은 금명이를 매우 사랑하지만, 어머니와 금명이 둘 다에게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많은 한국 남자가 찔렸을 것이다. 충섭이는 그렇다 치고 관식이처럼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드러내놓고 아내 편을 드는 남자는 몇이나 될까? 금명이는 영범이를 너무 사랑하지만, 영범이와 그의 어머니 태도에 결혼 직전에 파혼한다. 당시의 사회상으로는 가히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사건이다. 대부분은 서울대 법대 출신의 부잣집 며느리가 미술 강사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드라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인물들이 부를 추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난하면 불편하다. 자식이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사 주지 못하면 마음이 아프다. 생활에도 여러 불편함이 있다. 이들은 돈이 없어 배를 팔아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기도 한다. 이들은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고 노력한다. 그 덕분에 드라마 종말에서 이들은 어느 정도 가난에서 벗어난다.
입체적인 플롯
<폭싹 속았수다>의 플롯은 특이하다. 보통의 드라마는 시간의 흐름이 일정한 선형적인 줄거리를 제시한다. 그것이 줄거리를 편하게 이해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라마는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마구 이동한다. 그리고 시대를 알려주는 다양한 장치들 가령 뉴스, 대중음악 그리고 친절하게 날짜를 제시하여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한다. 이따금 사건을 매듭짓지 않고 한참이나 이야기를 전개한 뒤 과거로 되돌아가 그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플롯은 광례, 애순, 금명으로 이어지는 여성의 연대기가 단선적일 수 있는 위험에서 벗어나 입체적으로 제시하는 효과가 있다. 이야기가 입체적이라는 것은 이야기의 은유성이 풍부해져 시청자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한다는 점에서 몰입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여기에 더하여 금명이의 해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마치 시구를 낭독하는 듯한 해설자 아이유의 소리는 감정이 배제된 차분한 목소리다. 객관성을 지니는 것이 해설의 특징일 수 있겠지만, 자신 혹은 가족을 말할 때 정서 이입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건조한 해설자의 목소리는 자기와 가족의 삶을 주관적인 시각이 아닌 거리를 둔 상태에서 바라보겠다는 의미다. 그 거리는 곧 시청자의 거리가 된다. 사건에 따라 웃고 울던 시청자는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게 되고 좀 더 냉정하게 드라마의 줄거리를 따라가게 된다. 거리두기는 시청자에게 드라마에 온전히 몰입하는 대신 드라마 속 인물에 빗대어 자신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저들 인물에 비해 나는 어떠한가? 엄마로서 아빠로서 딸로서 아들로서 나는 어떠한가? 등을 생각하도록 한다.
가족의 죄책감
산다는 것은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뜻이다. 그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이 곧 드라마가 된다. 그래서 인간은 드라마를 만든다는 말이 생겨난다. 살면서 고통스러운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항시 우리 곁에는 그런 일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기회만 다면 기어코 가슴에 못 박을 일을 만들어 내고야 만다. 입에 풀칠도 하지 못할 위기에 처했던 주인공 부부는 애순이 친할머니의 도움으로 배도 사고 집도 장만한다. 이제부터는 좋은 일들만 생길 것 같다. 아이도 셋이나 된다. 태풍이 몰아치던 날 사건이 터진다. 일이 벌어지려면 모든 것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결국 애순 부부는 막내 동명이를 잃고 만다. 자식의 죽음은 가슴에 묻는다는 친할머니 말처럼 그 사건은 이들 가족에서 가혹한 슬픔을 안긴다. 인간은 뭔가가 잘못되면 그것이 자기 책임인 양 죄책감을 느낀다. 금명이는 자기가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은명이는 자기가 동생을 놔두고 나갔기 때문에 동생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애순이는 말할 것도 없다. 안아달라는 아이를 모르는 체하고 밖으로 뛰어나가지 않았던가. 관식이도 그때 둑을 쌓으려고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자책한다. 이렇듯 이들 가족은 참으로 오랫동안 각자의 죄책감에 시달린다.
우리는 가슴 한쪽에 이러한 종류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죄책감은 풀어내지 못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폭싹 속았수다>에서처럼 각자의 죄책감은 삶을 무겁게 한다. 드라마에서도 각자는 마음에 죄책감을 새기고 살아가는데, 냉정하게 그것 역시 삶의 일부분이다. 가족 안에서 생겨난 죄책감은 서로가 보듬고 이해하고 등을 어루만질 때 비로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 드라마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해야 가정이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행복은 가정 안에 있다. 가족이 똘똘 뭉치면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 가족을 사랑한다면,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면 그의 삶은 성공한 것이다. 자신보다는 애순이를, 가족을 우선시했던 관식은 일찍 죽음을 맞이했지만, 가족과의 관계를 보면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폭싹 속았수다>는 가난한 한국, 사회정치적으로 다사다난했던 한국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다. 인물들은 그들이 몸담은 정치나 경제의 흐름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이러한 환경에서 어떻게 해서 살아남는지도 보여준다. 따라서 한국사를 뼛속 깊이 체험한 한국인에게 드라마의 정서는 더욱 깊이 있게 와 닿는다.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다음의 질문을 할 수 있다. 문화권이 다른 국가에서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말한 혁명적인 요소와 관련이 있다. 한국의 MZ 세대도 그렇고 외국인도 그렇다. 인간의 삶에서 남녀의 차별은 꽤 보편적인 현상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지금도 여전하다. 그런데 남녀 차별이 엄연한 전통적인 배경에서 인물들이 보여준 강인한 여성 캐릭터는 한국의 전통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요즘 젊은 세대나 외국 시청자에게 강하게 어필했을 것이다. 가부장 제도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들이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드라마 속 여성은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죽은 듯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던 여성과는 전혀 다르다. 저자세의 여성이 아닌 한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도록 권한다는 점에서 다양한 문화권의 여성에게 굉장한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결국 남성과 비교되는 여성의 삶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여성의 삶을 당당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현대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