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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집 막내아들>

드라마

by 인산

한국 사회에서 재벌 기업은 양날의 칼이다. 재벌 기업은 분명 국가 경제에 이로운 측면이 있으나, 한편으로 막강한 돈의 힘으로 사회적·정치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 자본주의로 칭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돈이다. 돈이 신이나 인간보다 우위에 있고 돈이면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이다. 중세기의 신 중심과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 사상이 있었지만, 이제는 신도 인간도 아닌 돈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그래서 부자 중 부자인 재벌은 돈으로 사회를 쥐고 흔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자본주의 시대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재벌 가문에서 발생하는 권력 투쟁 즉 부자간의 갈등, 형제간 다툼, 결혼과 이혼 등은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드라마 <재벌 집 막내아들>은 소재부터 이미 시청률을 먹고 들어간 셈이다. 여기에 더하여 재벌의 시선에서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채 희생물이 되어 버린 한 직원이 환생하여 재벌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짜릿한 복수를 한다는 줄거리는 그 자체로 연출이나 출연진, 연기 등의 수준을 구태여 따지지 않더라도 높은 시청률을 예감하게 한다.


엄청난 부의 상속이 가족으로 이어지는 한국 재벌의 특성상 권력 투쟁은 가족 간에 종종 일어난다. 재벌 가족 간의 처절한 투쟁, 이것은 드라마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종종 있는 사건이다. 기업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자식들 간의 싸움, 형제의 난은 한국의 재벌가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사실 이는 인간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고야의 그림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가 있다. 로마 신화에서 사투르누스로 불리는 크로노스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의 아버지다. 크로노스는 자식들이 자신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잡아먹지만, 살아난 제우스가 아버지를 제압함으로써 신들의 왕이라는 지위에 오른다. 프로이트가 언급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또한 아버지와 아들 간의 갈등의 산물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밟고 넘어설 때 비로소 권력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본능적인 질서에 가깝다. 프레이저의 저서 <황금가지>에서도 권력의 승계는 전 권력자를 죽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최고의 권력자는 자신을 죽이러 오는 새로운 권력자를 사전에 알아내어 없애지 않으면 자기가 죽기 때문에 항상 감시의 눈초리를 풀지 않는다. 이렇듯 인간에게 권력 승계는 앞사람을 밟고 지나가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재벌 집 막내아들>은 재벌가를 그리면서 돈이라는 주제와 가족 간의 권력 투쟁이라는 현대인이 가장 관심을 두는 이중의 소재를 다루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돈을 쟁취하기 위해 가족마저 제거하는 모습, 죽은 사람이 재벌가의 혈통으로 환생한 판타지, 한국인이 중요시하는 혈통의 문제, 복수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냈다. 이 드라마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드라마는 철저히 남성 중심의 드라마다. 그리스 신화처럼 남성 위주의 사회체제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남자들 사이의 권력 다툼을 그린다. <정년이>나 <폭싹 속았수다>가 여성 중심 드라마인 것과는 정반대의 감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현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는 한국 전통의 잔재를 보여준다. 즉 재벌, 돈, 남자라는 등식이 잘 드러나는 드라마다.


둘째, 남성적 체계는 곧 혈통 중심의 전통을 보여준다. 세 아들과 딸이 있는 순양 그룹의 회장 진양철은 큰아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의 막내아들은 배다른 아들로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재벌가의 숨 막히는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일찌감치 거리를 둔다. 죽었다가 환생한 윤현우는 그 집의 둘째 아들 진도준으로 태어난다. 그는 혈통적으로 창업주의 손주지만 순서로는 기업을 물려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에 진도준은 순양 그룹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사겠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곧 윤현우의 복수이기도 하다. 죽었다가 환생한 윤현우, 진도준은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이 있는 까닭에 이를 이용하여 한 단계씩 순양 그룹을 손아귀에 넣는다. 물론 그럴 때마다 순양 일가의 세력들이 방해물이 되어 그의 앞길을 막아서지만, 진도준은 이미 살아본 경험으로 어려운 과제를 하나씩 풀어나간다. 그가 방해물을 넘는다는 것은 그룹 인수에 한 발씩 다가간다는 의미이자 복수 성공의 의미이기도 하다. 시청자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순양 그룹 인수에 다가서는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셋째, 이 드라마에서 커다란 이슈 중 하나는 죽은 사람이 재벌가의 혈통으로 환생한 판타지에 있다. 이런 종류의 드라마나 영화는 많다. 영혼은 그대로지만 몸이 뒤바뀌는 것이다. 가령, 여자와 남자가 뒤바뀐다든가, 부모와 자식 간에도 뒤바뀜이 일어나며 사람과 동물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 동화 <왕자와 거지>처럼 가진 자와 없는 자가 뒤바뀌기도 한다. 이처럼 영혼과 신체의 뒤바뀜은 반대편의 사람이 되어봄으로써 최대로 공감하게 된다는 것이 골자다. 이와 똑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재벌 집 막내아들>에서 죽은 자가 새롭게 환생했을 때 없는 자에서 있는 자의 몸으로, 가난한 자에서 부자로 바뀜이 이루어진다. 원래 지독히도 불우한 환경에서 가난하게 윤현우는 순양 그룹의 집사가 되어 재벌가에 머슴처럼 봉사하던 인물이다.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거절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다.” 이것이 고졸 출신인 그가 대기업에서 실장으로 승진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모토였다. 그러나 그는 재벌가에 이용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 재벌 집 손자로 다시 태어난다. “나를 죽인 가문의 핏줄로 다시 태어나다”의 카피는 이를 강조한다. 이 변신은 공감이 아닌 철저한 복수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시간상으로 이미 현재를 경험한다는 설정은 <백 투 더 픽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주식이나 로또에 목매는 사람은 잠깐이라도 미래를 다녀오고 싶다는 불가능한 욕망에 빠진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드라마는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무의식의 욕망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의 욕구를 대리만족 시켜준다. 시청자의 욕망을 터치하는 드라마는 성공의 문을 여는 지름길이다.


넷째, 일종의 막장 드라마인 <재벌 집 막내아들>은 가진 자들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가진다는 것,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준다. 이들 일가에서 가족의 정이나 사랑은 찾기 힘들다. 결혼도 순수한 만남이 아닌 정략결혼이다 보니 부부 관계도 철저하게 개인의 이익에 따른다. 한 마디로 드라마는 과연 이러한 재벌가의 삶이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모질게도 가난한 인생이지만 끈끈한 부부의 정을 보여준 <폭싹 속았수다>의 인물과는 대조적이다.


다섯째, 마지막 회기는 진도준의 죽음 이후 20년이 흘렀다. 창업주의 장남인 진영기는 의식불명의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고, 그의 아들 진성준이 회장이 되었으며, 인물들의 얼굴에는 20년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그려져 있다. 다만 진양 그룹의 비리를 밝히기 위해 손을 잡은 윤현우와 서검사의 얼굴은 왠지 시간을 비켜서 있다. 요즘 사람들은 얼굴만 가지고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여전한 얼굴은 다른 인물들과 차이가 크다. 윤현우는 서검사가 진도준의 연인이었던 과거를 잘 알고 있지만 서검사에게 윤현우는 그저 수사를 위해 도움을 주는 인물일 뿐이다. 그런데 그녀는 옷이 잘 어울린다는 윤현우의 말에서 묘하게도 진도준의 잔상을 느낀다. 그리하여 이들 사이에 잠깐 스쳐 가는 미묘한 느낌이 강조된다.


여섯째,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인가. 어지럽게 펼쳐놓은 드라마를 과연 어떤 식으로 마무리할 것인가. 이는 시청자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진도준이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자신과 할아버지를 죽이려는 사실을 미리 알고 대비한 것처럼, 미래를 보는 투시경으로 자기 죽음을 막고 약속대로 기업을 인수하는 것으로 마감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식의 결말을 끌어낼 것인가. 그런데 진도준이 순양을 인수하는 원작과는 달리, 진도준을 죽이고 윤현우를 전면에 내세워 꼬리를 물 듯 첫 회에서 이어지는 에피소드를 받아 마지막을 장식하는 결말을 보여준다. 그것은 과정이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혈통이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을 탈선하게 한다는 점에서 윤현우의 복수는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윤현우의 폭로로 진씨 일가는 순양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고 순양은 전문 기업인이 운영하게 되었으며, 윤현우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드라마는 개처럼 재벌가에 봉사했던 윤현우가 또 다른 자신이었던 진도준과 마주하면서 양심을 되살려내는 것을 보여준다. 드라마는 밑바닥 인생을 살던 한 개인이 그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던 양심을 되찾는 멀고 먼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양심을 되찾은 윤현우는 진도준의 죽음에 본의 아니게 관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의 감정이 떠오른다. 그것은 참회의 감정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후회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후회한다는 것은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면 역시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말한다. 가난에 치를 떨고 돈에 길들여진 윤현우가 과거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면 역시 진도준의 죽음에 일조할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진정한 참회는 후회라는 감정에 사로잡힌 채 우울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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