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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호 May 05. 2021

로렌조 마토티의 사인

내가 사랑한 것들 15

15. 로렌조 마토티의 사인     


우리는 왜 누군가의 사인을 받고 싶어 하는가?     


얼마 전 우연히 김태권 작가와 처음으로 저녁을 같이 할 자리가 생겼다. 김 작가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로 잘 알려진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다. 2003년에 1권이 나왔을 때부터 좋아한 작가였다. 그 자리에 동석한 다른 분이 책을 가져와 사인을 받는데 아차 했다. 나는 왜 책을 가져올 생각을 못 했단 말인가? 김 작가는 만화가라 그런지 단순한 서명이 아니라 그림 같은 무늬가 있는 사인을 해주었다. 책을 챙겨오지 못한 나의 불찰을 탓하다가 문득 잊고 있던 로렌조 마토티의 사인이 떠올랐다.      


2018년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간 길이었다.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축제로 애니메이션계에서는 가장 인정받는 영화제 중 하나이다.     


안시

 

때는 6월이라 안시는 눈이 부시게 찬란했다. 안시는 프랑스 스위스 접경에 있는 안시 호숫가에 자리잡은 도시로 프랑스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도시이다.  도시 한 가운데로 여러 갈래의 물길이 미로처럼 흐른다. 상영관들과 행사장이 호숫가와 시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자연스레 물길을 따라다니게 된다. 물길 따라 들어선 집과 가게, 레스토랑과 카페들을 구경하러 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페스티벌 기간 중 마침 로렌조 마토티의 사인회가 열린다고 했다. 로렌조는 내가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이탈리아의 만화가였다. 만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선구적인 작가 중 한 명으로, 만화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내 눈을 뜨이게 해준 작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책이 몇 권 나오지 않아 유럽과 미국에서 들렀던 도시마다 서점을 찾아가면 꼭 그의 책을 찾아보곤 했었다. 그렇게 모은 책들이 애장품이 되어 있었다.     


스티그마 (로렌조 마토티 작)


그 로렌조 마토티를 드디어 만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나는 일정 중에 시간을 만들어 자리에 갔다. 이미 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근처에 있는 서점에서 로렌조의 책을 사서 사인을 받으러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에 섰다. 나는 기다리는 걸 잘 못 하는 사람이지만 그 기다림은 나쁘지 않았다. 간만에 좋아하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것처럼 들떴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직접 만난 그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진지한 얼굴을 한 이탈리아 남자였다. 철학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그의 책 만큼이나 깊고 주름진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내가 준비해간 그의 책 표지를 쓰윽 보더니, 바로 책의 속지를 펼쳤다. 그리고 그 속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보라색 크레용을 들고 쓱쓱 그림을 그리다 어느새 초록색 크레용을 쓰더니 마지막엔 노란색을 더해 그림을 끝냈다. 천의무봉. 무심한 듯 손에서 즉흥적으로 나온 그림이었는데 그 짧은 순간 동안 그는 어떤 그림을 그릴지 생각해둔 모양이었다. 1분이 약간 넘었을 시간 동안 그는 몰입하여 그려주었다. 줄을 선 수많은 사람 각각에게 그 만큼의 시간을 들여 각각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즉흥적으로 그려준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말도 안 되게 수고로운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내색않고 그의 책에 나오는 인내심있는 캐릭터처럼 정성을 다해 그렸다.  완성된 그림은 놀랍게도 책의 스타일과 같은 스타일의 그림이었다. 만화가의 사인은 단지 이름을 적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었다. 그림을 끝내고 고개를 든 그는 웃는 얼굴로 사인받을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한 자 한 자 스펠링을 또박또박 쓰고는 자신의 서명으로 끝을 내었다. 자신의 작품을 좋아해서 찾아와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그의 한 땀 한 땀 서명속에 드러나있었다. 그는 그 모든 사소해 보이는 과정을 정성을 다해 했다. 진정한 장인의 모습이란 이런 것인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안시는 나에게 로렌조 마토티를 만나게 해 준 도시로 기억이 되었다. 찬란한 안시 호수도, 알프스의 절경도, 아름다운 물길이 있는 도심도 지나고 나니 그 기억만큼 값지지는 못했다.      


우리는 왜 사인을 받고 싶어 하는가? 그 사람이 나만을 위해 할애해준 시간, 그것이 사인이 가진 가치라고 누군가 말했다. 생각해볼수록 맞는 말이다. 그 사람이 나를 위해 써준 시간만큼 값진 건 없을 것이다. 로렌조 마토티가 나를 위해 잠깐 내어준 인생의 한 조각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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