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상호 May 17. 2021

미타카의 숲 지브리미술관 입장권

내가 사랑한 것들 18

18. 미타카의 숲 지브리 미술관 입장권     


스튜디오 지브리에 간 건 여름이었다. 마침 사츠키와 메이 자매가 토토로를 만나던 그 여름날을 생각하게 하는 싱그러운 날이었다. 우리는 도쿄 무사시노의 키치죠지역에서 내렸다. 지브리로 가는 제일 좋은 코스는 여기서 내려 이노카시라 공원을 통과해가는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여느 곳과 다름없는 정갈한 주택가와 가게를 지나니 공원이 나왔다.     

 


이노카시라 공원. 이름이 공원이지 숲이라고 해야 할 만큼 큰 공원이었다. 숲길을 걷다보니 지브리의 정식 명칭이 ‘미타카 숲의 지브리 미술관’이라고 지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리배가 있는 큰 호수를 지나고 밑둥이 한 아름 넘는 큰 나무들의 숲을 지났다. 여기만 해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에 나올 법한 원시적인 숲의 느낌이 있었다. 토토로가 우산을 쓰고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었다. 스튜디오가 이런 숲 안에 자리 잡고 있다면 언제라도 틈을 내어 쉴 수 있고, 영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십 오분 여 걸었을까? 언덕을 올라 또 한참을 가노라니 저 멀리 담장이 넝쿨로 뒤덮인 건물이 보였다. 지브리. 전 세계 애니메이션 종사자들이 동경했던 꿈의 공간이 눈 앞에 나타났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기분이 이럴까? 대학 때 ‘이웃집 토토로’를 보고 바로 미야자키의 세계에 매혹되었었다. 이어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붉은 돼지’ 등 정식 수입이 되지 않는 그의 영화들을 신비의 유적들을 찾아다니는 탐험가처럼 하나하나 발굴하는 느낌으로 찾아 보았었다. 불법으로 카피된 허접한 VHS로 씨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던 그 시절. 영화광이긴 했지만 나중에 영상에 관련된 일을 업으로 삼고 살겠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던 그 시절. 애니메이션으로도 그런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미야자키는 알려 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애니메이션엔 관한 내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건물은 작고 아기자기했다. 한 시간 간격으로 입장을 할 수 있었는데 이미 줄은 건물을 한 바퀴 돌만큼 구불구불 늘어서 있었다. 전 세계에서 성지 순례를 온 참배객들의 여러 가지 방언들이 귀에 들려 왔다. 우리도 유쾌하게 그 무리에 끼어들었다. 한참을 기다려 앙증맞은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받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입장권


밖에서 볼 때 크지 않았던 건물은 안으로 들어가자 전혀 달랐다. 키키가 마법을 부려 작은 공간을 여기저기 부풀려놓은 것 같았다. 어느 한 곳 섬세하게 장식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미야자키 작품의 강박적으로 완성도 높은 디테일적 요소가 이 건물에도 여지없이 스며들어 있었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를 미로를 헤매며 우리는 꿈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스튜디오 내부의 소극장에서 단편 영화도 보고, 옥상까지 올라가 거신병을 만나고서야 우리의 긴 성지 순례는 끝이 났다. 

 


끝이 나니 은근히 관람 피로가 쌓여 있었다. 문제는 긴 관람시간 동안 쉴 곳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기념품 가게에서 책과 포스터 등을 허둥지둥 사서 나왔다. 점심시간이라 미술관 내의 식당에서 여유 있게 밥을 먹고 쉬었다 나오고 싶었지만, 자리가 없었다. 어느새 날은 너무 더워져 있었다. 도쿄의 여름 한낮은 견디기 힘들 만큼 덥고 습하다. 미술관 내에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어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더위와 허기에 지쳐 그랬는지, 나와서 뒤돌아본 지브리 미술관은 들어갈 때와 느낌이 달라 보였다. 처음의 기대와 설렘이 잦아 들자 공간을 덮고 있던 결계가 풀리면서 잊고 있었던 현실이 머리를 파고 들었다. 여기는 더 이상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창작의 공간이 아닌 것이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한때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바글대며 창작의 영혼을 불태우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 그런 사람들은 없다. 2014년 미야자키 하야오는 은퇴를 선언하고 제작팀을 해체한다고 발표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했던 한 시대가 끝이 났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셀 애니메이션 즉 순수하게 그림을 그려 영화를 만들던 장인들의 세계가 저문 것이다.      


애니메이션 월드에서 가장 창조적인 두 회사는 단연 디즈니와 지브리일 것이다. 그중 한 세계가 몰락할 거란 걸 한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브리를 밝혀준 창조의 횃불은 영원히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디즈니는 살아남았고 지브리는 그러지 못했다. 디즈니는 뛰어난 창작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나갔다. 디즈니도 2D 애니메이션의 전성기에서 새로운 3D 시대로의 전환기에 힘겨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체질이 전혀 다른 픽사를 과감하게 품에 안아 3D 애니메이션의 선두 주자로 다시 태어났다. 지브리는 미야자키 이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나라 일본이 아니던가? 미야자키를 이어갈 수많은 주자가 있었을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 신카이 마코토 등 얼마나 쟁쟁한 후발 주자들이 있었던가? 다만 그들은 미야자키가 아니었고 지브리도 그들을 품어내지는 못했다. 대신 지브리가 택한 건 미야자키의 아들 고로였다. 미야자키의 아우라가 너무 확고해서 다음 주자들이 그 안에서 숨을 쉬지 못했을까?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외부에 있는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고로는 미야자키가 아니었다. 고로의 시대에 접어들어 지브리는 몰락을 거듭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왜 그랬는지 비판할 생각도 없고 또 나 자신 그런 자리에 있지도 못하다. 다만 안타깝고 씁쓸한 것이다. 미국처럼 시장과 자본이 풍부한 곳에서 디즈니 같은 곳이 자라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를 몇 편 만들어 본 사람으로서, 변방의 아시아에서 이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런 우리에게 지브리는 우리들의 가능성으로서 우리를 밝혀주는 횃불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 세계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스튜디오 지브리를 나오며 어느새 씁쓸한 감회에 젖어 들었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더 이상 꿈을 만드는 제작의 공간이 아니라 옛날의 꿈을 팔아 살고 있는 뮤지엄이 되어 버렸다. 돌아보면 지브리 미술관이 폐허가 된 하울의 성처럼 보일까 봐 나는 돌아보지 못했다.     




지브리가 ‘아야와 마녀’로 올해 다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는 3D 애니메이션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기획하고 아들 고로가 연출했다고 한다. 트레일러를 보고 피천득의 수필 '인연'이 생각났다. 피천득은 첫사랑 아사코를 재회한 후,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를 그는 견딜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보니 세상에는 보지 않아야 더 좋은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아야와 마녀'를 보지 않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이웃집 토토로'를 다시 보려고 한다. 사츠키와 메이가 달려가는 그 여름날, 첫사랑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해변을 질주하는 하얀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