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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호 Feb 21. 2021

오겡끼데스까?방울

내가 사랑한 것들 9

9. 오겡끼데스까? 방울


나는 죽음에 대해 방울이에게 배웠다.


방울이는 아내가 가져온 혼수였다. 짚 앞 트럭 밑에서 갓난쟁이 새끼 고양이가 울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아내가 그 새끼 냥이를 오지랍넓게 데리고 와버렸다고 한다. 가만 두었으면 나중에 엄마 고양이가 데리고 왔을 거라고 나중에 핀잔아닌 핀잔을 주었지만, 아내는 그럴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아내의 고양이가 되었던 방울이는 가난한 신접살림에 혼수로 딸려와 우리의 고양이가 되었다. 



그 똑똑하고 시크한 고양이가 이름은 어째 촌스러운 방울이가 되었을까? 처갓집에서는 예로부터 고양이는 그냥 방울이로 불렀다. 그래서 우리 방울이도 얼떨결에 방울을 달아본 적도 없는 방울이가 되어 버렸다. '파트라슈'나 '넬슨 제독'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방울이에 부합하는 쿨한 이름이 있었을 테지만, 한 번 명명된 걸 개명하기란 호적을 바꾸는 것처럼 어색해서 그냥 이름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접어 두기로 했다. 


고양이란 존재의 신비함과 아름다움, 우아함, 섬세한 균형. 그 모든 것에 대해 나는 방울이에게 배웠다. 처음 방울이를 키울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애묘 붐이 일기 전이었다. 소수의 사람들이 드러내지 않고 고양이를 키웠다. 고양이에 대한 책도 드물었다. 해외 출장이나 여행을 가서나 고양이에 대한 책을 구할 수 있었고, 사오면 집안의 귀한 장서가 되었다. 2000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온 le chats란 책이 내가 처음으로 산 고양이에 대한 책이었다. 그 외에 고양이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건 곁에 있는 방울이가 전부였다.


블랙 앤 화이트. 똑바로 가르마를 탄 균형잡힌 얼굴. 날씬하고 우아한 몸놀림. 때론 새침하고 때론 도도한 눈빛. 기분이 좋을 때 다가와서 몸을 쓰윽 비비고 지나가면 절로 신음이 날만큼 황홀했다. 당시엔 방울이가 내가 같이 지내본 유일한 고양이 반려였기에 방울이는 모든 고양이의 대표 명사였다. 뒤에 수컷 두 마리를 키워보고 나서야 방울이의 위대함을 새삼 알게 되었다. 고양이도 고양이 나름인 것이다.



한참 조연출이었을 무렵, 늦은 밤이나 새벽에 주로 퇴근을 하고 오면 방울이는 언제나 현관문앞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로 내가 오는지 아내가 오는지 방울이는 알고 있었다. 개처럼 달려와 부비고 핥지 않아서 좋았다. 신발을 벗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쓰윽 몸을 비벼주는 정도가 방울이의 애정표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좋았다. 하루의 피곤을 씻어주는 작은 위로였다. 고양이는 존재 자체가 행복이라는 걸 나는 방울이를 통해서 알았다. 방울이가 자고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해졌다. 책을 읽고 있으면 방울이는 어느새 발치에 앉아서 잠을 잤다. 그 행복한 잠을 깨우기 싫어서 책 읽기를 그만둘 수 없을 때도 있었다.  


방울이가 제일 좋아한 건 '쮸쮸'였다. 젖을 못 떼고 어미랑 헤어져서 그런지 방울이는 내 런닝셔츠나 바지를 침이 흥건하도록 빨아댔다. 그럴 때면 나는 애처로워서 젖먹이는 산모처럼 배나 허벅지를 내어준 채 녀석을 안고 있어야 했다. 생각해보면 방울이처럼 우리와 깊은 공감을 하는 고양이는 없었다. 아플 땐 옆에서 걱정해주고 깊은 밤 악몽에 깨기라도 하면 방울이는 다가와 위로를 주었다. 그렇게 십 수년을 방울이는 우리와 함께 살았다. 


어느 날 방울이가 밥과 물을 안 먹기 시작했다. 많이 늙어서 걷기도 힘들어했고 대체로 잘 움직이지 않는 나날들이긴 했었다. 그렇게 꼬박 일주일을 방울이는 식음을 전폐한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얼핏 음식을 끊고 죽음을 기다리는 고승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방울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방울이를 아끼던 장모님과 처형이 왔다. 방울이는 마치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잠긴 화장실 문을 열어 달라고 해서 열어주자 방울이는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혼자 가려는 것 같았다. 나는 도저히 혼자 가게 둘 수 없어서 따라 들어갔다. 화장실로 들어가자 마자 방울이는 몸을 눟였다. 곧바로 마지막 숨을 뱉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비린 숨냄새를 나는 처음 맡았다. 동공이 그렇게 빨리 텅비어갈 줄 몰랐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지 못한 채 아직 따뜻한 방울이의 몸을 쓰다듬었다. 이제 아프지 말고 그곳에서 행복하게 잠이 들길. 


그렇게 고결한 죽음이 있을까? 방울이의 죽음에서는 아무런 오물이 나오지 않았다. 엉덩이로 푸른 물이 아주 설핏 비쳤을 뿐 깨끗하고 정결한 죽음이 내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렇게 방울이는 우리 곁을 떠났다. 16년의 아름다운 삶이었다.


한참 후 방울이의 죽음을 생각하다, 나는 우리가 길고양이들의 자연사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로드킬당한 고양이 말고는 우리는 고양이가 죽은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그건 모든 고양이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방울이처럼 고결하게 죽어가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고결한 죽음을 나는 방울이에게 배웠다. 어째서 우리 인간은 이런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가? 



이른 새벽 또는 잠 못드는 밤. 문득 문득 방울이를 생각한다. 

방울, 그곳에서 오겡끼데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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