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AI가 빛을 발하는 영역이 있다면. 바로 ‘그림’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의외라고 생각할 법한 일이다. 나는 일찌감치 미술에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그 분야와는 아예 담을 쌓고 지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림은 내 삶과 계속 인연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AI라는 도구로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나는 종종 그림을 만든다. 몇 마디 말만 입력하면 이미지가 몇 초 만에 완성되는 과정은 말 그대로 마법 같다.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그림을 부른다’는 느낌에 가깝지만, 어쨌든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사용이 늘어나는 것에 비례하여 그 한계도 절감하고 있다.
최근 들어 나는 AI가 생각보다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며칠 전, 2026년 말의 해를 맞아 말 그림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적마(赤馬)를 그려 달라’라고 하자 그럴듯한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왔다. 유니콘도, 페가수스도 척척 그려냈다.
문제는 켈피(Kelpie)를 주문했을 때 발생했다. 화면에 나타난 결과물은 어딘가 이상했다.
‘왜 이 AI는 갑자기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걸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다가 혹시 내가 알고 있는 켈피의 이미지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싶어 자료를 찾아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AI는 틀리지 않았다.
내가 설명한 ‘하반신이 지느러미인 바다의 말 괴물’은 켈피가 아니라 히포캄푸스(Hippocampus)였다. 같은 말 형상의 괴물이라도 둘은 엄연히 달랐다. 설명을 잘못했으니 결과가 어긋나는 것은 당연했다.
몰랐다면 알고 바로잡으면 된다. 주문을 제대로 하여 다시 그림을 생성했다.
정확히 히포캄푸스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석연치 않았다. 이번에는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조차 설명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요구한 조건은 모두 충족되어 있었다. 말의 형태도 맞고, 설정한 화풍도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지 못생겼다. 색채부터 자세, 배경에 이르기까지 내가 머릿속으로 어렴풋이 그리던 ‘그 느낌’이 아니었다.
좀 더 귀엽게, 색을 밝게, 꼬리 모양은 더 둥글게. 계속 요청하여 수정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깨달았다. 이것은 지식을 넘어선 ‘감각’의 영역이었다.
나는 말의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색도 어색하다고 느꼈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말로 풀어낼 수 없었다. 나 스스로도 내가 원하는 정확한 형태를 모르기 때문이다. 감각이 없는 사람이 감각을 언어로 번역하려니, 거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나조차 모르는데 AI에게 설명할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만약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막연한 피드백 속에서도 수정을 거듭하여 조금씩 원하는 방향에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빠르고 편하게 결과물을 얻고 싶었고, 그래서 AI에게 의뢰했다. 그리고 AI는, 정확히 나의 설명 수준과 감각 수준에 맞는 그림을 내놓았다
AI는 재능을 대신해 주는 마법이 아니다. 사용자가 가진 사고와 인식을 증폭시키는 도구에 가깝다.
어떤 도구든, 아는 만큼, 느끼는 만큼만 사용할 수 있다.
AI는 분명 뛰어난 마력(馬力)과 마력(魔力)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말[馬]을 제대로 다루려면 제대로 말[言]을 걸어야 한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아닌지,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를 알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내가 만든 그림은 이상의 7~8할에 불과하지만, 현재 내 수준으로는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AI가 더 똑똑해지는 만큼, 나 역시 더 정교해져야 한다.
언젠가 AI의 말고삐를 제대로 잡을 수 있도록.
AI는 창작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을 확장하고, 상상을 가속하며, 가능성의 외연을 넓혀 준다. 결국 AI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그 힘을 쥔 사람이 어디까지 생각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훗날 나의 안목이 더 높아진다면, 그때는 내가 머릿속에 그린 그 말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