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속 나의 역할을 해부하며
20대 후반,
첫 직장에서 나는 아프리카 수단에 있었다.
발전용 디젤엔진 오버홀 작업을 위해 파견되었고,
그 낯선 땅에서 나는 처음으로 ‘개스킷’이라는 부품의 존재감을 눈앞에서 보았다.
커다란 발전 엔진이 서서히 해체되던 그날.
웅장하던 기계는 금세 나사 하나, 패킹 하나까지 바닥에 펼쳐졌고
기름과 땀에 젖은 엔지니어들이
하나하나 개스킷을 꺼내 닦고, 갈고, 조심스럽게 다시 끼웠다.
그중 어떤 개스킷은
더 이상 제 역할을 못 한다며 조용히 폐기됐다.
얇고 납작한, 작은 고무판 하나.
하지만 그게 없으면 구동계 전체는 멈출 수도 있다고 했다.
그걸 보며,
나는 문득 내 삶을 떠올렸다.
그 후로 십수 년 동안,
나는 회사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일해왔다.
본사와 지사 사이의 오해를 풀고,
빠진 보고서를 조용히 메우고,
실수도, 책임도 누군가 대신 안을 사람이 필요할 때
나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나의 이름은 회의록에 오르지 않았고,
공적은 팀 단위로 넘어갔으며,
돌아오는 건 “수고했어요”라는 짧은 말 한마디뿐이었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 일이 참 개스킷 같았다.
사이의 틈을 막고,
압력을 흡수하며,
전체가 멈추지 않도록 묵묵히 버티는 존재.
나였다.
가끔은 억울했다.
“왜 나만 이걸 해야 하지?”
“이 일의 가치는 누가 알아주지?”
그럴 때마다 떠오른 건
수단의 그날, 그 조용한 개스킷이었다.
수많은 부품들 사이에서,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던 그 부품.
조용했지만,
없으면 절대 안 되는 존재.
모두가 톱니가 되길 꿈꾼다.
힘차게 움직이며 엔진을 돌리는 중심축.
나도 그랬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틈을 막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보상은 없었지만,
나는 그 자리를 비워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 개스킷을 교체할 시간이다.
나는 고장이 아니다.
다만, 다른 구조로 조립되기 위한 사람이다.
이제는 누군가의 구동계를 지키는 부품이 아니라,
나를 위한 구조를 설계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여전히 나는 조용한 사람이고,
무언가를 메우는 데 익숙하지만,
이제는 그 힘을
내 삶의 균열을 메우는 데 쓰고 싶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 시작이 이 글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