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삶 (책생각)

삶의 클리셰에 대하여

by Yechan

좋아하는 두 작가, 유시민과 김영하의 신간이 나왔길래 주문했다.

그동안 미뤄왔던 책들도 함께 담았지만, 역시나 손이 먼저 간 건 이 두 작가의 책이었다.

읽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김영하 작가의 이전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 ‘조금 더 진하게 들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진한 에스프레소 같은 아메리카노를 기대했는데, 물이 조금 많게 느껴졌달까. (내가 뭐라고 평가를 하겠냐마는.)


하지만 이번 산문집은 달랐다.
같은 카페인데, 세월이 흘러 다시 와보니 커피 맛이 훨씬 진해진 느낌. 같은 김영하인데, 더 진하게 다가왔다.

이번엔 ‘김영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더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알쓸신잡과 여러 매체를 통해 본 김영하 작가는 따뜻하고 유머 있고, 센스 넘치면서도 강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끔 그의 눈빛에서는 무엇을 향하는지 분명하지 않은, 묘한 적개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소설에는 시니컬하고 어두운 정서가 배경처럼 깔려 있다. 그런데 이번 산문집을 통해서야 비로소, 그런 김영하라는 개인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늘 정석을 요구하는 사회에 반기를 들었고, 늘 삶의 클리셰를 부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김영하는 그동안 개인사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작가 스스로도 얘기한 것처럼 그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도 책을 통해 처음 이야기했다. 그는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했지만, 안타깝게도 부모와의 소통에는 철저히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와 그의 부모는 신기하게도 서로 전혀 다른 다른 성질의 사람이었다. 부모의 성격이 (특히 어머니가) 흥행이 중요했던 제작자 같은 성격이라면, 김영하의 성격은 예술성이 중요했던 예술가 같은 성격이었다.


인생의 끝을 예감하면서 아버지는 사후에 누가 당신을 기억해 줄까를 걱정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당신이 기대할 수 있었던 기억의 방식은 그것뿐이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대뜸 '제사도 무덤도 필요 없다'는 식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수동 공격은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내가 추던 기대와 실망의 왈츠는 그때 비로소 끝이 났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부모를 ‘부모’라는 틀 안에 가둔다. 그리고 많은 부모들 역시 그 틀 안에 머물기를 원한다. 이 방식이 맞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분명 있기 때문에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수많은 이들에게 이 전통적인 한국적 가족 관계 방식이 디폴트값으로 요구되는 것은 때로 폭력적일 수 있다.

작가의 어머니가 병원에서 “내 아들이 유명 작가”라며 이득을 보려 할 때, 작가는 과감히 ‘부모 공경’이라는 클리셰를 버린다. 클리셰란 보통 안전한 선택지로 여겨지지만,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고 싶을 때부터는 진부하고 때로는 멍청하기까지 하다.


작가의 아버지는 “내가 죽고 나서는 제사도 무덤도 필요 없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죽음에 대한 푸념과 두려움을 그런 방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물론 작가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수없이 강요받아온 클리셰들, 그리고 그 클리셰를 부수며 흩날린 감정의 파편들이 아직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기에, 작가는 그 푸념을 그저 따뜻한 시선으로만 받아줄 수는 없었다.


나 역시 부모와 다른 생각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들을 이해하려는 쪽에 더 가깝다. 하지만 부모가 여전히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에, 내가 그들을 이해했다고 해서 사건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사건은 당사자 간의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결국 미해결 사건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이런 미해결 사건은 찜찜함을 남기고 마음 한켠의 불편함을 남긴다.

물론 부모와 완벽히 소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상태에서 부모와의 일방적 소통 오류를 계속해서 감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 감정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그 속에서 불편한 감정을 분출하는 나 자신을 마주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약간의 죄책감 역시 늘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죄책감마저 느끼기 싫을 때 드는 감정은 더욱 버겁다.

아버지와 내가 추던 기대와 실망의 왈츠는 그때 비로소 끝이 났던 것 같다.

이 문장 속에서 말라 있었지만 붓에 물을 살짝 묻히면 다시 진해지는 물감처럼 서서히 말라갔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던 작가의 슬픈 감정이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기대와 실망의 연속이었을까. 끝내 끝을 선언한 작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언제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으냐'는 질문을 많이 받기 된다. 그 무렵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메이지진구 야구장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작가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었다. 내게 그런 멋진 계기 같은 건 없었다... (생략) 어떤 선배 작가나 선생님이 "너 정도면 충분히 작가가 될 수 있으니 열심히 써보라"라고 한 적도 없고...(생략) 나는 작가든 누구든 성공한 뒤에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조금씩 자기 과거를 편집하거나 윤색할 거라고 은밀히 믿고 있다. 그렇게 말하고 다니다 보면 자기 자신이 먼저 믿게 된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일과 그 성공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운명처럼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작가는 효(孝) 문화가 진리처럼 강요되던 시절 그는 그 강요를 따르지 않았다.

정년이 보장된 대학에서 안정적으로 학생을 가르치던 자리도 벗어나 뉴욕에서 2년 반을 살았다. 많은 이들이 한 번 맛 들이면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매력적인 방송 출연조차도, 작가라는 본업을 지키기 위해 《알쓸신잡 3》을 마지막으로 그만두었다. 작가가 된 데에도 특별한 드라마나 계기는 없었다. 그저 복합적인 이유들로 인해, "어쩌다 보니 작가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과도한 의미 부여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유혹적인 클리셰 중 하나다. 하지만 작가는 언제나 그런 클리셰에서 벗어나려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쳤음이 느껴진다. 분명 어떤 거대한 계기를 통해 방향이 바뀌는 사람들도 있지만, 특별한 전환점 없이 수많은 복합적인 요소들이 얽혀 지금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사실은 더 많다. 작가는 자신의 삶도 그러했다는 진실을 담담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말해준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 속에서 깨닫는다. 스스로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진실과 의미부여의 간격을 줄이는 일이라고. 진실 없는 의미 부여는 공허하고, 의미 없는 진실은 메마르다. 성장이란 결국, 이 두 가지가 끊임없이 대화하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의미 부여와 진실은 언제나 100% 같을 수 없다. 처음엔 어색하고, 때론 충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둘을 친밀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기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통해 느껴지는 작가 스스로가 삶에 부여한 의미와 진실 사이의 친밀감이 참 좋았다.


(물론 뇌피셜일 수도 있지만) 이전 산문집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용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나눠준 김영하의 용기가 참 좋았다. 책 속에서 작가는 "사람은 계속해서 변한다"라고 얘기했지만, 또 한 번 변한 작가의 글을 보며 나는 이렇게 받아들인다. 어른은 나이와 상관없이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고.


작가 나이 쉰여섯. 김영하는 또 한 번 성장했음이 느껴져 좋았고 또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나도 나이가 들어도 계속해서 이렇게 성장할 수 있을까.


내가 기꺼이 견디고자 할 고통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p.116)

그렇기에 작가가 "다가올 고통이 두렵지만, 고통만이 깊은 의미를 줄 수 있다"라고 말한 대목에서, 나는 오히려 그의 미래가 기대되었다.

김영하라는 한 개인은 앞으로 어떤 고통을 겪으며 더 깊은 의미를 찾아갈까?
그리고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고, 또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성장해 나갈까?
그 모든 것을 그는 어떤 글로, 어떤 문장으로 우리에게 건넬까?

중년의 남성에게 30대 남성이 품는 기대라고 하기엔 다소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김영하라면 이 청년의 기대를 기분 좋게 받아주지 않을까.


글을 마치며, 이 책과 같은 시기에 읽었던 유시민 작가의 《청춘의 독서》에 나오는 밀의 《자유론》 한 구절을 김영하 작가에게 헌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 속의 클리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용기 있게 하나하나 깨뜨려 나가며 ‘단 하나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인생 선배에게 진실된 감사를 표하며.


만인이 단 한 사람이나 소수의 방식에 따라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스스로 설계한 삶은 그 자체로 가장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에게 가장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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