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온실 수리 보고서 (책생각)

좋은 것이 오려져 남기를 기다리며

by Yechan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섀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마치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의 목을 조르듯 내 마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죽이며 진행되는 상실을, 걔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가르쳐주었다. 물론 동대문시장까지 밤의 자전거를 타고 오가던 계절에는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물건 버리는 일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조금 오래전에 미니멀리스트 열풍이 불기도 했었지만, 그보다 가장 간소하게 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명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다시는 입을 것 같지 않은 옷들, 다시는 읽을 것 같지 않은 책들, 그리고 다시는 쓰지 않을 것 같은 물건들을 두세 달에 한 번씩 버리는 습관을 들인다. 덕분에 가지고 있는 짐은 간소해졌고, 버릴 때 엄청 고민하다 겨우 겨우 어렵게 버린 것들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며 이 행위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도 붙었다.


하지만 이 물건 하나는 오랫동안 간직하고 버리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2002년 월드컵 이후 축구 붐이 불면서 부모님이 사주셨던 정품이 아닌 짝퉁 국가대표 유니폼이다. 사정이 넉넉지 못했던 부모님은 동대문 시장에서 짝퉁 유니폼을 사주셨고, 그때의 나는 정품을 의미하는 나이키 마킹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 몰랐을 때였다. 그 유니폼은 19번 안정환 유니폼 마킹이 되어있는데 아직도 그 유니폼을 처음 받고 무척이나 행복해했던 그날이 생각난다. 그러나 그 행복한 기억은 그 유니폼을 입고 운동장에 나갔을 때 불행하게 바뀐다. 이유는 짝퉁 유니폼에 대한 놀리는 듯한 비웃음들을 눈치채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하필이면 유니폼이 안정환 마킹인데 당시에 안정환이 너무 잘생긴 이유였을 것이라고 즐겁게 정신승리를 하고 있다. 여하튼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들로 이 유니폼은 버리지 않았다. 짜릿한 설렘을 안겨준 첫 축구 유니폼이 짧은 시간 안에 매우 부끄러운,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렬한 낯 뜨거운 감정을 경험한 물건이 그런대로 소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것처럼 기억은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버리고 싶다 해도 버려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꼭 연인이 아니었어도, 정말로 누군가를 위해 마음 다해 사랑했었던 날들, 희망이 가득하여서 이 것은 적어도 내가 사는 동안에는 영원할 거야라고 가슴 벅차게 생각했던 날들이 끝이 나는 것을 경험하고, 또 어떤 것들은 처절히 부서지면서 끝이 나는 걸 보면서 책 내용처럼 좋은 기억들만 오려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불행에게 다 내어주곤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아예 걷지 못하게도 했지만, 그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어느 시점에서는 앞으로 달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동력이 되어주곤 한다. 물론 모든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어느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여물어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그러나 어느 고통스러운 기억은 소중할 만큼 큰 자산이 되어준다, 돌이켜보면 생각보다 꽤 많은 고통들이 그러했다.


'그 화려한 식물들이 때에 따라 얼고 마르고 죽어가는 가운데에도 여전히 투명하게 빛나는 이 유리 온실은 어쩌면 자연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없앨 수 없는 이유도 자명해지는 것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내가 겪은 시간들에 대해 글을 써본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부적절한 일제 유산이라는 이유로 창경궁 대온실은 소설 안에서도, 현실에서도 논쟁이 많았다.

언젠가 내 아버지는 나와 누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젊었을 땐 자신도 죽으면 화장한 뒤, 재를 아무 곳에나 뿌려달라고 생각하셨다고. 하지만 막상 어머니를 그렇게 보내드리고 보니, 기억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이 슬픈 일인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셨다. “내가 떠난 뒤에는 조그맣게라도 묘를 남기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가끔 들러서 나를 기억하고, 함께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하나 있으면 좋을 거야.”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조금씩 이해가 간다. 지독하게 잊고 싶었던 기억들은 여전히 몇몇 개는 선명하지만 녹아들었고, 그러면서 서서히 기가 막히게 좋은 것들이 오려져 나간다. 그래서 모든 기억들은 나 그 자체이다. 그래서 어느 장소에 가면 나 그 자체인 기억들을 대여해 주는 장소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마치 잠시 물건을 대여하는 것처럼, 어느 특정한 장소들은, 수많은 기억을 잊고 있었던 나에게 '너는 이런 사람이었어'라며 그 기억들을 대여해 준다.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그렇지 않은 기억이든 다 중요하다, 그것이 나 자체이기에.


사람이 내면이 중요하다지만 그 내면을 만드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장소든. 생각해 보면 지금도 그러하다. 앞으로도 현재라는 환경에서는 좋은 것, 적당한 것, 그리고 고통스러운 것 등이 늘 함께 공존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도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내 마음을 모조리 뺏기는 것보다, 나를 아름답게 해주는 것들에 마음을 주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다시 이곳에 오면 조금 더 마음껏 미소 짓고 싶다.


"이모는 하루 마감하면서 가끔 이렇게 기도한다. 오늘 다행히 아무도 안 죽였습니다"

산아가 어이가 없는지 약간 웃었다.

"그럼 하느님이 칭찬하셔?"

"침묵하시지, 기도는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기 위해 하는 거니까."


'한때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서늘해지던 곳이지만 이제는 많은 이들의 각자 다른 시간을 거느리고 있는,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별처럼 느껴지는 집. 나는 잎을 다 떨구고 가지를 층층이 올려 나무로써 강건함을 띠는 벚나무를 올려다보다가 기쁘게 뒤돌아 다시 섬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 낙원하숙집의 하루하루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마음속으로 많은 이들을 죽였을 영두였지만, 그 후 많은 날들을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기도하며 기다린 후에 다시 찾은 낙원하숙집은 이제 영두에게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별처럼 느껴지었다.

부끄러운 한국의 역사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역사를 고스란히 돌려주었던 창경궁 대온실, 또 영두 개인이 그토록 잊고 싶어 했던 낙원하숙집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개인의 기억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두 장소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그것을 향한 존재들의 마음이 바뀌어짐에 그 장소는 달라진다. 그래서 낙원하숙집은 영두에게 그 바뀌어진 마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거울이 되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그러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하루도 마음속으로 아무도 죽이지 않음을 안도하고 싶다. 기도는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기 위해 하는 것인 것처럼, 좋은 마음은, 다가오는 내일들을 기다리기 위해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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