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 (영화생각)

불안정함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시작

by Yechan

퍼펙트 데이즈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완벽한 하루들 (days)'이다.

완벽한 하루의 정의란 있을까? 당연히 그런 건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며 일상의 소중함, 소소한 행복에 대한 점을 많이 얘기하며 큰 감동을 얘기하는 것을 보아, 쳇바퀴 도는듯한 하루를 살아가며 점점 의미와 영혼을 잃어가는 자신들의 모습 속에서 소소한 의미와 영혼을 잃지 않는 히라야마의 일상을 보며 많은 이들이 원하는 완벽한 하루의 모습들이 이러한 것이구나라는 것을 기분 좋게 짐작할 수 있다.


나 역시, 그 모습들이 참 좋아 보였지만, 영화 속 히라야마는 결코 일상 속의 소소한 점을 통해 행복만을 누리는 그러한 유토피아적 삶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영화 속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지만, 히라야마는 자신의 과거에서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큰 상처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가족을 떠났고, 자신이 기존에 살던 삶의 방식 대신에 지금의 청소부의 일상이라는 삶의 방식을 택한다. 그 일상은 매우 단순하지만 철저히 같은 루틴 속에서 이뤄진다. 매일 새벽, 자신이 키우는 화초에 물을 주고, 집 앞에 있는 자판기에 커피를 매일 뽑아 마시고, 출근길에 자신이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카세트테이프로 올드팝을 듣는다. 점심시간에는 좋아하는 공원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같은 나무 사진을 찍고, 청소일을 마친 후에는 목욕탕을 가서 씻은 후에 매일 자전거를 타고 단골 주점에 가서 소소하게 술을 한잔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좋아하는 소설을 읽으며 잠이 든다. 이것만 보면 그의 삶은 매우 단단해 보이지만 히라야마는 뜻하지 않게 자신의 감정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 여동생의 딸, 조카 니코가 자신의 집으로 가출한 후에 딸을 다시 데리러 오기 위해 히라야마의 집으로 온 여동생과의 대화 후에 감정이 무너지고, 하필 그 다음날 직장동료 타카시가 급작스럽게 그만두는 바람에 야간 근무까지 하는 날 또 한 번 무너지고, 주말마다 갔던 단골주점에 있던 여주인이 어떠한 남성과 포옹을 하는 모습을 마주치고 왠지 모르게 주인공은 감정이 와락 무너진다.


몇 년 전 김영하 작가가 tv쇼 알쓸신잡에 나와서 커플들이 왜 자신들의 사랑표현을 어떠한 장소에 글로 새기는 행위에 대해서 '사랑도 불안정하고 자아도 불안정하잖아요. 불안정하니까 안정돼 보이는 곳에 새기는 거죠.'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나는 히라야마의 자신의 삶의 루틴을 지키려는 행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과 자아는 늘 불안정하기에 인간은 늘 안정을 찾아다니고, 다른 것을 통해 안정을 확인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보통 돈을 통해 안정을 확인하지만, 히라야마는 루틴을 철저히 지키는 행위 속에서 자신의 안정감을 늘 확인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루틴을 이뤄주는 것들이 늘 그곳에 있어야 하며 변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삶은 변수 투성이고, 세상과 사람들이 안 변하는 것 같지만, 변한다. 자신의 루틴이 단단해짐으로 과거의 상처가 조금씩 없어져간다고 생각하 때 여동생과의 대화 속에 그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음을 확인하고, 갑자기 생긴 밤 근무로 인해 루틴을 지킬 수 없음에 화가 나고, 늘 그 자리에서 알게 모르게 위로를 주던 여주인분이 다른 남성과 포옹을 할 때 상실감을 느낀다. 이렇듯 내가 그대로여도 타인은 변하고, 때로는 타인이 그대로여도 내가 변하기도 한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히라야마 집 앞에 있는 자판기가 언젠가 사라질 수도 있고, 히라야마가 사는 책마다 한 마디씩 덧글을 붙여주는 여주인분이 언젠가 아프게 돼서 서점을 더 이상 영업을 못하게 될 수도 있고, 대중목욕탕이 손님이 많이 없어서 더 이상 영업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안정이라는 것은 인간이 일차적으로 욕구하는 감정이지만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안정감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불안한 인간은 그 안정감을 눈에 보이는 타 자(他者)를 통해 확인하려고 하지만, 결코 인간은 타 자로부터 100% 안정감을 얻을 수 없다. 돈을 통해 안정감을 얻는 자들 역시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보며 불안해하고, 루틴을 철저히 지키며 안정감을 얻는 히라야마에게 루틴을 무너뜨리는 것들이 나타남으로 인해 다시 불안해진다.


그러한 처절한 무너짐 속에서 히라야마는 깨닫는다. 내가 쌓아놓은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지만, 그것도 곧 삶이라는 것을. 그래서 늘 빛을 포착해 왔던 히라야마에게 그림자가 겹쳐져도 어두워지는 사실이 더 이상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밤에는 어두울 수 있다는 것을,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는 삶의 진실을 받아들인다. 빛만 있을 수는 없지만, 어두운 순간이 지나면 빛나는 순간도 온다는 것을. 그런 자연스러움이 삶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히라야마의 표정이 그것을 받아들인 히라야마의 슬픔, 후련함, 기쁨, 환희 등의 복잡 미묘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큰 진실을 깨달은 자의 다음 삶의 스테이지를 향한 희망찬 감정도 알게 모르게 느껴진다.


나 역시 돌이켜보면 그랬다. 나의 안정감, 나의 가치를 타자를 통해 확인해 왔으나, 그 타자가 없어지거나, 변해갈 때, 조급했고 불안했다. 그 타자의 나를 향한 태도가 늘 똑같이 머무르기를 원했다, 그래야지만이 내 가치를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타자가 변해감을 원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나의 안정과 가치를 타자를 통해서만 확인했었던 나 자신을 깨닫게 되었고, 스스로의 불안정함과 불완전함을 마주하고 깊이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그 진실을 마주함으로 인한 무너짐은 큰 고통이었지만, 결국 그 진실만이 제대로 된 삶의 처방약이었다. 여전히 불안정하고, 때로는 타인에게 의지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대부분 타인의 문제가 아닌, 나 스스로의 불안정함임을 알게 된 그 진실은 더 이상 이전 정류장에 머무르지 않게 해 주었다


영화 속에서 위 사진의 장면을 몇 번을 돌려봤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청소 중입니다'라는 팻말을 걸어놨는데도 무례하게 화장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처음에 조카는 약간의 빡침을 느껴하며 그렇게 서있는 삼촌을 슬픈 눈빛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 삼촌은 저 미소를 지으며 마치 이렇게 말해주는 듯하다. "괜찮아, 꼭 사람들이 나빠서 그러는 게 아냐, 이럴 때는 그저 한번 웃으면서 그 상황을 보내도 괜찮은 거란다, 그러니 웃으렴"


비록 히라야마가 때로는 큰 순간순간 속에서는 감정의 무너짐을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일상의 파편들 속에서 히라야마의 자신의 삶 속을 대하는 태도들은 여전히 감동으로 남는다. 청소 중에 무례하게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거나 스스로 짜증이라는 감정을 택하는 대신 잠시 밖에 나가서 그들이 볼일을 볼동안 하늘을 한 번씩 쳐다보며 미소를 짓는 감정을 택하는 근사함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 근사한 표정을 온전히 마음속에 지니며 살고 싶다. 순간 속에서 어떤 감정을 택하는 것이 매우 작은 일일 수 있지만, 적어도 조카 니코에게는 앞으로 있을 수많은 감정을 택해야 하는 길목에 어떤 모습이 좋은 길인지 알려주는 조용한 발자국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그러하듯 이러한 작은 순간들, 어쩌면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순간들이 나의 감정과 나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근사하고 따뜻해질 수 있고, 어느 순간 이러한 작은 것들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음을 커다란 의미를 통해 알게 된다. 또 반대로 큰 순간들이 내 의지와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곧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 것일 수 있음을 반대로 깨닫기도 한다.


그러므로 삶은 원래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의 연속이자 그 두 가지의 하모니라는 것을 영화는 말해준다. 어느 하나만 있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며, 어느 하나에 의해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이러한 진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삶이 곧 퍼펙트 데이즈 (완벽한 나날들)라는 것을.


P.S. 비눗방울 놀이를 하며 행복해하던 나의 조카를 바라보며 너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 약간의 부러움을 느꼈었다. 저런 소소한 것에 저리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나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본 이후에 아마 더 이상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것 같다.


비록 비눗방울을 보면 얇은 비눗막 안에 공기가 들어가서 형성된다는 사실이 먼저 떠오르는 나는 비눗방울을 보며 내 조카들처럼 행복하기란 글렀지만, 그런들 어떠한가. 이런 조카들의 모습을 보며 무척이나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지금 시기에만 내가 누릴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이자 행복인데. 그러니 부럽지 않다.

(이런 것이 감탄 보존 법칙 아닐까? 감탄이 다른 나이가 들어서 다른 감탄으로 전환될 때, 그 감탄의 총합은 나이와 상관없이 항상 일정하게 보존됨을 굳게 믿으며 :))


물론, 이왕이면 그 비눗방울에 대해 감탄하는 그 마음이 아이들에게 조금 더 길게 머물러줬으면 좋겠다.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 나도 다시 오지 않을 너희와의 지금 속 최선을 다해 너희 모습 하나하나에 감탄하며 곁에 머무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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