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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경심전 Feb 03. 2023

내가 살고 싶은 집은

노송과 폐가

연곡리의 노송

노송 한 그루가 폐가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다. 주인이 떠난 빈집을 홀로 지키고 있는 듯하다. 아니면 이 세상에서의 할 일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간 주인을 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지들을 축 내리고 있는 모습이 조선시대 산발을 하고 있는 사람을 연상시키곤 한다. 노송 바로 아래에는 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바위 표면은 비교적 평평하고 두 사람 정도는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언젠가 전원주택에 관심을 가지고 나서부터 좋은 땅을 구해서 집을 지어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살고 있다. 
 집을 지어 살아보고 싶은 땅 집의 조건 중의 하나는 지형이 특이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 사진을 본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낙수장은 숲 속 작은 폭포 위에 지은 집으로 위대한 건축물에 자주 소개되는 주택이다.

노송이 지키는 폐가
 이 폐가는 내가 원하는 집의 몇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옆에는 소박한 계곡물이 흐르고 집 뒤에는 노송 한 그루가 집의 수호신처럼 늠름하게 서 있다. 노송 아래에는 바위가 버티고 있어 혹시 모를 산사태를 원천적으로 방지하고 있다. 연곡리에 전원주택을 임차해서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이 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집의 형태가 그나마 남아있어 사람이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집이 무너져 내리면서 빈집임을 알았다. 장독대에 항아리가 남아있고 텃밭을 가꾼 흔적이 있다. 최근에 빈집이 된 모양이다. 빈집임을 알고 뒤편의 노송과 바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노송은 수령이 최소 백 년이 넘은 듯 보였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여 가지를 집 아래로 드리웠다. 수형이 정이품송처럼 산 모양을 이루지는 못했고 잔가지가 많아 사람이 가발을 쓴 모양새다. 노송이 내 눈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이 노송을 사진에 담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사진에 문외한이지만 몇 권의 사진 관련 책을 읽으면서 빛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사진가들은 아침과 저녁 무렵의 빛이 부드러워서 이때를 사진 찍는 최적의 시간대라고 한다.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아침저녁으로 같은 피사체를 다양한 프레임으로 담아 보고 사진이 어떻게 나오는지 경험해 보기로 했다. 같은 아침저녁이라고 해도 기상 상황에 따라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안개 낀 아침, 노을이 아름다운 저녁 구름 낀 날 등. 사진을 찍는 동시에 이 집을 사들여 집을 지어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됐다.

내가 지어보고 싶은 집은
 이 땅은 풍수지리에 대해 잘 모르는 내 눈에는 명당자리는 아니다. 연곡리는 뒷산에서 좌우로 흘러나온 좌우 줄기, 소위 좌청룡 우백호가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은 형세다 이 집은 이 줄기 중 우측 줄기의 중간 허리쯤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집들은 좌우 줄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고 이 줄기에 기대어 지은 집은 소수다. 또한 계곡 옆에 있고 마당이 높지 않아 한여름 장마에 수해를 입을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노송과 바위와 계곡과 조화를 이룬 집을 말이다. 구체적인 생각을 다듬어 가는 것도 행복한 시간이다. 건축가 이일훈과 건축주 송승훈은 '제가 살고 싶은 집은'이라는 책에서 집을 지어 나가는 과정을 소개했다. 몇 백통의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건축주가 원하는 집과 건축가가 생각하는 집에 대한 생각을 조화시켜 나갔다. 이 긴밀한 대화의 과정을 거쳐 건축주가 진정으로 원하는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이곳에 집을 짓는 다면 나는 어떤 공간을 만들어 낼지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건축 책처럼 내가 건축주가 되면 건축가에게 무엇을 실현해 달라고 요청할지 생각해 보았다. 이를 통해서 내 마음의 집을 한 채 지어보고 싶었다. 가장 실현해 보고 싶은 생각은 노송 밑에 있는 바위 위에 나와 아내가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단순히 티 테이블 하나를 놓은 개념이 아니다. 집 2층에서 이 바위 위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든 다는 개념이다 이 바위를 집 밖의 물체가 아니라 집의 일부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보통 집은 벽을 쌓아 자연과 격리를 추구한다. 그러나 나는 문 이외의 자연과의 통로를 만들어 수시로 교감하고 싶었다. 노송이 드리운 그늘 아래 여유롭게 차 한잔 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집과 바위를 연결하는 다리는 무언가 멋스러움과 자연스러움을 동시에 추고 하고 싶다 예를 들면 강화 유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바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하고 싶다. 또한 이층 거실의 천장 일부는 유리로 제작하여 노송을 언제라도 바로 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이층 거실을 노송이 있는 산까지 확장하여 노송을 바라보며 노송과 대화하고 싶다. 노송이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을 내가 읽어보고 싶다. 마당에 작은 연못을 파고 바로 옆에 흐르는 계곡 물을 끓어들이고 싶다. 이 연못 옆에는 멋들어진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계절에 맞추어 꽃을 바꾸어 심고 연못 안에는 작은 물고기가 노닐게 하고 싶다. 고향집에도 이런 연못이 있었다. 고향집은 세종특별시가 건설되면서 수용되어 사라져 버렸다. 고향의 추억을 이곳으로 이식하고 싶었다. 계곡 바로 옆에는 오디오 룸을 짓고 싶다. 음악을 듣다가 싫증이 나면 졸졸거리는 계곡의 연주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이 집의 전경을 잡고 싶어서 옆집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고 있는데 집주인인 듯 보이시는 70대 노신사가 안녕하시냐고 말을 걸어오셨다. 이 집 위에 위치한 전원주택단지 첫 번째 사는 아무개라고 나를 소개했다. 같은 마을 주민임을 안 주인장께서 선뜻 차 한잔 하자며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세 집을 이어 붙인 형태를 하고 있어서 지나다니면서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지었나 보다고 생각하곤 했었다. 들어 보니 주인장의 서재, 딸, 아들 용으로 짓다 보니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이 분은 이십 년 전에 땅을 구매해 두었다가 몇 년 전에 스스로 설계를 해서 지으셨다고 한다. 


폐가의 사연
 
마침 내가 사진을 찍고 있던 집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이 집의 최근의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집에는 할머니 혼자 사시다가 돌아가시고 아들들과 손자들이 이 집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왜 이리 폐허처럼 놔두나 하는 의문이 드는 순간, 집이 자연적으로 쓰러지면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어 놔두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을 미관으로 보나 빨리 조치를 취하는 것이 맞으나 보상을 위하여 십여 년 집을 방치하고 있다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보다 더한 사연이 뒤따라 이어졌다. 집 뒤에는 원래 아름드리 노송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자식들이 이 소나무들을 베어 내고 조그만 텃밭을 만들고 토종벌을 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너무 아쉬워 말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간섭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고 판단하셨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의 노송 한 그루라도 살아남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향집 노송
 
고향집 울타리 안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왼쪽 나무는 내가 10살쯤이었을 때 대략 20년 정도의 수령을, 오른쪽 나누는 30년 정도의 나이를 먹었다고 기억한다. 이 나무들은 단조로운 시골집에 운치를 더해 주었고, 땅을 깎아서 조성한 집 언덕에 튼튼하게 뿌리를 박아 장마에 땅이 무너지지 않게 지켜 주었다. 

어린 시절 뒷산에 쉽게 오르기 위하여 이 나무들을 타고 담을 넘었다. 시골집에 갈 때마다 안부 인사를 건넸고 가끔씩 전지를 하며 수형을 가꾸어 주었다. 어느 해 습기가 많은 눈이 가지에 쌓여 오른쪽 나무는 가지가 부러져 아름다운 형태를 잃어버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수형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두 나무는 노송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원숙미를 풍기며 성장했다.

이 두 나무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폭설이 아니었고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라는 나비의 날개 짓이었다. 행정수도 이전 결정은 시골집이 수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시골집을 떠나시면서 아버지는 지인에게 두 소나무의 소유권을 넘겨줬다. 두 소나무는 이 분의 집으로 이식되었다. 그 후로 소나무들의 소식을 들을 바 없다. 그리움을 같이 이전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느 날 인터넷 지도의 거리뷰로 이 집을 살펴보았다. 이식된 듯한 소나무들을 발견했으나 우리 집 소나무들을 특정할 수는 없었다. 어느 곳이든지 소나무를 보면 나의 뇌는 이 소나무들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 내에 보여준다. 새로운 땅에 다시 뿌리를 내리고 내 그리움처럼 끈질기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땅은 인연이 있어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땅과 인연이 닿을 확률은 매우 낮겠지만, 노송이 항상 곁을 지켜주는 이 터에 내 꿈을 지어 보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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