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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역 Dec 19. 2023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우리가 매일 걷는 도로 밑에는 지상의 도로망보다 복잡한 관로들이 지나간다. 통신선, 전력선, 가스관, 우수관, 상하수도관 등의 다양한 선과 관로가 묻혀 있다.


도로와 천변 밑에 묻힌 관로와 지상을 연결하는 통로가 맨홀이다. 맨홀은 도로에서 지하로 지하에서 지상으로 출입하는 사람의 통로다. 맨홀은 지하에 묻힌 관로의 둘레를 감안하여 간격을 조정해서 설치한다.


맨홀은 지하에 묻힌 관로의 물이나 가스 등이 유출되거나 전력선이나 통신선에 이상이 생겼을 때 보수하거나 점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다.


아침에 천변을 걸어가는데 차집관로라고 쓰인 맨홀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차집관로 맨홀 뚜껑을 밟으며 탄천에 이르자 둥그런 콘크리트 위에도 차집관로 맨홀을 설치해 놓았다.


그곳에 ‘주의 차집관거’라는 팻말까지 세워 놓았다. 차집관거 팻말을 눈으로 읽고 걸어가는데 머릿속에서 차집관거란 말이 떠나지 않았다. 천변을 걸어 기면서 차집관거가 도통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차집관거란 단어를 차칩과 관거로 분리해서 의미를 생각해 봐도 연관되는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차집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연상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다른 말도 많은데 왜 하필 차집관거란 명칭을 사용했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그런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일까. 마치 맨홀을 관리하는 담당자 외에는 알면 안 되는 중요한 것이라고 묻혀 있는 것인가. 정부의 관련부처에서 수십 년간 근무했음에도 차집관거란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천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사전을 찾아보니 차집관거는 하수나 빗물을 모아서 하수 처리장으로 수송하기 위해 설치한 관이나 통로라고 설명되어 있다.


사전을 살펴보니 일본어 사전에도 차집관거란 단어가 한자로 표시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차집관거는 우리말이 아닌 것 같다. 차집관거(遮集管渠)는 한문의 음과 훈을 알아도 의미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한문으로 차는(遮, 막을 차), 집은(集, 모일 집), 관은(管, 피리 관), 거는(渠과 도랑 거)로 풀이된다. 이들의 의미를 종합해 보면 피리 모양의 관의 형태로 도랑을 만들어 무언가를 막아 모은다는 뜻이다.


한문의 훈에 도랑이란 말을 사용한 것을 보니 물과 관련된 것이고 물을 막거나 모으는 관이란 뜻인 것 같다. 오늘따라 천변을 걸어가는데 차집관거 푯말이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차집관거란 이름 말고 순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정말로 없는 것일까. 법령의 정비를 다루는 법제처는 알기 쉬운 법령을 정비하기 위해 예산을 들여가며 작업을 하는 부처다.


지금까지 이런 용어가 우리 생활 현장에서 아직도 버젓이 사용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비용이 들어간다지만 국민이 뜻이라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고 옛 총독부 건물까지 폭파했는데 아직도 우리 생활 주변에는 일제 강점기 용어가 그대로 존치되고 있다. 그리고 의미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단어를 일상생활 주변에서 버젓이 사용하는 실정이다. 


우리 국민 중에 차집관거란 용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도 99% 이상은 모를 것이다. 한자의 음과 훈을 알아도 그것이 무엇에 쓰이는 용도인지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이다.


차집관거란 의미와 뜻도 불분명한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무슨 연유일까.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이참에 국민에게 명칭을 공모하여 누구나 알 수 있는 이름으로 바꾸었으면 한다.


도로나 천변에 설치된 차집관거나 차집관로 맨홀 뚜껑이 몇 개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산을 들여서라도 이름을 바꾸었으면 한다. 차집관거란 명칭을 사용하면 사람이 유식해 보여서 바꾸지 않는 것일까.


매년 지자체에서 차집관로 준설이나 설치하는 공사가 수없이 발주되고 있다. 공사만 발주하여 시행할 뿐 공사명은 한 번쯤 생각해 보거나 다른 이름으로 공사명을 바꾸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집관로 공사를 담당한 직원에게 물어보면 이전부터 관행적으로 관습적으로 용어를 사용해 왔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국어 순화는 공공기관이 먼저 사용하고 장려해야 한다. 국민이 이해할 수도 없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차집관거나 차집관로 용어는 하루속히 새로운 용어로 정비해야 한다.


물론 용어를 정비한다고 지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인 맨홀 뚜껑이 제 길을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차집관거나 차집관로 맨홀의 이름만 정비하지 말고, 기존에 사용하고 있는 도로나 하천공사에서 사용하는 명칭도 함께 정비했으면 한다.


맨홀 뚜껑 이름 하나 정비한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명칭을 사용하면 국민이 편하고 관리하는 회사나 공공기관도 편한 것 아닐까. 그것이 국어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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