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 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박목월, '나그네')
세월이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듯 머문 듯이 계절 속으로 침잠해 간다. 신록의 계절 오월이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유월의 더운 외줄기 길을 향해 저녁노을을 남기며 휘적휘적 사라져 간다.
계절은 서서히 봄에서 여름의 길목에 들어서고 강나루 건너 파란 청보리도 고개를 떨군 채 스쳐가는 바람에게 인사를 건넨다.
박목월의 나그네란 시를 읽으면 머릿속은 저절로 고교 시절로 돌아간다. 국어 시간에 배우던 시는 왜 그리 어려웠던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학창 시절에는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런 시를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보니 시는 그냥 읽으면 되는 것인데 시에 대한 해석과 의미와 수사법 등 온갖 어려운 것을 동원하여 가르치니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 버렸다.
시에는 그림이 담겨 있고 그림에는 시가 담겨 있다는 말이 있다. 나그네란 시에는 수많은 그림이 담겨 있는 듯하다. 시구를 천천히 읽어보면 연마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놓은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짤막한 시구에 수많은 그림을 담아내는 것도 아무나 하지 못한다. 시는 곧 노래이자 그림이다. 산문을 축약한 것이 시이고 시를 축약한 것이 그림이다.
따라서 산문을 잘 쓰는 사람은 시도 잘 짓고 시를 잘 짓는 사람은 그림도 잘 그린다. 박목월의 나그네를 읽으면 눈앞에서 많은 그림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시인이 어떤 마음으로 나그네란 시를 지었는지 그 뜻과 의미는 잘 모르지만 세상을 여여하게 바라보는 눈썰미라도 배워보고 싶다.
삶이란 시간의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닌데 왜 국어 선생님은 시를 어렵게 가르쳤을까. 시는 그냥 마음에 간직했다 생각날 때 암송하며 즐기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으면 삶이 좀 나아졌을까.
계절은 소리 없이 남도 바람을 타고 술 익는 마을을 향해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데 사람의 마음은 시간이란 블랙홀에 빠져 저녁노을도 잊은 채 어둡고 컴컴한 동굴을 향해 가는 것 같다.
세상살이가 정처 없는 나그네라는데 무엇이 그리도 바쁜 것인지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진 사람처럼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세월만 바라보는 신세다.
세월이 가는 듯 오는 듯이 머무르며 갈 길을 헤맬 때 시간은 밀물처럼 바람결에 무심히 휩쓸려만 간다. 뜻하지 않는 인연을 통해 이곳에 들어온 지도 그럭저럭 계약한 기간이 끝나간다.
이곳에 무엇을 바라거나 무엇을 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든 자리에 무엇하나라도 남기고 가고 싶은데 마음만 앞설 뿐이다. 내가 머문 자리는 깨끗하게 머물다 깨끗하게 비워 주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이치다. 난자리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잘 사는 인생은 아니지만 세상에 무언가 하나라도 남겨주고는 싶은데 딱히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박목월 시인의 생애 첫 산문집인 "시가 있으므로 세상은 따스하다"를 구해서 읽은 적이 있다. 아마도 시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산문집을 읽으면서 산문을 읽은 것이 아니라 시집을 한 권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의 산문집에는 시인이 술자리나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하는 모든 말들이 시어처럼 다가왔다. 말이 곧 시란 생각이 들었고 시가 곧 말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시인으로 살아왔으니 시인의 말은 구름에 달 가듯이 부드러운 시어처럼 멋스럽게 다가왔다.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며 나도 시인처럼 산문을 시처럼 멋지게 쓰고 싶었다.
그런 지나간 순간과 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여 년은 흘러갔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시간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밀물처럼 손에서 뭉텅뭉텅 빠져나간다.
앞으로 남은 여생은 시인처럼 구름에 달 가듯이 쉬엄쉬엄 유유자적하며 지내고 싶다. 그런다고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의 마음만이라도 닮아가고 싶다.
나그네란 시에서 가장 가슴을 파고드는 멋진 시어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란 시구다.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시간이 구름에 달 가듯이 흘러갈까.
오늘따라 시간이 느리게 다가오는 아니라 구름에 실려 가는 바람처럼 무리 지어 다가온다. 오늘은 모처럼 강나루가 아닌 천변에 노랗게 핀 금계국의 노을이나 바라보며 구름에 달 가듯이 출근길에 나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