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미국에서 계란 파동으로 인해 우리나라에 매달 1억 개의 계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단다. 미국의 국내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지만 다급하게 요청한 것을 보면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 것 같다.
식생활에서 계란은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는 식재료다. 계란 파동으로 계란 값이 올라가면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물가상승으로 이어져 서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먹는 식재료는 소중함을 모르다가 부족이란 파동을 겪으면 그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매일 먹는 식재료는 누군가의 소중한 땀과 곡절로 이루어 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즈음 아침저녁으로 삶은 계란 하나씩을 먹고 있다.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서 먹는다지만 그나마 계란 하나를 먹을 때와 먹지 않을 때의 느낌은 서로 다르다.
비록 계란은 작은 것에 불과하지만 하나라도 먹으면 속이 꽉 찬 느낌이 든다. 그런데 계란이 떨어지거나 없어서 먹지 못하는 날은 왠지 허전하고 다른 것을 먹어도 포만감이 덜하다.
내 삶에서 계란은 고단한 농사일과 함께 동동주를 떠올리게 한다. 학창 시절과 대학 졸업 후 방학이나 주말이 되면 논밭에 나가 풀을 뽑거나 담뱃잎을 따다 엮어 건조실에 말리는 작업을 거들어야 했다.
아버지와 지게를 어깨에 걸머지고 밭에 가기 위에 대문을 나서려면 어머니는 부엌에서 미리 준비한 동동주 한 주전자와 삶은 계란을 들고 와서 지게에 얹어 주셨다.
그렇게 지게를 메고 절안 골짜기 초입에 이르면 동동주는 찬물이 솟는 샘물에 넣어 두고 삶은 계란은 그늘이나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다.
그리고는 밭고랑의 풀을 뽑아낼 때마다 밖으로 나와 커다란 고욤나무 밑에 앉아 아버지와 동동주 한 잔에 삶은 계란 하나를 먹었다. 옷은 땀에 흠뻑 젖고 흙이 튀어 너저분한 모습으로 고단함을 달래며 아버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동주와 삶은 계란은 아버지와 산직골의 논둑 풀을 베러 가거나 남산골의 고구마를 캐러 가거나 절안의 담뱃잎을 따러 갈 때마다 어머니는 내 손이나 지게에 들려 보냈다.
그 시절 농번기에 장을 보러 갈 수 없는 농사꾼의 사정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온갖 시장 물건을 실은 트럭이 마을마다 돌아다녔다. 트럭은 마을 입구부터 "계란이 왔어요", "고등어가 왔어요"라는 확성기를 틀고 들어서면 마을 아주머니들이 달려 나왔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계란을 포함한 반찬거리를 사셨다. 그 트럭에는 없는 것이 없을 만큼 다양한 종류의 물건을 싣고 다녔다. 트럭은 매일같이 마을과 이웃마을을 돌아다녀서 아주머니들이 무엇을 사다 달라고 하면 이튿날 싣고 와서 팔았다.
내가 고향에서 먹던 계란은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먹은 것이 아니다. 단백질보다는 농사일을 돕는 힘이 부족해서 힘을 보충하기 위해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을 먹은 것이다.
지금은 힘들고 고된 농사일에서 벗어나 도시 사람 행세하며 살아가지만 아직도 그 시절의 시간은 머릿속에 생생하고 또렷이 남아 있다. 사람은 어느 시절 어느 때나 고되고 힘든 시절을 겪게 마련이다.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계란이지만 그것을 통해 삶의 시간을 돌아보고 그리워하는 것은 그 속에 많은 추억이 서려 있어서다. 미국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계란 하나가 갖는 의미는 같지 않을까.
단지 그 계란에 어떤 추억과 시간과 의미가 배어 있느냐에 따라 맛도 다르고 추억도 다를 것이다. 내게 삶은 계란은 다른 무엇보다 고향에서 보낸 고단하고 힘든 농사일을 떠올리게 하고 주름진 부모님의 얼굴을 생각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