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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청년 Jan 18. 2024

힙합과 테크노에 관한 사유

단조로운 북소리의 반복이 만들어낸 새로운 공간

'68년 프랑스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북미와 서구 대학가의 저항정신을 주도했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요인물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그의 책 Philosophie der neuen Musik ("새 음악에 대한 철학", 1949)에서 당대까지의 서양음악사의 흐름을 분석하면서, 교향곡에서 바이올린의 선율로서 주로 나타나는 멜로디가 작곡가의 주관성의 표현이고 이는 곧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개인주체의 자유도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쇤베르그의 12-톤 음악은 기존 음계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자유로운 표현으로서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멜로디가 복잡해지는 추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그가 만약 오늘날까지 살아 90년대부터 주류문화가 되기 시작한 랩과 2000년대부터 양지로 올라오기 시작한 테크노레이브를 보았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그는 아마 위 장르에서 두드러지는 멜로디의 부재를 거대한 체제에 굴복된 개인주체성과 연관지어 오늘날 사회에서 더이상 참된 의미의 주관적 표현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의 분석과 논리를 과학적으로 검증할 길은 없기 때문에 그의 이론의 가치는 명제의 진위여부를 따지는 것보다도 음악에 대한 사유의 언어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대화에 불을 지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평가되어야 마땅하겠다. 한편 하이브라우(high-brow)에 해당하는 클래식 작곡가들만을 주제로 다루고 재즈에 대해 무지했으면서도 비판적이었던 그가 과연 대중문화를 논할 자격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음악이 "부르주아의 전유물"이어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특정계층의 문화와 관습에만 귀가 밝아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날 우리가 힙합문화와 랩의 역사를 돌아봤을 때 찾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유산은, 건국부터 지금까지 주욱 인종사회이어왔던 미국에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언어가 없었던 소외계층이 집단의식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복제가능한 방법론으로 보편화시켰다는 것이다. 힙합 대중화에 앞장섰고 갱스터랩의 1세대 및 대부라고 할 수 있는 투팍(2pac)의 랩을 통해서 미국의 대중들은 흑인인권탄압에 대하여 더이상 모른척하고 넘어갈 수 없게 되었고, 이후 랩은 힙합이라는 장르에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잡아 낙후된 슬럼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살인, 강간, 마약거래등의 범죄행태와 경찰가혹행위, 아파트하이드(apartheid) 등의 테마들을, 현장을 매일 살아가는 민중의 시각을 통해 조명하여 그동안 흑인과 가난을 그저 사회악으로 규정했던 단면적인 여론에 대한 대체적인 서사로써, 벙어리가 되어버린 이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사각지대에 빛을 비추는 혁명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도르노가 염두에 두었던 "기존 주도세력에 대항하는 주체성"으로서의 음악은 실제로는 멜로디를 다 제거한 시조를 단조로운 네마디 비트위에 운을 맞춰 읊는 형식으로 현현하였다.


Black Star - Respiration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출처: 유튜브)


이후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바닐라아이스 등이 백인래퍼들이 나왔고 에미넴의 등장을 기점으로 랩은 흑인들만의 전유물이라는 형식적인 굴레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랩과 힙합은 미대륙 바깥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고 가장 대표적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소수인종 및 이민자커뮤니티에서 발달한 래퍼들과 비트메이커들은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더해 랩이라는 문학의 형식과 힙합이라는 음악의 장르가 헤아릴 수 있는 컨텐츠의 폭을 한층 더 확장시켰다. 한국에서 역시 랩을 통해 기존에 소외되어 있었던 이들이 개인의 표현을 할 수 있는 창구가 생겼고 비록 힙합은 오늘날까지도 주류문화로 자리잡았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기업의 이익구조에 기반하여 설계된 주류 대중음악산업에 대체되는 서브컬처로서 춤, 랩, 비트메이킹, 클럽운영 등을 통해 기존사회의 경직된 틀을 거부하고 공동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의미있는 공간과 기회를 제공해왔다.


힙합의 대중화와 랩의 보편화, 미국에서의 흑인인권신장과 낙후된 커뮤니티의 자기표현 등과 더불어서 봐야 하는 문화현상이 디트로이트에서 시작하여 베를린에서 대중화된 테크노레이브이다. 자세한 설명을 최대한 생략하고, 디트로이트는 한때 미국 내 주요공업도시였다가 공장이 인건비가 더 싼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황폐화된 비산업화(de-industrialized) 도시 중 하나이다. 황폐화라 하면 더 이상 가동되지 않는 공장들이 방치되어 빈 건물이 늘어나는 등의, 말 그대로 공업단지와 도시가 가시적으로 황무지처럼 변하는 것과 더불어 넓게는 지역경제위축, 실업률증가 등의 보다 추상적인 요소까지도 은유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안정적인 수입과 사회적지위를 잃고 이웃들과의 연결지점도 줄어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맞은 경제난, 사회적/정치적 고립, 확산되는 우울과 불안은 전자음악이라는 새로운 장르와 레이브라는 서브문화가 새싹처럼 피어날 토양의 밑거름이 되었다. 70년대부터 묵묵히 실험적인 시도를 해오던 테크노 프로듀서들은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버려진 창고와 공장건물 등을 댄스플로어로 탈바꿈시켜 더이상 수입도, 직장동료도, 미래에 대한 계획과 희망도 허락되지 않은 디트로이트 시민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비슷한 시기에 뉴욕에서는 디스코, 시카고에서는 하우스 음악씬이 발달했다.


80년대 시카고의 레이브 (출처: Grayarea.co)

'89년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이어진 소련해체와 사회주의진영붕괴, 냉전종결이 유산으로 남긴 빈 건물들은 유럽의 전자음악 프로듀서들과 동서독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장이 되었고, 이 곳에서 발달한 테크노씬은 통일이후 이전 동독 사회에서 통용되던 사회적지위와 마이크로문화, 인간관계들이 단번에 무위화된 후유증, 이른바 오스탈기(Ostalgie: 동녘을 뜻하는 Ost + 향수를 뜻하는 Nostalgie 를 합친 조어)의 치료제가 되었다.


나아가 서독에서 6,70년대 히피문화를 겪었던 이들의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새로운 세대들은 보편적인 박애와 포용을 주요가치로 가슴에 품고 도시에 새롭게 편입된 폐허를 소외된 이들의 욕망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공간으로 전환시키는데에 일조하였다. 동독인들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등 기존 사회의 통념이 규정해놓은 것과 다른 꿈을 꾸던 이들 역시 레이브에서 표현의 채널을 찾았고 오늘날 주류문화 및 흡사 순례대상이 된 베를린의 테크노씬은 성소수자들의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파티관습에 그들의 억압과 해소에 대한 욕망이 뿌리깊이 스며들어있다. 이렇게 오늘날의 테크노씬은 히피문화의 연장선으로서, 성소수자들의 해소채널로서, 동독인의 상실감과 맞물려 기존사회에서 자리를 찾지 못했던 욕망들이 새로운 공간과 개념을 정의해가는 과정으로서 기념비적인 문화유산이 되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등 유럽국가들 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중국의 대도시에서도 그 공간의 모방과 재해석을 관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전자음악기반의 레이브문화 발달을 사회학적으로 접근할 때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기존 사회에서 입지가 어려워진 이들이 모여 직업과 경제에 구애받지 않고 대체적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창출되었다는 점이다. 랩과 힙합이 기존 자본주의사회에서 구석 또는 영역밖으로 몰려난 소외계층의 주관적 서사를 수용하는 문학적 대체공간을 만들어 기존체제에서 배제되어 있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만든 것과 달리 테크노레이브는 (다른 전자음악씬과 더불어서) 기존체제에서 헌법처럼 선제적으로 적용되었던 개인주의, 이윤추구, 경쟁등의 통념들로부터 독립된 대안공간을 만들어 공동체 형성의 대안가능성을 제시하고 인간관계의 개념을 재정의했다는 점에서, 힙합과는 다른 의미에서 혁명적이다. 전자는 개인의 주체성과 자본주의 논리를 긍정하여 경쟁에서 패배한 이들이 다시 경기장에 들어가 싸울 수 있도록 격려하는 반면 후자는 약육강식의 세계로부터의 도피처를 단기적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 자체가 중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구조가 되어, 개인주의와 이윤추구, 경쟁을 초월하는 공동체주의와 포용, 보편적 박애의 가치의 구체적인 형태를 시범하고 그것이 가능한 구조를 확산 및 재생산한다.


음악적인 요소에서 접근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힙합과 테크노를 비교했을 때 유사성, 차이점을 모두 볼 수가 있다. 두 장르에서 공통적으로 두드러지는 짧은 간격으로 반복되는 비트, 베이스드럼의 잦은 반복, 멜로디의 최소화는 현대의 대중음악이 기존 클래식에서 정립되었던 화성학의 코드진행과 멜로디 이론, 연주테크닉을 계승하면서 상당부분 단순화시킨 추세와 평행하나, 이보다 훨씬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비틀즈가 근대서양음악의 민주주의적 각색과 지속이었다면 힙합과 테크노는 각각 고전의 서사시와 고대의 샤머니즘으로의 회귀를 선언함으로써 근대의 지속을 거부하고 음악사의 시계를 12시로 돌려놓는 작업을 해놓은듯 하다.


반면 랩비트의 템포가 100bpm(1분당 재생비트)을 잘 넘지 않는 것에 비해 하드테크노의 비트는 분당 120에서 150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편이다. 오늘날 힙합 비트의 대부분은 가사가 랩으로 녹음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고, 힙합팬들의 상당수가 래퍼의 삶과 가사를 쓰고 읊는 능력에 큰 초점을 두어 음악을 듣고 아티스트를 평가하는 잣대로 삼는데에 반해, 테크노트랙에서 언어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요소로서 간단한 나레이션이나 메아리같은 효과음의 역할을 할 뿐이다. 랩 가사가 개인의 역경을 회고하고 재해석하는 서사적 요소를 강조하는 반면에 테크노트랙에 효과음처럼 추가되는 말귀는 현실의 초월과 새로운 세계로의 도약따위의 영적/심리적 주제를 주 모티프로 삼는다 (물론 랩의 장르가 다양해지면서 플라잉로터스와 같이 기존통념을 깬 힙합프로듀서들이 인기를 얻고 사이키델릭랩이 등장하면서 이런 구분은 더이상 명확한 경계를 찾기 힘들어졌다). 내용과 형식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차이점은 각 문화가 발달한 사회적배경을 분석했을 때 도출한 결론들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내가 던져보고자 하는 추론은 힙합과 테크노의 점진적인 보편화와 대중화가 곧 소외와 고립의 보편화와 평행하는 현상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흔히 제 1세계, 속칭 "글로벌노스"로 칭해지는 부자나라들의 자본은 값싼 노동을 찾아 제 3세계 국가, 혹은 "글로벌사우스"로 이사를 가면서, 고소득사회의 중산층은 육체적 노동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9-5 사무직의 냉소적인 분위기와 물질의 풍요가 역설적으로 가져다준 허무주의, 우울, 고립, 불안 등의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로운 재앙의 원인이 되는 물질적조건은 중산층의 삶과 윤리에 국한되는 것으로서, 앞서 언급한 노동계급 또는 소외계층의 그것과는 본질적 원인이 다르지만 두 경우를 아우르는 감성, 즉 제조업이 사라진 땅에서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에 대한 막연한 향수, 집단적 상실감 등의 키워드는  힙합과 레이브라는 두 가지 서브컬처를 주류문화로 전환시키는데에 있어서 충분한 토양이었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폐허가 된 디트로이트의 Fisher Body Plant 21 (출처: Abandonedamerica.us)


이와 더불어 소셜미디어의 발달과 갈수록 짧아지는 집중가능시간(attention span)은 점점 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현재의 반복을 가속시킨다. 혹자는 반론할 수도 있겠지만 TV광고가 15초였던 것에 비해 유튜브광고가 6초인 점, 과거 유튜브동영상이 10분남짓했던 것에 비해 틱톡의 쇼츠가 10초 남짓한 점을 미루어봤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반복되는 현재라는 시간개념조차도 지금은 간격이 점점더 짧아지고 있는듯 하다. 혹시 이러한 추세가 1세대 올드스쿨 랩에서 2010년대 트랩 및 이모 힙합으로 발전하는 과정, 또 전자음악 템포의 점진적인 가속화와 상관관계를 이루는 것은 아닐까? 과거 래퍼들이 각 트랙마다 다른 주제를 가지고 비교적 길고 개연성 있는 스토리텔링을 했던 것에 비해 비교적 최근 유행한 트랩과 이모힙합의 랩은 소절과 다음 소절의 서사적 연관성이 약하고 문장자체도 짧아졌으며, 같은 아티스트의 여러 노래들을 들어도 주제가 한정되어있거나 서로 비슷비슷한 편이다. 시간의 개념이 단편적인 에피소드의 연속과 그 사이의 짤막짤막한 공허감으로 대체될 때 우리가 소비하는 음악 역시도 짧은 소절과 짧은 비트의 연속, 또는 공허감을 대변하는 어두운 정서로 표현되는 것이 아닐까?


나아가 더이상 소리에 국한되지 않고 뮤직비디오의 형태로 소비되고, 패션과 이미지의 트렌드까지 포괄하는 개념이 된 음악의 시각적의존은 어쩌면 우리가 오늘 경험하는 사건들이 어제와 내일의 그것들과 논리적으로 연개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해진 오늘날 개인주체가 경험하는 '지속의 불가'에 대한 반작용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서브컬처와 음악, 사회에서 나타나는 거시적흐름을 연관지어 분석하는데에 있어 지금 당장 필자가 이 글을 통해 제시할 수 있는 논거는 박약한 편이나 이 글을 통해 대중문화에 대한 감상이 보다 과감한 사유와 대담한 평론으로 이어지는 토대를 만드는데에 작은 기여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들은 전자음악에 영혼이 없다고 하는데 그건 우리가 아직 혼을 불어넣지 않았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한 아이슬란드의 전위예술가 비요크(Björk)를 인용하면서 비주류음악과 서브컬처에 대한 오마주를 마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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