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간 우리나라 일본 및 서방의 대중문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새로운 금기의 출현과 보급이다. 성소수자와 소수국적 및 인종 다이아스포라, 여성에 대한 차별이 이전보다 엄격한 근거와 기준에 의거해 정해졌고 미디어와 공공장소에서 퇴출되었다. 이는 한국사회가 최근 경험한 갑질 논란, 번아웃 사회에 대한 비판,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처우개선 등의 이슈와 평행을 그린다. 흔히 정치적 옳음 또는 PC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져서 비판되었던 이 엄격한 새 기준은 이제는 인지해야 마땅한 불가피한 흐름으로 이해되는 편인 것 같다.
이렇게 새로운 금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장려되는 가치들도 있는데 내 눈에 유난히 두드러지는 것은 건강과 안전이다. 이전 사회에서 으레 받아들여지던 근면, 성실과 사회적 지위상승 등의 정형화된 중산층의 아메리칸드림 모델이 신빙성을 잃으면서, 또 물질의 풍요가 장기화되고 고소득사회를 유지하는 경제체제가 고착화되면서 우리 사회는 변화보다는 개개인의 삶에 깃들 안정, 평온, 풍요를 보편적가치로 우선하기 시작했다. "건강이 최고야", "안전제일" 등의 슬로건은 새로울 것이 전혀 없긴 하지만 먹고살만큼만 일하고 싶은 이들 사이에서 별탈없이 안부묻듯 나눌만한 덕담으로서 이전보다 더욱 좋은 위치를 누리고 있다는 점은 명료해보인다.
코로나시대를 경험하면서 전례가 없었던 차원의 사회적합의가 이루어질 때에도 외적 모토는 주로 "안전"을 명분으로 하여 정당성을 찾았다. 백신접종의 사실상 의무화와 QR코드를 통한 위치추적 등 비상사태라는 특수성 없이 감행이 어려웠을 사회실험들이 빠른 시간 안에 합의가 되면서 공공의 추구가치도 자연스럽게 보건과 안전이라는 상징성에 기댈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시대의 규제가 완화 및 철폐되고 나서도 보건과 안전이라는 가치가 가진 항시적 정당성은 공익의 잠재적 강제성과 맞물려 있는 도구로서 여전히 유용하다. 쉽게 말하면, 애국가를 불러도, 태극기를 봐도 국뽕을 느낄 수가 없고, '국민의 단결을 통한 경제성장', 국위선양, 생산성 향상 따위의 명분이 더이상 사람들을 움직일 수 없는 시대에 개인의 안전과 건강을 보장한다는 명분만이 개인주의자들의 단체행동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회의 철학은 안전과 건강의 철학이 되어야 할텐데, 그것은 이미 큰 리스크 없이 가진대로 만족하며 살고 싶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매일 매 순간 실천되고 있는 현행이다. 오늘날 삶에서 추구되는 바가 개인의 만수무강과 안전보장인만큼 어쩌면 철학이라는 개념자체도 요즘은 안전한 생각과 글귀들로 대체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철학의 이름 그자체가 되어버린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을 때 받은 죄명은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생전에 남긴 글이 없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타락을 시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추측가능한 부분은 그가 생김새부터 하는 행동까지 모두 상식을 벗어난 괴짜이자, 중요한 모임에 초대받고도 줄곧 어려운 질문을 서슴지 않고 던지는, 높은사람들에게는 귀찮은 존재였을 것 같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랬는지 안그랬는지를 떠나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대신 글로 써서 남긴 플라토는 당대 아테네 정치인들에 대해 노골적인 비판을 했는데, 유럽에서 기원한 근대와 현대문명이 정한 “철학"이라는 것의 정의가 플라토를 비롯한 고대그리스 지성인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전통이라면 철학은 단순히 허무맹랑한 탁상공론에 그치는 말장난이 아니라 현세에 통용되는 가치관과 그에 기반한 사회질서 및 정치제도 등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상징적테러리즘에 가깝다.
철학이라는 개념이 남는 시간에 한줄씩 읽고 감탄하는 오락거리로 전락해버린듯한 시대에 이런 주장이 와닿지 않는다면 과학으로 주제를 바꿔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근현대문명이 발달한 핵심적배경이 기술의 발달과 종교기반 정치제도의 해체였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과학 역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모독한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의 반항적 생각을 빼놓고 그 역사를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해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는 말에서 이해하는 바는, 거스를 수 없는 진리, 즉 과학이 매장해버린 하나님의 빈자리를 스스로 대체하는 또다른 불가항력에 가깝다.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당시 미국과 서유럽국가들에서 백신접종에 대한 음모론이 난무하는 등 강한 저항이 일었을 때 난해한 의학용어를 알지못해 관련논문에 접근할 수 없었던 다수의 대중을 설득하려 나섰던 “관련분야 전문가"들의 책무는 과거 바티칸에서 라틴어로 쓰여있는 성경을 읽도록 교육받은 카톨릭 성직자들의, 신의 말씀을 매개하여 우매한 백성들을 계몽시킬 사명과 닮아있다. 다시말해 오늘날 과학이 갖는 권위는 중세시대 교황의 상징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듯하다.
유럽에서 대학교는 본래 정치와 사회적통념으로부터 어느정도의 거리를 보장하여 별난사람들이 위험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던 독립적인 기관의 의미가 컸다. 오늘날 대학교의 후원 및 투자구조를 고려할 때에 이런 역할은 더이상 기대하기 힘들지만 이런 역사를 겪은 사회에서는 지식인에 대한 인식과 학문이 갖는 의미가 사회통념에 순종하며 기득권을 누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와 달리 미국과 일본, 한국에서의 대학교는 마치 직업양성학교의 유의어처럼 되어 사회에서 미리 정해놓은 자리에 알맞는 인적자원을 가공 및 생산하는 인간공장같은 느낌이 더 강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런 비판에는 일반화와 과장이 섞여 있다) 같은 철학, 과학의 탈을 쓰고 있어도, 같은 교수직을 맡고 있어도, 이것들이 사회 내에서 맡고 있는 역할과 지위는 천차만별이다.
국내 인문학계에서 번역하는 유럽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불완전한 번역이라기 보다는 완전한 오역에 가깝다. 독일철학의 핵심인물들인 칸트와 헤겔은 가장 상투적인 말들을 핵심개념으로 정해놓고 생각의 틀을 만들고자 노력했지만 이들의 영어, 한국어, 일본어 번역은 모두 난해하거나 해괴한 용어들로 원문을 번역해 사실상 엘리트들의 전유물, 즉 교양의 일환으로 철학의 의미를 퇴색시켜버렸다. 이러한 악습은 현대프랑스철학을 기괴한 언어로 번역하는 풍토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 사이에서 으레 받아들여지는 통념으로 자리잡아 진지한 얘기를 할 때 상투적인 언어를 쓰는 것이 마치 천박한 행동인 양 멸시하는 괴팍한 풍습을 이뤄내는데에 일조했다. 본래 동시대를 사는 사람이 어느날 책을 집어들고 상식을 깨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매뉴얼이 되어야 할 철학책들은 엉터리번역과 폐쇄적인 지식인 커뮤니티의 관례에 학대받아 접근할 수 없는 교양서적, 즉 특권계층의 표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별볼일 없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미국의 문학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이 지적했듯 오늘날 우리는 지구종말, 인류멸망의 상상은 쉽게 하면서 우리가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방법과 논리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한다. 만약 오늘날 개개인, 각자의 다양한 고충이 해법을 찾으려면 그것은 소수의 엘리트가 대학교건물 안에서 천재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하거나 책임감있는 정치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혁신적인 법안을 논의함으로써 대신 해결해주는 형태는 아닐 것이다. 각자가 처한 특수한 상황에 맞는 새로운 대응은 그 상황을 직접 겪는이의 깨달음과 생각의 전환, 동기부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고, 그것을 다른이들과 논의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학문의 역할이다. 오늘날 대학교에서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