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무녀(巫女)에게 곁을 내어준 까닭

조선 제사의 역설

by 임찬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조선의 정신사(精神史)를 들여다보면 기묘한 패배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다. 건국과 동시에 불교를 산중으로 내몰았고, 도교의 제단들을 혁파했다. 표면적으로 조선은 주자(朱子)의 이성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유교의 제국’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견고한 성리학의 둑 아래로, 실은 무속(Shamanism)이라는 거대한 물줄기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조선 성리학은 불교와의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샤머니즘과의 전쟁에서는 끝내 이기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타협하고 말았다. 그 결정적인 패배와 타협의 현장이 바로 ‘제사(祭祀)’였다.


본래 주자학에서 말하는 제사의 원리는 건조하리만큼 이성적이다. 성리학의 세계관에서 귀신(鬼神)이란 인격적 실체가 아니라 음양의 조화, 혹은 흩어지지 않은 기(氣)의 잔상일 뿐이다. 조상이 죽으면 혼과 백은 하늘과 땅으로 흩어지는데, 자손의 혈기(血氣)와 감응할 수 있는 유효기간을 대략 4대, 즉 100년 정도로 보았다. 그래서 4대가 지나면 기가 다 흩어졌다고 보고 위패를 땅에 묻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것이 ‘천신(天神)’과 ‘인귀(人鬼)’를 엄격히 구분하려 했던 주자의 귀신론이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토양은 이 차가운 이성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뜨거웠다. 조선 백성들에게 조상은 기가 흩어져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내 곁에 영원히 머물며 복을 주고 화를 막아주는 절대적 ‘신(神)’이어야 했다. 이 지점에서 첫 번째 균열이 발생했다. 유교적 ‘효(孝)’의 윤리가 무속적 ‘영혼 불멸’ 사상과 결합하며, 제사는 돌아가신 부모를 추모하는 의식을 넘어 조상신에게 복을 비는 기복(祈福) 행위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균열이 댐의 붕괴로 이어진 것은 16~17세기의 대혼란기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재앙 앞에서, 고상한 성리학적 이념은 백성들의 배고픔과 공포를 해결해주지 못했다. 당장 내 아이가 죽어나가는 현실 앞에서 백성들은 ‘이치(理)’를 따지는 선비보다, 당장 굿판을 벌여 귀신을 달래주는 무당에게 매달렸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유교의 종주국 명나라가 강요한 ‘관우 신앙’이었다. 명나라의 요구로 조선 땅에 세워진 관왕묘(관우 사당)는 성리학자들에게 딜레마였다. 관우는 내 조상이 아닌 남의 나라 장수이자 귀신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제사 지낼 명분이 없는 ‘잡신’에 불과했다. 하지만 관우가 가진 ‘충절’이라는 유교적 가치 때문에 조선 조정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치명적인 선례가 되었다. “충절의 화신이라면 남의 귀신에게도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논리는, 곧이어 “영험하다면 굿을 통해 남의 조상이나 원혼에게도 빌 수 있다”는 민간의 무속적 논리에 면죄부를 준 셈이 되었다.


결국 17세기에 이르면, 사대부들조차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무속을 ‘음사(동네 잡신 제사)’라 비난하며 글을 썼지만, 밤이 되면 아픈 자식을 위해 무당을 불렀다. 임방의 《천예록》에 실린, 죽은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네가 차린 제사상은 맛이 없어 못 먹고, 강가에서 무당이 차린 굿판에 가서 배불리 먹었다”라고 꾸짖었다는 이야기는 당시의 웃지 못할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는 유교의 엄숙한 제례보다 무속의 떠들썩한 굿판이 조상을 섬기는 데 더 실질적 효능이 있다고 믿는, ‘패배한 성리학’의 자화상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선은 은(殷) 나라의 주술적 ‘제(帝)’ 신앙을 주(周) 나라의 인문적 ‘천(天)’ 사상으로 극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유교의 제사는 무속의 굿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고, 오히려 무속의 생명력에 기생하여 ‘무속화된 유교’로 변모했다. 조선 성리학이 쌓아 올린 높고 견고한 이성의 성벽 안에는, 사실 삼한 시대부터 이어져 온 샤머니즘이라는 오래된 본능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첨단 과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굿을 하고, 정치와 사업의 중대사 앞에서 점을 치는 모습—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500년 전, 이성보다 생존과 기복을 택했던 조선의 제사가 남긴, 아직 끝나지 않은 타협의 결과물이다.

작가의 이전글질문이 지식을 대체하는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