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왜 늘 ‘생각의 끝’에서 태어나는가?

혐오는 생각을 멈춘 자리에서 자란다

by 임찬수

우리는 흔히 혐오를 무지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몰라서 싫어한다”는 설명은 직관적으로 그럴듯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혐오는 단순한 무지라기보다 이해를 멈추기로 한 선택에 더 가깝다.


인간은 본래 복잡함을 견디는 존재가 아니다.

세상은 너무 많은 원인과 맥락, 불확실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경제는 흔들리고, 기술은 빠르게 바뀌며, 사회적 지위는 언제든 위태로워질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은 끊임없이 설명해야 하고, 판단해야 하며,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부담이 커질수록 뇌는 가장 싼 선택지를 찾는다. 그 선택지가 바로 단순화다.


혐오는 이 단순화의 가장 빠른 형태다.

복잡한 문제를 구조나 제도가 아니라 특정 집단의 성격으로 환원하는 순간, 사고는 멈춘다. 설명은 필요 없어지고, 분노는 방향을 얻는다. “그들이 문제다”라는 문장은 불안을 잠시 낮춰준다. 혐오는 이처럼 개인에게 심리적 보상을 제공한다. 불확실한 세계에서 자신이 옳은 편에 서 있다는 감각, 도덕적 우월감, 그리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말이다.


문제는 혐오가 개인의 감정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혐오는 빠르게 증폭된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알고리즘은 이 과정을 가속한다. 비슷한 분노가 반복 노출되며 정상화되고, 더 강한 표현이 소속의 증표가 된다. 이때 혐오는 더 이상 개인의 편견이 아니라 집단의 규범으로 변한다.


경제적 조건은 여기에 연료를 붓는다.

자원이 희소해지고, 불평등이 커지며, 사회적 이동성이 막힐수록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중요한 것은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누군가는 부당하게 더 가져갔다”는 감각이다.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시간과 비용이 들지만, 혐오에는 그런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는 종종 정책 실패와 구조적 전환의 고통을 희생양으로 대체한다. 혐오는 값싼 설명이자 즉각적인 배출구다.


정치가 개입하면 혐오는 완성된다.

정치는 본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영역이지만, 혐오는 이를 정체성의 문제로 단순화한다. “우리 대 그들”이라는 구도는 가장 강력한 동원 장치다. 정책의 실패는 외부 집단의 책임으로 전가되고, 불만은 분노로 조직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혐오는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 된다. 반복되는 담론은 상식이 되고, 상식은 제도와 행정의 관성으로 스며든다. 개인이 선의로 행동하더라도, 시스템은 이미 혐오를 재생산한다.


그래서 혐오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혐오는 누군가의 인격적 결함이기 이전에, 불안한 사회가 스스로를 유지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왜 개인이 혐오로 안정을 얻는지를 설명하고, 사회학은 왜 그것이 규범으로 굳는지를 보여주며, 경제학은 왜 특정 시기에 혐오가 특히 잘 타오르는지를 밝히고, 정치학은 왜 혐오가 권력의 도구가 되는지를 드러낸다. 이 네 가지가 맞물릴 때 혐오는 하나의 시스템이 된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단순히 “혐오하지 말자”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혐오를 약화시키는 것은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삶의 안정성과 공정성에 대한 경험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규칙이 공정하다고 느끼며, 문제의 원인이 개인이 아니라 구조로 설명될 때, 사람들은 굳이 혐오에 기대지 않는다. 혐오는 사라지기보다 불필요해진다.


결국 혐오는 생각이 부족해서 생기기보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락받았을 때 번성한다.

혐오와 싸운다는 것은 감정과 싸우는 일이 아니라, 복잡함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를 다시 만드는 일이다. 그 일이 어렵기 때문에, 혐오는 늘 유혹적이다. 그러나 그 유혹에 익숙해질수록, 사회는 점점 더 생각하지 않는 방향으로 굳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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