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스스로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인간이라고 정의했었다. 사람들과 함께 무엇을 하는 일보다 혼자서 하는 일들을 좋아했으니까.
태초부터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독립적으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정규 교육을 받는 동안은 학교가 그저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곧잘 책 속의 세계와 내가 꿈꾸는 환상에 빠져들어서 몸은 교실에 둔 채 영혼은 다른 곳을 유영했다.
대학은 다른 세계인 줄 알았다. 그러다 입학과 동시에 곧 환상임을 깨달았다. 21살 22살 어린 선배들은 왜 자기들과 마주치면 90도 인사를 안 하냐고 1학년 전체를 불러모아서 기합을 주고 동기들은 내가 자기들과 다른 수업을 하나 신청했다고 똑같은 수업을 들어야 하지 않냐고 서운해하며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서 몰려다녔다.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처럼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달라진 게 없었다.
교실에서 책을 읽는 나나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내 모습이나
그럼에도 책을 그렇게 미친 듯이 읽다보면 다른 돌파구가 보이리라 생각했다. 세계를 더 많이 알게 되면 어떤 인생의 답이 계시처럼 언젠가는 내려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세상과 정면으로 부딪치기엔 너무 소극적이었고 야심은 컸던 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답을 찾는 대신 책 안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러는게 마음이 편했으니까
냉소와 반항심을 원동력으로 세상을 살아가던 나는 20대의 끝 무렵이 되자 슬슬 두려워졌다. 내 삶이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이대로 살아간다면 끝은 정해져 있을 거라는 예감. 나에겐 탐독한 책들과 끄적인 글 밖에 남아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걸로 무엇인가 그럴듯한 것을 만들어내는 자양분으로 삼지도 못했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보자는 마음으로 그때부터 마트에서 시음 알바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주일의 금토일 3일만 일했다. 이벤트 업체로부터 시음 행사가 열리는 마트를 배정받고 아이스박스를 챙겨서 마트를 찾아가서 내 시음 매대를 찾고 아이스박스의 얼음을 채우고 음료를 차게 만든 다음 행사 제품이 진열된 곳으로 가서 하루종일 시음을 권했다.
지나가는 사람 모두에게 시음을 권하는 멘트를 앵무새처럼 고속도로 가판기에 녹음되어 틀어놓은 테이프처럼 했다. 진열장의 음료는 차례대로 비워지고 나는 4000원 5000원짜리 음료들을 곧잘 완판했다. 그것이 내가 판매를 업으로 삼은 것의 시초였다.
플라스틱 병에 든 오렌지 쥬스
지금도 마트에 가면 오렌지 쥬스가 즐비된 곳 앞에 서서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열심히 팔았던 쥬스. 그 노동은 생각보다 적성에 맞았고 작은 효용감을 차곡차곡 나에게 심어주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대통령도, 의사도, 변호사도 아닌 무엇인가 창작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예술가가 될 테야 어떤 분야이든, 이런 포부를 가지고 살아왔는데 기성품을 파는 일이 즐거웠다. 그리고 손님으로서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과 스몰 토크를 하고 말을 하는 것도 내가 예상한 것보다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아니었다.
성실하게 물건을 팔고 매출이 나오자 이벤트 업체도 나를 좋게 보았고 이어서 일을 계속 주었기에 우리 지역의 온갖 마트를 발품 팔아 다니며 작은 물건들을 팔았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이 일을 업으로 삼아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정규직으로 판매사원이 되었으니까. 쥬스와 치약, 맥주, 와인, 명절 선물 세트, 영양제, 골프복, 여성 의류, 쇼파, 시계 등등 품목을 가리지 않고 나는 물건을 팔았고 어떤 물건이든 곧잘 팔았다. 너스레를 잘 떨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싹싹하게 굴지는 못했지만 성실하고 친절하고 꾸준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이 일이 나에게 의외로 나쁘지 않았던 것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이지만 한편으론 독립적으로 혼자 하는 일과 다름없기도 해서였다. 특히 정규직이 되기 전에 아르바이트로 판매를 할 때는 그 물건과 내가 한 조를 맞춰서 일을 하는 거라 다름없었다. 나는 물건들과 손발이 척척 맞았다. 손님들은 기껏해야 내 앞에서 5분 이상 머무르지 않는다. 나는 흘러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든 그렇게 상처받지 않았다. 오히려 내성적이라서 사람들에게 말을 잘 못 거는 내가 이렇게 물건을 팔 명분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사람 구경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사무실이 아닌 탁 트인 열린 몰이라는 공간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일은 재미난 일이었다. 나에겐 그런 호기심이 있었다. 내가 1차원적으로 이해하던 인간에 대한 복합성에 대해 아주 뒤늦게 조금씩 이해하고 배워가는 과정을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겪었다. 그렇지만 오래 일할수록 나의 한계도 실감했다.
정규직으로 본격적으로 판매자가 되면서 여성 의류 둘째로 일하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어떤 곳에 소속되어 상사를 두고 일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성실한 둘째였지만 그렇게 일하면서 내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를 절감했다. 나는 세상에 반항아였지만 제대로 내 생각을 말하거나 항변하지 못했다. 그저 네로 일관했다. 그렇게 업무는 늘어가고 백화점 vip고객들을 상대하면서 돈이 없는 나는 현대의 사회란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이루어진 사회임을 절실히 실감하며 정신적으로 계속 타격을 입었고 결국 내가 관두는 것으로 그 일은 마무리되었다. 운이 좋게도 다음에는 중소기업 시계 매장의 매니저로 일하게 되었는데 내가 관리하고 이끌어야 할 직원을 두는 것도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고 나는 그때도 그들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받아주다가 막판에 불만을 터뜨리는 걸로 서툰 나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확인했다.
그 과정은 어찌보면 누구나 겪는 처음이기에 서투른 일련의 사회화 과정이었고 나도 그 시간들을 통과해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돌이켜 봤을 때 나는 인간 관계에서 취약한 부분들이 많았고 그것은 나 스스로는 독립적이라고 여겨왔지만 사실은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아가는 시간이었다. 내가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보다 어떤 면에서는 나야말로 철저하게 서투르다는 것을 30대가 되어서야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다. 단순히 혼자서 영화관에 가고 밥을 먹는 것이 익숙하고 좋다고 해서 독립적인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타인과의 부대낌을 통해 알았다. 그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나 자신으로 설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책은 거의 펼쳐보지 않은지 오래였고 고된 몸의 노동에서 해방된 날은 그냥 멍하니 티비를 보고 인터넷을 유영하고 오랜 친구와 만나서 수다를 떠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런 시간들이 또 쌓이자 다시 생각이 많아졌다. 이 일을 평생 하면서 살 자신이 있는가, 나는 정말로 이 일을 좋아하는가 하는 근원적이 물음이 다시 생겼다. 쳇바퀴 같이 이어지는 생활에 적응을 얼추 해서 정직하게 노동을 통해서 돈을 벌고 있다는 감각은 뿌듯함을 주기도 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더 나은 미래는 그릴 수 없었고 앞으로의 내 삶도 뻔하게 정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들자 문득 두려워졌다. 나는 인스타를 개설하고 매일의 출근 착장을 올리고 독서를 하고 글을 쓰고 영어 공부를 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씩 무엇인가를 시작하자 삶은 또 다른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 안의 표현과 창작의 욕구는 거의 꺼져가는 불씨라고 생각했지만 그 작은 불꽃도 어떤 기폭제만 있다면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꿈꾸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그 꿈을 완성 시켜보고 싶었다.
브런치에 작가가 되는 것은 나의 그런 열망에 쐐기를 박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끄적이는 글이 아닌 완성된 글을 쓰는 것이 오랜 글쓰기 공백으로 너무 힘들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완성을 해볼 필요성이 있었다. 자꾸만 부끄러워 도망가는 나를 잡아채서 데리고 온다. 이제까지는 끝끝내 나를 소환해서 흰 종이 앞에 대면시키는데 실패했지만 앞으로는 도망가는 나를 100번 다시 붙잡아서 책상 앞에 앉히고 글을 쓰게 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