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소비자의 매일의 행복

by 서진

마트를 둘러보는 일은 부담이 없어서 좋다. 뻔뻔한 소비자가 되지 못하는 나는 옷을 살 생각도 없으면서 백화점 여성복 코너를 여유있게 돌아보지 못한다. 매장과 매장 사이를 고고하게 유영하듯 보이지만 디스플레이나 상호를 보고 흥미를 느끼는 매장에 선뜻 들어가서 느긋하게 소핑을 즐길 여유와 배짱이 결코 없는 것이다. 오늘은 코트를 사야겠어. 라고 무엇인가 옷을사기로 굳게 마음먹은 날 큰 결심을 하고 매장 안까지 겨우 들어설 수 있다.

사실 나는 몇 년간의 판매의 경험으로 판매자의 입장과 생각을 알 수 있게 되었고 당당하게 물건을 구경하는 일이 머릿속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임을 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비자의 입장으로 백화점에 들어서게 되면 매장을 지키고 있는 판매 점원들이 마을을 지키는 초입의 정승처럼 느껴지고 그들의 포스에 기가 눌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저 발길 가는대로 백화점에 들어갔다가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괜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 다음에 역순으로 한층한층 내려오면서 재빠른 아이쇼핑을 하는데 그 과정이 바깥을 산책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 풍경이 길거리와 호수와 산책로에서 백화점 통로와 매장으로 바뀌었을 뿐. 그렇게 매장 안에 자리한 점원들의 시선을 흘끔힐끔 피하며 가시방석에 앉은 마음으로 물건을 훑어보다가 어느새 지하 1층(대부분 식품이 자리한 층)에 다다르면 그제서야 마음이 느긋하게 풀어진다.

식품관을 구경하거나 마트를 돌아보는 일은 나같이 소심한 소비자에게도 쇼핑의 단계를 나눈다면 가장 낮은 단계에 해당될 것이다. 의식주에서 “의”과 “주”도 꼭 필요한 요소 임에 틀림없지만 매일매일 음식을 원하는 몸과 동거동락하는 우리 인간에게 식품을 소비하는 일은 소비의 죄책감을 가장 덜어주는 일, 배달 음식도 아닌 신선하게 쌓여있는 식재료가 눈앞에 쌓여있는데 그것을 구입하는 행위는 일상에서 나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소비의 즐거움을 획득하면서도 소비에서 오는 현타는 가장 덜 느끼게 하는 행위이니 더할 나위 없다.

요리를 직접 하기 전의 마트에서의 나의 동선은 뻔하고 간단했다. 주로 메인 식재료가 있는 육류, 생선, 식품 코너가 아니라 군것질로 적합한 스낵과 음료 과일 코너에 오래 머물렀다. 나의 취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스타에 종종떠서 눈에 익은 치즈와 수입된지 얼마 안 되어 인플루언서들만 미리 맛본 요거트를 괜히 집어들고 이러저리 패키지를 살피다가 오늘은 패쓰하지 뭔 하는 무심한 손길로 내려놓곤 했다.

(한번쯤 그런 것들을 사보기도 했지만 터무니없는 가격에 비해 만족도는 높지 않았다)

그리고는 역시 과자 코너와 과일 코너에 머물며 그날 먹을 간식의 조합이 얼마나 적절한가에 대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하면서 가장 후회가 적을 조합을 선택하고자 애를 쓰는 것이다. 아주 신중을 기하는 과정으로 자칫 잘못하다간 그날의 티타임 시간이 망쳐질 수 있기 때문에 마트 통로에 서서 고민은 깊어진다. 짭쪼롬한 과자와 과즙이 풍부한 과일을 살까. 오래 씹어먹을 수 있는 어포와 달고 감칠맛이 도는 과자를 같이 살까. 집에 남아있는 음료와는 이 둘 조합 중에 무엇이 더 어울리나. 이런 질문들을 하면서 눈앞에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의 면면을 살핀다.

요리를 하면서 스스로 내 끼니를 해결하게 되고부터는 오프라인 마트보다 마켓컬리나 쿠팡같은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해서 일요일에 일주일치 장을 미리 보는게 습관이 되었는데 하루하루 장을 보는 것은 장 보는 시간에 소비되는 시간뿐만 아니라 메뉴를 구성하고 요리를 하고 그 모든 과정 자체가 품이 너무 많이 드는 일이었기에 효율성 측면에서도 장을 한꺼번에 볼 필요가 있었다. 한식과 양식, 일주일 중에 요리하기 싫은 만사가 귀찮은 컨디션의 날을 대비한 간편 식품, 그 사이사이에 빠질 수 없는 빵식, 계란과 두부 그래놀라와 오트우유, 토마토, 양파, 파 등 항상 필요한 재료들은 베이스로 두고 장보기를 규칙적으로 하다보니 그 안에서 체계가 생기고 나만의 룰도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다. 그 기본을 토대도 기출 변형을 거치면 일주일치식단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집 문 앞까지 배달해주는 장보기 시스템에 익숙해져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산책을 하고싶을 때나 불현듯 그 순간에 당장 먹고 싶은 메뉴가 생겼을 때 동네의 20분 거리의 있는 대형마트를 자주 들락거렸다.

경제적 부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지는 현재에 이르러 소비의 규모와 형태는 부에 따라 너무나 다르겠지만 마트의 식품 코너의 영역에서는 아직도 어느 정도 동등한 소비자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비록 한 송이에 3만원 하는 샤인머스캣이나 좋은 사료만 먹여 키운 1등급 한우를 카트에 턱턱 담아내진 못하더라도 그것을 들여다보는데 누군가 눈치를 주거나 눈치를 주지 않음에도 스스로 주눅이 드는 기분은 느끼지 않아도 된다. 가난한 소비자는 오늘도 마트의 식품코너를 돌며 행복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어린 시절 문방구 앞을 지나치지 못해 그 앞을 서성이고 있으면 한숨을 폭 내쉰 엄마가 딱 하나만 사기다 하고 나를 안으로 들이밀면 신나서 그 안으로 뛰어들던 시절처럼 스스로 오늘도 맘에 드는 거 딱 하나만 골라야지 하고 마트에 들어설 때의 순수한 즐거움, 소비는 요즘 시대에 애물단지 같은 단어가 되어서 현명한 소비란 뭔가란 난제에 항상 허덕이게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작은 선택의 즐거움을 주는 단어로 순수하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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