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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Dec 15. 2021

이 사진 안 본 눈 삽니다.

 글을 쓰면서 첨부할 사진을 찾다 오랜만에 폴라로이드 사진을 넣어둔 박스를 꺼냈다. 몇 년째 옷방 맨 위 구석에 놓여있던 터라 뚜껑엔 뽀얗게 먼지가 앉았고, 대충 닦아낸 뒤 꺼낸 박스엔 일을 하며 찍어놓은 폴라로이드 사진, 각종 증명서류, 동료들에게 받은 편지, 청첩장 등이 오랜 시간을 기다려 빛을 쬐었다.




 승무원을 하며 사진으로 그 기록을 남기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내에서는 승객의 수에 따라 다르긴 했으나 앉아서 밥 먹을 새도 없이 바쁠 때도 많았고 비행이 끝나고 호텔에선 반 혼수상태가 되어 잠들 때가 다반사라 아쉽지만 사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내가 일하던 때는 스마트 휴대폰이 대중화 되기 전이고 카메라 화질마저 엉망인지라 디카를 들고 다녀야 했지만 기록을 남기고자 부지런을 떨지 않았던 이유도 사진이 많지 않은 연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행기 내 어린이 승객이나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승객들을 위해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비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허니문이나 생일같이 특별한 날을 맞은 승객이 그다지 많지는 않은 터라 한 바퀴 돌고 나면 나머지 필름은 가끔 우리가 몰래 빌려 쓰곤 했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살펴보며 잊고 있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힘들어도 으쌰 으쌰 열심히 일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체류지에서 식사라도 한 끼 하며 돌아오는 길엔 어느새 화기애애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던 인싸 기질 가득한 젊은 시절의 우리들. 딸과 함께 사진들을 보며 그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다 문득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이메일 계정이 떠올랐다.


 롱디 커플이었던 남편과 나는 주로 이메일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시차가 뒤죽박죽이다 보니 전화 통화도 힘들었고 요즘처럼 카카오톡이나 페이스톡이 가능하던 때도 아닌 싸이월드 시절, 일단 비행을 가버리면 체크할 수 있는 것이 이메일 밖에 없었다. 그 메일 계정엔 친한 친구 몇과 남편을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받은 메일을 저장해 두었는데 생각난 김에 로그인해보기로 했다. 오래 사용하지 않다 보니 휴면계정으로 바뀌어 비번을 다시 설정하고야 접속할 수 있었다. 카테고리 속 남편의 이름이 보인다. 마치 타임캡슐을 열듯 설레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클릭했다.


할말하않

 

 결혼 후엔 애정 어린 호칭이 아닌 심부름에 가까운 목적으로 지긋지긋하게 이름을 불러대 내 기필코 어렵고 긴 이름으로 개명을 해 버리리라 다짐하기도 했는데 메일 속 남편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참으로 낯 간지럽고 다양하다. '허니', '달링', '자기야' 등등 으아아아 소리를 지르게 만드는 낯선 부름들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메일을 하나씩 열어본다. 하나 같이 밥은 먹고 다니는지,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온통 나에 대한 염려와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불과 어제, 내가 먹고 싶은 삼겹살을 가볍게 무시하고 수제비에 김밥을 사주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메일 속 남편은 먹고 싶은 건 다 이야기 하라며 나를 챙겨 먹이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아 보였다. 심지어 스테이크도 많이 먹으란 말엔 실소가 터졌다. 소고기라니... 메일 중 몇 개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십 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파일이 열리긴 하는지 호기심에 눌러보았더니 다운로드가 된다. 사진 속 우리는 참으로 어리고 말랐고, 어디서든 찰싹 붙어 있었다. 독일 쾰른 대성당 꼭대기에서 손을 꼭 잡은 채 입 맞추는 사진을 발견했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아! 미쳤네, 미쳤어!!!"라며 박장대소를 했다. 컴퓨터를 들여다보던 엄마의 괴성에 딸아이가 다가왔다. "OO아, 이것 좀 봐. 이거 아빠가 엄마한테 보냈던 메일이랑 사진이야." 하나하나 메일을 읽어보던 아이는 "엥? 완전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은데?"라며 좀처럼 믿질 않는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냐 싶지만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헉! 소리와 함께 어이를 상실한 표정이다. 곧 둘 다 바닥을 뒹굴며 이 오그라드는 과거에 깔깔거리며 폭소했다.




 남편은 무슨 일인가 싶어 힐끗 보다 방으로 들어갔다. 쪼르르 따라 들어간 딸이 아빠 어떻게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느냐 따지자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며 어리둥절해한다. 눈물까지 흘리며 웃던 내가 상황을 설명해주니 그제야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딸은 뽀뽀하는 엄마 아빠 사진에 눈 버렸다며 두 손을 내저었다. 넌 뭐 손만 잡고 다닐 것 같냐라는 말엔 절대 결혼도 하지 않겠단다. 새빨간 거짓말! 

 남편과 잠시 옛 추억에 젖었다. 아직도 네가 변한 것이냐 내가 변한 것이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나 딸의 판정으론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애교란 없는 것 같단다. 의리로 뭉친 말 그대로 현실 가족이 되었지만 소중했던 시간을 함께한 나의 달링님과 쿠폰 기간 끝나기 전에 1+1 커피나 한잔 해야겠다. 그리고 딸~ 엄마 오늘은 아빠랑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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