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거짓들이 이어지면 사회는 정말 균열될까?
오늘도 어김없이 오후 4시 30분, 식당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할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출근하면 사장님은 보통 홀에서 잠시 쉬시기에, 전화는 자연스레 내 몫이었다. “젓가락이 안 왔어요.”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배달 음식에 젓가락이 빠졌다는 말에 나는 일단 죄송하다고 응대했다. 사장님께 조금 전 나간 배달 건에 대해 여쭤보니, 분명히 넣었다고, 오히려 음식 주문량이 적어 한 개만 넣으려다 두 개를 챙겨 넣은 기억까지 생생하다고 하셨다.
나는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해 수화기를 사장님께 넘겼다. 전화기 너머 손님은 자신이 일하는 곳이 옷가게라 젓가락이 없다며, 가져다 달라고 재차 요구하는 듯했다. 결국 사장님은 “알겠다”라고 답한 뒤, 배달 대행비 3,500원을 아끼고 직접 상황도 확인해 볼 겸 젓가락 두 개를 챙겨 가게를 나섰다.
홀에 혼자 남은 나는 밀려드는 손님과 배달 주문을 정신없이 처리하고 있었고, 잠시 후 사장님이 조금은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오셨다. 그 옷가게에 도착해 보니, 직원으로 보이는 세 명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고 한다. 식당 사장이 직접 올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젓가락은 하나만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쪽의 실수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수많은 주문을 처리해 온 경험에 비춰보면, 그런 실수는 극히 드물다. 게다가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젓가락 하나 때문에 "당신 쪽 실수니 다시 배달해 달라"와 같이 요청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호텔이라 젓가락이 없다며 손님께서 미안해하며 가져다줄 수 없냐는 요청을 들어준 적이, 내 식당 경력 10년 동안 딱 한 번 있었을 뿐이다. 아무튼 그날 주문은 2인분 정도였고, 요청사항에 젓가락 개수가 따로 명시된 것도 아니었다. 정황을 종합해 보면, 내 머릿속에서는 "야, 그냥 젓가락 안 왔다고 해봐" 같은 장난기 섞인 대화가 그려지는 걸 막기 어려웠다.
내가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소한 해프닝이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젓가락 하나를 둘러싼 작은 소동 너머로, 우리 사회의 어떤 증상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면, 사소한 거짓말로 타인의 수고를 동원해도 괜찮다’는 생각. 이는 단순한 윤리의식의 해이를 넘어, 공동체의 신뢰라는 사회적 자산을 조금씩 갉아먹는 행위다.
이런 현상은 마치 ‘깨진 유리창’과 같다. 처음에는 사소한 거짓말이나 부정행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그것이 별다른 제재 없이 통용되는 걸 목격하면 죄책감은 점차 무뎌진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가 말한 ‘도덕적 이탈’처럼, “이 정도는 괜찮아”라는 자기 합리화는 더 큰 이탈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된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은, 바로 이 위험한 심리적 경로를 정확히 짚어낸 조상들의 지혜다.
이런 장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 사회가 마치 신호를 위반하며 질주하는 버스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버스에 올라탄 수많은 승객이 이 질주가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침묵으로 동조한다는 점이다. 당장 신호를 기다리지 않아 좋다는 안도감,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기대감 속에서 누구도 운전기사에게 경고의 말을 건네지 않는다.
이 기이한 ‘침묵의 연대’는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나는 그 원인을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몇 가지 구조적 오해와 뒤틀린 가치관에서 찾는다.
첫째는, ‘피해 경험’이 현재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 준다는 ‘선함의 후광 효과’다. 과거 우리 공동체는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겪으며 약자를 보듬는 미덕을 가졌다. 그런데 이 소중한 가치가 어느 순간부터 ‘역사적·구조적 약자 집단에 속한 개인은 모든 상황에서 선의를 가질 것’이라는 맹신으로 변질된 듯하다. 이로 인해 합리적인 논의가 마비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시민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의 채용 기준에서 체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특정 성별에 대한 불평등 혹은 억압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런 ‘후광 효과’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개인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의 무게를 덜어주는 방패로 오용될 위험이 있다.
둘째는, 과거의 기준으로 현재의 갈등을 재단하려는 윗세대의 ‘시혜적 온정주의’다. 특히 사회의 주도권을 쥔 5060 세대는, 자신들의 청춘 시절에 만연했던 불평등을 기준으로 지금의 세상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분들의 기억 속 세상이 ‘남성 7, 여성 3’의 불균형 사회였다면, 지금의 젊은 여성들에게 무언가 보상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의 젊은 남성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7대 3이 아니다. 병역 의무의 무게와 각종 경쟁에서 감수해야 하는 불리함 속에서, 그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49대 51’의 미세한 불리함, 혹은 그 이상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잣대를 들이대는 윗세대의 중재는, 이미 49밖에 갖지 못한 이에게서 5를 더 빼앗아 51을 가진 이에게 얹어주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젊은 남성들에게 단순한 불공정을 넘어, 자신들을 이해하고 보호해 주리라 믿었던 ‘아버지 세대로부터의 배신감’마저 안겨준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 깔린 속물적 가치관과 성공지상주의다.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이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악기를 다루는 능력’ 같은 문화적 소양을 포함하는 반면, 한국 사회는 여전히 자산 규모와 직업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경향이 짙다. ‘어떤 사람인가’보다 ‘어디에 속했는가’를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부모 세대는 자녀에게 공동체적 가치보다는 치열한 생존 경쟁의 기술을 물려줬다. 그 결과, 공정한 규칙에 대한 존중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리가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된 건 아닐까.
결국 오늘의 대한민국은, 신호를 위반하는 버스에 올라타 침묵으로 동조하는 이들과, 그 버스가 내뿜는 매연 속에서 윗세대로부터 배신감까지 느끼며 고립된 이들로 나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잃어버리는 건 단순히 어느 한쪽의 유불리가 아니다. 타인의 수고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 상대의 노력을 존중하는 태도, 그리고 현실에 발 딛고 선 합리적인 기대. 한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가치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허물어지고 있다.
마치 의사가 고혈압 전단계 환자에게 생활 습관 개선을 간곡히 권하듯, 나는 우리 사회에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고 싶다. 이 질주하는 버스가 마침내 멈춰 섰을 때, 그곳이 과연 우리가 꿈꾸던 풍경일지, 아니면 서로에 대한 불신만이 남은 폐허일지, 우리 모두가 함께 성찰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