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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땅에 남은 충격이 없다

<불이 되는 숨> <꿈의 방주 : Hunger stone> <돼지춤>

무장애공연비평웹진 <리액트 re-act>
                           순환의 회복 : <불이 되는 숨>, <꿈의 방주>, <돼지춤>
                                                                                                       글. 리액터 백범, 닻별






                                                        배리어프리 음독



[이미지 20] 2022.09.24. 기후정의행진에서 사람들이 도로에 누워있는 시위를 하고 있다. ⓒ 서울환경연합
기후위기는 기후재난으로 다가오고 있고, 기후재난은 불평등하다. 불평등은 기후위기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원인이다. 소수의 기업과 소득 상위 계층의 더 부유하고 사치스런 소비를 위해 대부분의 탄소가 배출되고 있다. 누군가에겐 ‘기회’가 되고 누군가에겐 ‘재난’이 되는, 이 현실은 정의롭지 못하고 불평등하다. ‘기후위기가 심각하다’, ‘지구가 아프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라는 명제를 넘어서야 할 때다. 심각한 기후위기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고, 기후재난이 누구에게 더 가혹한지를 밝혀야 한다. 온실가스를 줄이는 것만이 아니라, 온실가스를 내뿜지 않고서는 굴러가지 않는 사회경제 시스템을 인식해야 한다. 그 시스템으로부터 누가 이익을 얻고 있고, 누가 희생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기후위기와 기후재난 앞에서 이제 ‘기후정의’를 이야기하는 이유다.
9.24 기후정의 행진, 기후불평등 너머 광야, YWCA




이제 말하기는 끝났고, 행동해야 할 때다. 발화로부터 책임의 균형을 바로잡아야 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화석연료 회사들, 부유한 국가들, 정치인, 부자, 그리고 때로는 심지어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곤 한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따지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오슬로 국제기후환경연구센터의 글렌 피터스 연구부장은 “기후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고 더 강력한 행동을 하게 할 때, 책임을 따지고 탓하는 것은 그다지 유익한 방법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탓하는 것이라 부르든 말든, 기후위기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해결책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화석연료를 추출하는 사람들, 화석연료로 제품을 제조하는 이들, 이 제품을 규제하는 정부들, 이것을 사용하는 소비자들 등이 배출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꼭 그들이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안정적이고 깨끗한 전기를 공급받지 못하는 이들은 전기를 얻기 위해 탄소배출이 많은 디젤 발전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온실가스를 배출하지만,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 BBC코리아 ‘기후변화,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




기후위기는 모든 사람의 삶에 위협을 준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매우 불공평한 문제이다. 기후위기를 유발하는 온실가스를 가장 적게 배출하는 사람들이 기후위기에 많이 노출되고 피해를 받기 때문이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가장 적은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와 캄보디아, 라오스 등 저개발 국가들은 전체 배출량의 3%를 차지하는 데 반해 배출량이 가장 많은 중국, 미국, 인도 등의 선진국들은 68%를 배출한다.


[이미지 21] 기후변화가 농업에 미치는 영향 ⓒ FAO


저개발 국가의 사람들은 대부분 농업과 임업, 어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이들의 경제활동은 기후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동시에 기후변화에 가장 많은 피해를 받는다. 개발도상국은 이미 너무 더운 날씨로 농사지을 땅이 사라지고, 농장들의 작물 수확량이 줄어들고 있다. 이는 미래에 식량안보와 기근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래프 3] 전 세계 평균 해수면 상승 정도 ⓒ USGCRP (U.S. Global Change Research Program)


또한, 섬나라와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해수면 상승으로 지역사회 전체가 이주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고, 수많은 기후난민을 만들어냈다. 1880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평균 해수면은 8인치(20.32cm) 상승했다.( 기후불평등/기후위기가 불평등과 연결되는 이유, 한국희망재단 )


리즈 대학 생태경제학과 교수 줄리아 스타인베르거의 말에 의하면, 기후위기의 책임을 따져보는 일은 공급망 시스템의 단면을 보는 것이고, 그것만으로는 책임을 배분할 수 없지만, 시스템에 대한 다른 이해가 가능하다. 궁극적으로는 누가 선택권을 가졌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선택권이 어떻게 얻어지고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되묻는 것을 통해, 어쩌면 기후와 관련된 것들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 BBC코리아 ‘기후변화,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




그린피스 칼럼에서 과학자들의 견해는 지금까지의 대응은 너무 늦고 미흡하며 심지어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여러 이익을 가져오는 적응 시도가 늘고 있지만, 진전은 불균등하고 적응 수준의 차이도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의 노력이 파편화되어있고, 규모가 작고, 덧대기식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부적절한 집약적 활동은 단기적으로 생태계에 도움을 주지만, 형평성이나 생물다양성 등 생태계 기능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우리는 신속하게 온실가스를 감축해야 하는데, 이는 기술적 방법이 아닌 정의로운 시스템 전환과 <돼지춤>이 제안한 나누기를 통한 생물다양성이 공존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그린피스는 2030년까지 육지와 해양의 30% 이상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보호해야 하고, 기후불평등에 대응하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스스로 이 문제를 전체적으로 직시하고, 정직한 자세로 냉혹하게 미래를 함께 관리해야 한다.     


인식론적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고, 팬데믹(<불이 되는 숨>에서의 ‘발화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사고방식의 변화를 겪으며, 무관심했던 사람들도 마침내 심각성을 호소하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당장 스타벅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카페나 올리브영에만 가 봐도 이를 실감할 수 있는데, ‘MZ세대를 겨냥한 친환경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왕왕 목격된다. 정작 스스로를 ‘MZ세대’라고 정체화하거나 부르지 않는 ‘MZ세대’가 감각하는 지금의 비거니즘은, 일상적 모순과 충돌 그 자체이다. 비거니즘의 실천이 ‘보편화’되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비건인들이 경험하는 ‘특수한’ 어려움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식하는 환경(풍경)의 아이러니함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건 카페를 찾아갔는데 바로 옆에 ‘애견샵’이 있다든지, 비 오는 개천 산책길에서 흙냄새 맡으며 비인간 동물들을 살피고 있는데, 옆 도로변 고깃집 연탄불 냄새가 훅 들어온다든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것들의 공존은 비거니즘 보편화의 과도기를 일상적 공간에서 체감하는 꼴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애매모호한 ‘기후위기 극복’ 같은 소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명확한 대책과 계획적이고 단계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기후감수성과 다양성감수성이 ‘(MZ세대 사이의) 유행’으로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꿈의 방주>의 통찰대로 기존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의 전복으로부터 행동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국가적세계적 차원의 기후 정의와 개인적집단적 차원의 기후 적응’, 즉 개인과 국가 모두의 적극적 행동이 절실하다. 더 이상 이 땅에 남은 충격(발화점 혹은 기회)이 없다.    


마무리하며,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말미에 있는 후기 ‘변태하기 위하여’의 일부를 옮기어 둔다.






흔히 말하는 “의식은 바뀌었는데 몸이 바뀌지 않았다.”라는 개탄은, 일상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일상을 넘거나 일상을 극복하는 정치가 아니라, 모든 정치와 운동은 일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머리(mind)가 변하는 것이 ‘의식화라면, 몸(mindful body)이 변하는 것은 ‘변태다. 그래서 언제나 혁명보다 개혁이 어려운 거다. 혁명은 이름과 의식을 바꾸는 것이지만, 개혁(改革, re/formation)은 몸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개혁은 글자 그대로 살갗을 벗기는 것. 피가 쏟아질 수밖에 없다(때문에 어느 시대나 개혁을 외치는 지도층 스스로 피 흘리는 고통을 보여줄 때,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주장으로 유명한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걸작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는 ‘인간의 확장’인데, 오늘날 인터넷, 휴대 전화가 우리 몸의 일부이듯, 몸이 인식의 미디어(매개체)라는 이야기다. 앎은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에게로 자기 몸을 확장하는 과정이다. 인식과 발상의 전환을 경험하게 되면, 다시는 알기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안다는 것은 자신의 확장된 몸에 사로잡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는 새로운 인식을 의미하는데, 앞에 말한 것처럼 이는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서 발생한다. 알이 부화하여 나비가 되는 것처럼, 몸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하는 변태(變態 metamorphosis)의 고통을 뜻한다. 금연, 다이어트, 일찍 일어나기, 관계ㆍ초콜릿ㆍ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등 보통 사람들의 수많은 결심과 계획이 대개 실패하는 것처럼, 자기 변태는 너무나 어렵다. 변태는 기존의 나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며, 미래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어 두려운 것이다. 어렵지만, 모든 변태는 의미를 생산한다. 의식화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변절이 불가능하다.     


(중략) 


나의 변태는 곧 사회의 변화이다. 사회와 나는 연속선상의 한 몸인데어느 지점에서 그 몸을 자를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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