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직업이 아니다.
여름을 맞이하여 다이어트를 위해 운동센터에 방문하여 신청서를 작성했다. (이쯤 되면 이런 일은 연례행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름부터 나이, 키, 몸무게까지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살을 빼기 위해 시작한 일이니까 몸무게를 공개하는 것쯤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의 펜질은 어김없이 그 칸에서 '또' 멈추어버렸다. 그것은 바로 '직업란'이다. 운동을 위한 신청서에 대체 왜 직업을 적어야 하는가. 물론, 필수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직업란을 공란으로 남겨놓는다면 누구든지 짐작할 것이다. 아, 저 사람은 직업이 없구나. 혹은 직업을 밝히기 싫구나. 나는 타인에게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 싫었다.
나는 분명 아침에 눈뜨자마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시도때도 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일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까.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들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직업은 '엄마'라고 이야기할 수 있고, 듣는 이로 하여금 그래, 그렇구나. 너의 직업은 엄마구나.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있구나. 그것보다 더 훌륭하고 보람찬 일은 없지. 하고 공감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직업란에 당당히 '엄마'라는 글자를 적을 수 없는가.
육아라는 일을 나는 한 번도 생산적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다. 의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았으면 엄마는 아이를 사랑으로 키워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 엄마는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이 된다. 아동학대 기사를 보면서 학대를 가한 부모에게 짐승만도 못하다는 비난과 욕을 퍼붓는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생산하는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직업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마땅히 해야 하는 일. 그래서 문득 나도 남편이 회사에서 월급을 받듯이 엄마라는 이름으로 월급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월급을 받는다면 직업란에 당당히 엄.마.라는 글자를 적어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해본다.
지금도 간혹 처음 만난 사람들이 나에게 "일 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속으로 두뇌회로를 돌린다. 뭐라고 해야 하지. 한다고 할까. 쉰다고 할까. 아니. 논다고 할까. 아니지. 내가 현재 직업이 없다고 해서 노는 건 아니잖아? 세상에서 제일 바쁘다는 명색이 엄마인데, 그래도 논다고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내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이 길어지면 마음이 초조해진다. 그러다 문득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터져 나온다.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10년 가까이 강의를 했는데, 둘째 낳고 하기 싫어서 지금은 쉬고 있어요. 그렇게 5년이나 놀았고 다시 일이 하고 싶어서 알아봤는데 이제는 불러주는 곳이 없더라고요. 하하하. 그래서 지금은 쉬긴 하지만, 곧 다시 일하려고요. 관련 자격증도 따고 있어요.
...... 이 무슨 안물안궁 TMI 남발이란 말인가. 오늘 밤 이불킥 당첨이요. 사장님! 여기 손발 오그라드는 에피소드 하나 추가요!
당당해지고 싶다. 지독하게 당당해지고 싶다. 워킹맘 앞에서 주절주절 나의 상황에 대해 떠들어대며 식은땀 흘리는 대신 노는 게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
두 아이를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고 나면 집에 오자마자 청소, 빨래, 부엌일을 해놓고 잠깐의 여유가 생기면 커피를 마시며 행복해하는 것이 스스로 사치스럽다 여기지 않기를.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브런치 카페에 모여 친구들과 수다 떠는 나의 모습이 '남편이 뼈 빠지게 벌어온 돈으로 아침부터 한가롭게 비싼 밥 사 먹는 부러운 팔자"라는 비아냥에 매몰되지 않기를.
감기라도 걸려 앓아누으면 엉망이 되어가는 집안꼴을 보며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모든 게 내가 아픈 탓이다. 죄책감 들지 않기를 바라며.
엄마라는 두 글자가 당당히 직업으로 인정받길 바라며, 다시는 직업란 앞에서 내 펜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