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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집 근처 연립주택들이 모여 있는 좁은 골목에서 방송 촬영하는 것을 목격했다 촬영장비를 점검하는 듯한 스텝들로 주변은 소란스러웠고 연예인스러운(?) 비주얼의 인물들도 보였다.
저 연예인은 누구일까 하는 궁금한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 구경하고 싶었지만 구경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난 이내 발길을 돌렸다. 나중에 보니 가수 ‘선미’가 솔로 데뷔 전, 연습생 시절에 살았던 집을 찾아가 보는 내용의 프로그램이었다.
우리 집 주변에는 SM과 JYP, FnC 등 인기 아이돌을 배출시킨 대한민국 대표 연예기획사뿐 아니라 연예계 관련 회사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이 키워내는 연습생들 중 많은 이들이 비교적 전월세가 저렴한(?) 우리 아파트를 숙소로 이용한다.
우리 아랫집에도 한 때 연습생들이 살았다.
에너지 넘치는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늘 아랫집에게 죄인이다. '뛰지 마'를 입에 달고 살지만,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아이들은 자주 쿵쿵 뛰었다. 그 탓에 아랫집 주민분을 만나면 늘 고개를 숙이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전했다. 그러면 대부분 “괜찮습니다.” 혹은 “애들이 다 그렇죠.” 등등 훈훈한 답변이 돌아온다.
우리 아랫집에 살던 그 연습생들도 그랬다. 걸그룹을 준비하는 듯한 그녀들은 종종 아이들에게 손인사를 해주기도 하고 '죄송하다' 말하는 나에게 괜찮다며,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니 걱정 말라며 손사래 치기도 했다.
어느 날 그녀들이 데뷔를 하였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보던 트레이닝 복장의 털털한 모습과는 달리 화려한 조명 아래 멋지게 꾸미고 군무를 추는 모습이 낯설었다. 반복적이고 중독성 강한 멜로디의 노래들로 1위를 차지하더니 예능 프로그램을 섭렵하고 그녀들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탑 걸그룹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신기했다. 젊고 예쁜 그녀들이 가수로서 '성공'까지 했으니 얼마나 좋을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겠지? 그녀들의 재능과 젊음, 이른 성공이 매우 부러웠다.
그러던 중 평소와 다름없이 난 두 아이를 재우고 달콤한 육아 퇴근 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의 퇴근이 늦어져 홀로 소파에 앉아 멍하게 있었다. 그 고요함이 너무 좋아서 TV도 켜지 않고 적막이 흐르는 거실에서 고독함을 즐겼다. 그때였다. 젊은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간간히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도 질렀다. 옆집 부부싸움 소리인가? 생각했는데, 이내 그 미약한 소리는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 가만히... 거실 바닥에 귀를 대보았다.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정확하게 귓가를 울렸다.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나 이제 성공하기 시작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방해할 거야? 그만 좀 해!"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랫집 그녀들은 이제 인기를 얻고 성공한 스타가 되었으니 앞으로 꽃길만 걷겠구나 막연하게 추측하고 부러워했는데 난 괜히 힘이 빠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렇게 원하던 '스타'가 되었는데 불행하구나. 행복하지 않구나. 이제 그녀는 어쩌나. 행복하지 않아서 어쩌지?
나는 이제 막 성공가도를 걷기 시작한 그녀가, 인생의 걸림돌이 될만한 어떠한 존재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같은 이야기를 엿듣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녀의 외침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문을 '쾅' 닫고 어디론가 나가는 소리에 나는 귀를 떼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자꾸 울며 소리 지르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얼마나 힘들까. 가족이랑 통화하는 것 같은데... 휴우... 가족 중 누군가가 그녀를 괴롭히나 보다. 등등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지금 아랫집 그녀를 걱정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순수한 걱정이 아니라, 아랫집에 사는 인기 스타를 향한 은밀한 관심, 호기심으로 가장한 가십거리를 찾는 대중의 통속적인 마음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유일하게 나만 알게 된 것 같은 '희열'이었다.
아랫집에 성공한 아이돌 그룹이 아니라, 평범한 회사원 부부가 살았다면 과연 나는 굳이 거실 바닥에 귀를 대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을까. 순간 이런 내 모습이 조금 치졸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 아니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별거 아닌 일일 수 있지만 나는 그녀의 불행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았고 가십거리로 다루지 않았다. 그래야만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몇 곡의 노래를 연속으로 히트 친 그녀들은 몇 개월 후 숙소를 옮겼다. 아마도 여기보다 더 넓고 쾌적한 곳으로 갔을 것이다. 이제는 그녀들을 화면으로만 마주친다. 한때 나의 이웃이었던 그녀들이 나오면 반가운 마음이 들어 아이에게 말한다.
"OO아, 저 누나들! 우리 아랫집에 살았었는데 기억 안 나?"
아이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반가운 마음에 순간 커져버린 내 목소리가 무안해서 화제를 돌린다. 그리고 화면 속 예쁜 그들을 보며 생각한다.
'더 예뻐졌네. 촌스럽지도 않고. 이제 돈도 많이 벌었겠지? 부럽다.'
그게 끝이다. 지금보다 더 성공했으면 좋겠다. 이제 행복해졌을까? 이런 생각은 없다. 여전히 나는 그녀들을 위한 진정한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연예인을 소비하는 대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그게 진짜 '나'인 것 같아서 씁쓸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다 나와 비슷할 거라고 위안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