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A 씨는 왜 우리 아파트에 오는 걸까.
나는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산다 청담동에는 멋들어진 외관을 자랑하는 대형 평수의 고급빌라들이 참 많다. 30년 전만 해도 동네에는 골목마다 단독주택이 빼곡히 있었지만 어느 순간 한강변에 자리한 빨간 벽돌집 주택들을 밀어내고 ‘잘생긴’ 럭셔리 고급 빌라들이 자리 잡았다
내가 사는 곳은 아쉽게도 청담동 고급빌라가 아니다. 매우 평범한 아니 조금 낡은, 1층 현관 입구에 보안시설도 되어 있지 않은 오래된 아파트이다. 멋진 옷으로 갈아입은 청담동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나는 내가 사는 이 아파트가 정감 있다고 생각한다.
봄이 되면 단지에는 꽃들이 만발하고 비 오는 초여름 날에는 달팽이들이 솔솔 나타난다. 무더운 날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물총놀이를 하고 겨울에는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한다. 해가 지면 아이들의 소란 피우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호통치는 할아버지가 나타나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에는 어김없이 수도가 터져 오수가 역류되었다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놀이터 시즌이 되면 나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놀이터에서 보초를 선다. 아이가 아직 어린 탓도 있지만 놀이터는 일종의 나의 사회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동네 엄마들과 우정을 쌓으며 각종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아이의 또래 친구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즉 놀이터는 단순한 '놀이의 장소'가 아닌 '사교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에 자리한 놀이터는 넓지만 외진 곳이 없고 뻥 뚫려 있어서 모든 공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아이가 어딘가에서 넘어져 울어도, "엄마" 하고 크게 부르면 금세 출동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아파트 주민이 아닌 사람들도 자주 놀이터를 이용하는데 '청담동답게' TV로만 보던 '그들'도 종종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 모습을 드러낸다. 청담동 고급빌라에 사는 대한민국 탑 여배우, 열혈 육아 대디 개그맨, 히트곡 제조기로 명성이 자자한 작곡가 등등.
미모의 여배우 A 씨는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을 반짝이며 종종 아이와 함께 놀이터에 나타난다. 그녀가 등장하면 놀이터에 있는 주민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A 씨다!'
'역시 배우는 배우네.'
'맨얼굴이 왜 저리 예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여배우와 함께 온 아이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엄마를 닮았나? 아빠를 닮았네. 키가 크네. 부럽다. 씩씩하네. 등등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아이와 말을 섞고 함께 놀기 시작하면 겉으로 내색은 안 하지만 한껏 상기된 마음으로 "앗, OOO 아들과 내 아들이 함께 놀고 있어." 하며 친구에게 카톡을 보낸다.
그 순간만큼은 같은 동네 주민이자 아이를 키우는 육아맘이라는 생각에 동지애를 느낀다. 보통 엄마들처럼 아이가 몇 살이냐, 학교는 어디냐 등등 어색한 순간을 무마시켜줄 평범한 대화들을 이어가기도 한다. 예쁘지만 예쁜 척하지 않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도 그녀는 종종 놀이터에 나타나 간식을 나눠먹고 친구들과 투닥거리는 아이를 혼내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 갔다.
또 하루는 맨 얼굴의 털털한 모습으로 나타난 여배우 A 씨와는 다르게 한껏 멋을 낸 여배우 B 씨가 놀러 왔다. 그녀는 매우 높은 굽의 쇼트 팬츠 차림이었고 아이를 돌봐주는 시터와 함께 '화려'하게 등장했다. 인형처럼 예쁜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그녀가 서있는 그곳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주변 시선을 의식하는 듯한 모습이었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와 아이는 놀이터를 금세 떠났다. 그녀가 자리를 뜨자마자 놀이터에 머물던 우리들은 그녀에 대해 토론했다.
"놀이터 오면서 쓸데없이 왜 저렇게 예뻐?"
"그런데 왜 여기까지 왔을까?"
"애가 놀이터 가자고 그랬겠지. 거기, 그 빌라에 놀이터가 없잖아."
"아니 집값이 그렇게 비싼데 왜 놀이터가 없어?"
"그러니까.. 골프연습장은 있어도 놀이터는 없대!"
"역시 애 키우기는 우리 아파트가 최고야. 그렇지?"
"맞아 맞아, 육아의 8할은 놀이터지!"
우리의 의미 없는 대화는 보통 이렇게 '놀이터 부심'으로 마무리된다. 해가 지면 엄마들은 아쉬워하는 아이를 데리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현관문을 열자 어질러진 장난감으로 발 디딜 틈 없는 거실이 보인다. 몇 개 있지도 않은 각종 가구, 가전들로 가득 찬 좁은 방들을 보니 숨이 턱 막힌다. 마침 인터폰이 울린다. 자리가 없어 이면주차를 했는데 경비아저씨가 지금 당장 앞 차가 나간다고 빨리 차를 빼 달라고 하신다. 서둘러 차키를 챙겨 나가 차를 빼주고 다시 주차를 했다. 주차 간격이 기네스북 수준이다. 문을 아주 조금 열고 옆 차에 닿지 않게 최대한 숨을 들이마시고 게걸음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감춰둔 진짜 속마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아~~~~!!! 나도 주차장 넓고 방 많은 고급 빌라로 이사 가고 싶다. 청담동에 살면 뭐하냐. 놀이터 따위 없어도 그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