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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인생

소중한 남편

by 뚜기

남편이 갑자기 뒤로 넘어졌다. “어이쿠야!” 헛디딘 발에 놀라 달려가 부축하니 간신히 중심을 잡는다. “신발이 익숙하지 않아 미끄러졌어. 이까짓 거 가지고 호들갑이긴.” 남편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아팠다. 수레를 스타렉스에 싣던 중 생긴 일이다. 그 충격으로 침묵만 흘렀고, 남편은 새우잠을 자며 씻지도 못한 채 지내고 있었다. 내가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洗足) 씻겨주다 보니 발목과 정강이에 상처투성이, 피딱지까지 있었다. 속이 상했다.


우리는 중국집에 식자재를 납품하는 일을 한다. 거래명세표를 받아 물건을 싣고 납품하고, 광고물도 서울에서 찾아 다시 배달하며 때로는 주방장과 면장도 소개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의 통화, 주문 확인, 단가 조정… 남편은 견적서를 들고 거래처를 방문하고, 무거운 3L~20L 식재료를 직접 옮긴다. 서울 방산시장, 충무로, 응봉동까지 다니는 반복된 하루가 26년째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수레는 미끄러지고 차는 헛바퀴를 돌지만, 일요일 외에는 쉬지 못한다.


남편이 왼쪽 어깨를 다친 작년 11월부터 내가 함께 다녔다. 몸으로 하는 일이라 다치면 대체가 어렵다. 나는 도와줄 줄 몰라 답답하고 막막했지만, 자율방범대 봉사활동 덕에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었고 병원도 틈틈이 다녔다. 어깨가 조금 나아질 무렵 다시 엉덩이를 다쳤고, 말도 어눌해지며 운전도 힘들어해 내가 운전대를 잡게 되었다. 강인했던 남편의 모습이 연민으로 다가왔고, 그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차 안에서 우유와 빵으로 점심을 대신하며 부부애도 몽글몽글 피어났다.


금요일마다 큰아이 친구인 T가 도우러 오는데, 남편이 다친 날부터 한 주도 빠지지 않고 함께했다. T는 벨기에에서 왔고, 한강과 한국의 음식을 좋아하며 겸손하고 성실하다. 어느 날은 남편 대신 T와 하루 종일 일했는데, 거래처에서는 오히려 그를 더 반기기도 했다. 서운하면서도 내가 눈도장을 찍지 못한 탓이라 웃고 말았다.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하다고 느낀 건, 좋은 인연들과 배려 덕분이다.


남편과 팀이 물건을 싣고 출발하면 나는 두 손을 흔들며 외친다. “여보, T! 안전하게 다녀오세요. 파이팅!” 꽃들이 피는 계절에 T가 예쁜 봄을 보고 갔으면 좋겠다. 남편 없는 시간, 나는 물건 정리하고, 가게 청소하고, 매입처 물건 검수까지 해낸 뒤 냉동 떡 한 조각과 믹스 커피로 점심을 해결한다.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나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남편을 돕지 못했던 후회들… 그리고 지금, 나는 남편 덕분에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남편과 함께 하루를 보내며 잔소리도 있었고, 웃음도 있었고 고마움도 피어났다. 서울로 광고물 찾으러 갈 때는 차 안에서 수다도 떨고 노래도 듣는다. 남편의 색소폰 연주 ‘동전인생’을 들으며 외로움과 함께 그가 걸어온 터널을 함께 지나온 기분이 든다.


남편의 상처는 삶의 훈장이었고, 그 훈장을 대신 짊어진 그는 무뚝뚝하면서도 사무적이지만 가끔은 내게 홈런 같은 사랑을 준다. “A맘, 사랑합니다. 3/27일.” 긴 세월을 함께 했기에, 그 말이 롱런처럼 길고 울림이 크다. 그의 어깨와 엉덩이가 속히 회복되기를… 그리고 오늘도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훈장을 달아준다. “애썼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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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이야깁니다. ♡

A는 딸, T는 딸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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